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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용당동에 있었던 동명목재 공장 뒷편에 말레이지아,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수입한 원목을 바다에 그대로 띄어 놓은 장면이 인상적이다. 동명목재는 부산에 뿌리를 둔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합판공장으로, 1970년대에는 7년간 수출 1위 자리를 고수했을 정도로 견실한 기업이었다. 부산에 기반을 둔 덕분에 한국전쟁의 참화를 피해갈 수 있었던 동명목재는 전후복구 사업과 더불어 대단한 호황을 누렸다. 1961년에 등장한 박정희 정권이 '산림녹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벌목금지' 조치를 내렸으나, 동명목재는 땔감 부족으로 산림이 황폐해진 1959년부터 인도네시아 산 원목(나왕)을 수입기로 사업 방침을 바꾼 것이 시대 상황과 맞아 떨어졌다.<ref>[http://board.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140719000037 부산일보,정순형의 부산기업 스토리, 동명목재 2017년2월12일 확인]</ref><br/> | 부산 용당동에 있었던 동명목재 공장 뒷편에 말레이지아,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수입한 원목을 바다에 그대로 띄어 놓은 장면이 인상적이다. 동명목재는 부산에 뿌리를 둔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합판공장으로, 1970년대에는 7년간 수출 1위 자리를 고수했을 정도로 견실한 기업이었다. 부산에 기반을 둔 덕분에 한국전쟁의 참화를 피해갈 수 있었던 동명목재는 전후복구 사업과 더불어 대단한 호황을 누렸다. 1961년에 등장한 박정희 정권이 '산림녹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벌목금지' 조치를 내렸으나, 동명목재는 땔감 부족으로 산림이 황폐해진 1959년부터 인도네시아 산 원목(나왕)을 수입기로 사업 방침을 바꾼 것이 시대 상황과 맞아 떨어졌다.<ref>[http://board.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140719000037 부산일보,정순형의 부산기업 스토리, 동명목재 2017년2월12일 확인]</ref><br/> | ||
− | 이후 동명산업(주), 동명중공업(주), 동명식품(주) 등을 설립하고 동명목재 그룹으로 성장하였으나, 1980년 제5공화국 신군부에 의해 그룹이 와해되었다.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위원장 안병욱)는 22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등이 동명목재의 창업자인 고 강석진씨와 그의 아들 강정남(69·현 동명문화학원 이사장)씨 등 이사진을 반사회적 기업인으로 지목해 명예를 훼손했고, 범죄 혐의가 없는데도 강제 수사를 하면서 고문 등의 가혹행위를 저질렀다”고 밝히고,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사과하고 재발방지에 힘쓸 것을 국가에 권고하였다.<ref>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17564.html#csidxdffebdddaeb0eb6af78b969a1459849 한겨레신문, 온라인기사, 2017년2월13일 확인]</ref> | + | 이후 동명산업(주), 동명중공업(주), 동명식품(주) 등을 설립하고 동명목재 그룹으로 성장하였으나, 1980년 제5공화국 신군부에 의해 그룹이 와해되었다.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위원장 안병욱)는 22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등이 동명목재의 창업자인 고 강석진씨와 그의 아들 강정남(69·현 동명문화학원 이사장)씨 등 이사진을 반사회적 기업인으로 지목해 명예를 훼손했고, 범죄 혐의가 없는데도 강제 수사를 하면서 고문 등의 가혹행위를 저질렀다”고 밝히고,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사과하고 재발방지에 힘쓸 것을 국가에 권고하였다.<ref>[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17564.html#csidxdffebdddaeb0eb6af78b969a1459849 한겨레신문, 온라인기사, 2017년2월13일 확인]</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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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13일 (월) 18:04 판
동명목재 | |
작가 | 하인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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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연도 | 1973년 |
규격 | 300호(290.9x197cm) |
유형 | 경제 |
분류 | 유화 |
소장처 | 미상 |
개요
1970년대 당시 생산능력 세계5위의 국제적 규모의 합판생산업체로 성장한 동명목재.
내용
부산 용당동에 있었던 동명목재 공장 뒷편에 말레이지아,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수입한 원목을 바다에 그대로 띄어 놓은 장면이 인상적이다. 동명목재는 부산에 뿌리를 둔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합판공장으로, 1970년대에는 7년간 수출 1위 자리를 고수했을 정도로 견실한 기업이었다. 부산에 기반을 둔 덕분에 한국전쟁의 참화를 피해갈 수 있었던 동명목재는 전후복구 사업과 더불어 대단한 호황을 누렸다. 1961년에 등장한 박정희 정권이 '산림녹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벌목금지' 조치를 내렸으나, 동명목재는 땔감 부족으로 산림이 황폐해진 1959년부터 인도네시아 산 원목(나왕)을 수입기로 사업 방침을 바꾼 것이 시대 상황과 맞아 떨어졌다.[1]
이후 동명산업(주), 동명중공업(주), 동명식품(주) 등을 설립하고 동명목재 그룹으로 성장하였으나, 1980년 제5공화국 신군부에 의해 그룹이 와해되었다.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위원장 안병욱)는 22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등이 동명목재의 창업자인 고 강석진씨와 그의 아들 강정남(69·현 동명문화학원 이사장)씨 등 이사진을 반사회적 기업인으로 지목해 명예를 훼손했고, 범죄 혐의가 없는데도 강제 수사를 하면서 고문 등의 가혹행위를 저질렀다”고 밝히고,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사과하고 재발방지에 힘쓸 것을 국가에 권고하였다.[2]
관련 민족기록화
민족기록화 1차 경제편 (1973년 4월~1974년 12월)
추출정보
작품정보 연결망
관련항목
노드 | 관계 | 노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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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두-동명목재 | ~에 의해 그려지다 | 하인두 |
시간정보
중심 | 시간정보명 | 시간값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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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두-동명목재 | 제작연도 | 1973년 |
총무처 | 소장처 | 1979년 |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