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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칭=姜邯贊 標準影幀 | |한자명칭=姜邯贊 標準影幀 |
2017년 9월 20일 (수) 21:39 판
강감찬 표준영정 | |
한자명칭 | 姜邯贊 標準影幀 |
---|---|
작가 | 장우성 |
제작시기 | 1974년 |
소장처 | 안국사 |
유형 | 표준영정 |
크기(세로×가로) | 210×120㎝ |
목차
정의
고려의 명장 강감찬(姜邯贊, 948-1031년)의 모습을 그린 국가표준영정.
내용
표준영정의 제작 및 보관
현재 강감찬 표준영정은 서울 관악구 낙성대(落星垈)에 있는 안국사(安國祠)에 모셔져 있다. 그리고 현재 모셔져 있는 영정은 1974년 월전 장우성 화백에 의해 그려진 작품이 아니라 금광복 화가의 작품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1998년 낙성대에서 소장하고 있던 장우성 화백의 표준영정을 도난당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와 관련된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의 한겨레신문 기사 내용을 참고할 수 있다.
관악구청쪽은 영정을 도둑맞은 뒤 1974년 낙성대 준공에 맞춰 이 영정을 그린 한국화가 월전 장우성 화백에게 부탁해 다시 그려줄 것을 요구했으나, 장 화백이 "나이가 들어 힘이 부친다"며 사양하자 다른 화가에게 부탁해 새로 영정을 그려 모셔 놓았다. 도둑맞은 영정은 높이 212cm, 너비 121cm 크기로, 이를 그린 장 화백이 서울대 미대 초대학장과 국전심사위원장을 지낸 대표적인 한국화가여서 상당히 값이 나가리라 미술계 관계자들은 보고 있다. 충남 현충사의 이순신 장군과 독립기념관 유관순 열사의 영정도 장 화백의 작품이다.[1]
장군 영정을 도둑 맞은 때는 1998년 1월 11일 밤과 12일 새벽 사이로, 누군가 사당에 침입해 면도칼로 영정을 도려내 훔쳐간 것을 숙직을 끝낸 관리직원이 발견했다. 구청쪽은 곧바로 장 화백에게 영정을 다시 그려 달라고 요청했으나 나이를 이유로 거절하자, 화가 금광복(40, 관악구 신림동)씨에게 160만원과 함께 영정 사진을 건네주며 그대로 그려 달라고 부탁해 새 영정을 마련했다. 금씨는 "그림을 다 그리고 표구점에 맡겼더니 구청쪽에서 나도 몰래 영정을 찾아갔다"며 "새로 영정을 모실 때에는 제(祭)로 예를 갖춰야 하는데도 지난 3월 그냥 걸어 놓았다"고 말했다. 주영근 관악구청 공원녹지과장은 "장 화백의 영정은 장군을 모시는 무속인이 훔쳐갔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그는 또 "해마다 음력 8월에 인헌제(仁憲祭)를 하는데 두 번씩이나 경비를 지출할 필요가 없어 제를 지내지 않았다"고 해명했다.[2]
관악경찰서는 "도난당한 영정이 월전 선생 작품이라는 말을 듣지 못해 무명 화가가 그린 것으로 알았다"며 "그때 작품 가치가 없다고 보고 수사를 종결했다"고 말했다.[3]
문헌에 기록된 외모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등 문헌에서는 '형체와 외모가 작고 못생겼으며 옷은 때가 묻고 헤져서 볼품은 보통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민간 설화에 전하는 강감찬의 인물은 '얼굴이 얽구 천하 박색', '남들과 섞여 있을 정도도 안되고', '사람도 아니요, 귀신도 아니요' 등 천하 박색이다. 더욱이 체구가 왜소하여 엎드리면 마치 여우가 기어가는 듯했고, 키는 다섯자, 혹은 석자 등 난장이나 다름이 없어 보였다는 것. 한 자가 30.3cm 이니 계산해 보면 151cm 정도이다. 그나마 얼굴은 잘생겼던 모양이다. 그런데 강감찬은 그 점이 맘에 들지 않았다. 남아 대장부의 얼굴이 아니라며 손님을 불러 얼굴을 곰보로 만들었다. 손님은 마마신 즉, 천연두를 의미한다. 두 번의 시도에도 얼굴이 미색이자 세 번째는 보다 강하게 얼굴을 얽은 뒤에야 '장부의 얼굴이 이 정도는 되어야지' 하고 만족했다고 한다.[4]
