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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19일 (화) 19:49 판
조인영(趙寅永) | |
대표명칭 | 조인영 |
---|---|
한자표기 | 趙寅永 |
생몰년 | 1782년-1850년 |
본관 | 풍양(豊壤) |
시호 | 문충(文忠) |
호 | 운석(雲石) |
자 | 희경(羲卿) |
시대 | 조선시대 |
국적 | 조선 |
대표저서 | 『운석유고(雲石遺稿)』 |
대표직함 | 호조·형조판서, 우의정, 영의정. |
부 | 조진관(趙鎭寬) |
모 | 홍익빈(洪益彬)의 딸 |
성격 | 문선 |
유형 | 인물 |
목차
정의
1782(정조 6)∼1850(철종 1).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내용
조인영 가계에 대해서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희경(羲卿), 호는 운석(雲石)이다. 조상경(趙尙絅)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엄(趙?)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조진관(趙鎭寬)이다. 어머니는 홍익빈(洪益彬)의 딸이다. 형은 국구(國舅) 조만영(趙萬永)이다.
조인영의 생애
- 1819년(순조 19) 식년문과에 장원급제, 바로 응교에 임명되었다. 그 해 형의 딸이 세자빈이 되면서 홍문록(弘文錄: 홍문관의 제학이나 교리를 선발하기 위한 제1차 인사기록)·도당록(都堂錄)에 선입되었다. 1822년 함경도암행어사로 복명 후 대사헌에 특진하였다. 1826년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한 뒤 이조참의·대사성·세손좌유선(世孫左諭善)·제학·예조참판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 1830년 세자[익종(翼宗)으로 추존]가 죽자 세손부(世孫傅)·우부빈객으로서 나이 어린 세손의 보호에 힘썼다. 1834년 세손이 헌종으로 즉위하자 바로 이조판서에 기용되고, 이어 대제학, 호조·형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면서 훈련대장 등 군사권을 장악한 형 조만영과 함께 풍양 조씨 세도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 1839년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기해사옥(己亥邪獄)]을 주도, 그 해 우의정에 올라 『척사윤음(斥邪綸音)』을 찬진(撰進)하였다. 1841년(헌종 7) 영의정이 되어 안동 김씨를 압도하고 풍양 조씨의 세도를 확립했으나 1846년 형이 죽자 실세(失勢), 벼슬에서 물러났다. 1849년 철종 즉위 후 민심 수습의 일환으로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곧 죽었다.
조인영의 업적
- 10여 년 간 재상으로 있으면서 국가 재정의 확보와 민생 문제에 대한 개선책을 자주 건의하였다. 또 이단이 성행하는 것은 정학[正學: 주자학(朱子學)]이 천명되지 못한 때문이라 하여 도산서원·화양서원 등의 서원에 대한 특전(特典)의 부여와 충신·의사의 포증(褒贈), 경명행수(經明