표준영정에 묘사된 모습
강감찬 영정은 전신 입상으로서 얼굴은 좌안 9분면이며 몸은 정면을 향하고 있다. 갑주를 착용하고 투구를 썼으며 허리에 찬 칼을 왼손으로 잡고 호피 위에 서 있다. 치켜 올라간 눈과 검은 구레나룻과 수염이 용맹과 위엄을 갖춘 무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장우성은 고려시대 노국대장공주 정릉의 왼쪽 무인상을 토대로 강감찬의 갑주와 투구를 제작하였다고 한다. 갑주의 경우, 허리 양 옆에 댄 상상갑의 모양과 대퇴부에 댄 네모난 하상갑 그리고 좌우 하상갑 사이 앞쪽에 위치한 전상갑 등의 모습을 하고 있다.[5]
표준영정제도가 제정된 이래 70년대와 80년대 초까지 이순신, 강감찬, 을지문덕, 김유신 등 무인들이 다수 제작되었음에도 무구에 대한 고증은 작가에 일임되었다. 이 때문에 고증이 쉽지 않았다. 1986년 11월에는 영정동상심의위원으로 무구전문가를 추가하여 장군 등의 동상이나 영정을 제작할 때 무구에 대한 고증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짧은 제작 기간에 인문학적 지식이 부족한 작가가 전적으로 고증을 했기 때문에 표준영정 및 동상에 고증 논란이 늘 뒤따랐으며 이중 무구, 갑옷 등에 논란이 많았다.[6]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강감찬 표준영정 | 표준영정 | A는 B에 해당한다 | |
강감찬 표준영정 | 강감찬 | A는 B를 묘사하였다 | |
강감찬 표준영정 | 안국사 |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 |
강감찬 표준영정 | 장우성 | A는 B에 의해 그려졌다 | |
강감찬 표준영정 | 금광복 | A는 B에 의해 모작되었다 | |
강감찬 표준영정 | 강감찬 표준영정 도난사건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974년 | 강감찬 표준영정이 표준영정으로 지정되었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7.471321 | 126.960023 | 강감찬 표준영정은 안국사에 소장되어 있다. |
시각자료
주석
- ↑ 김태경, "장우성 화백의 강감찬 장군 영정 도난 모작 대체하고 '시치미'", 『한겨레신문』, 1998년 07월 20일.
- ↑ 김태경, "장우성 화백의 강감찬 장군 영정 도난 모작 대체하고 '시치미'", 『한겨레신문』, 1998년 07월 20일.
- ↑ 김태경, "장우성 화백의 강감찬 장군 영정 도난 모작 대체하고 '시치미'", 『한겨레신문』, 1998년 07월 20일.
- ↑ 안광선, "설화 속 인물 다시 보기: 20. 강감찬 외모(하)", 『강원도민일보』, 2014년 08월 08일.
- ↑ 이영미, 「한국표준영정연구 -제도의 제정과 변천과정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5, 117쪽.
- ↑ 이영미, 「한국표준영정연구 -제도의 제정과 변천과정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5, 44쪽.
참고문헌
유용한 정보
- "강감찬 표준영정",
『한민족정보마당』online , 한국문화정보원. - "강감찬장군표준영정지정(문화공보부공고제226호)-관보제6785호(1974년6월26일)",
『관보』online , 국가기록원.
더 읽을거리
- 전시도록
- 문화체육부, 『표준영정도록-역사를 빛낸 선현』, 문화체육부, 1993.
- 문화체육부, 『표준영정도록-역사를 빛낸 선현』, 문화체육부, 1999.
- 이천시립월전미술관, 『월전의 붓끝, 한국화 100년의 역사』, 이천시립월전미술관, 2012.
- 단행본
- 장우성, 『월전회고록-화단풍상칠십년』, 미술문화, 2003.
- 논문
- 조인수, 「월전 장우성의 초상화」, 『제2회 월전학술포럼』발표자료집, 월전학술포럼, 2014, 1-1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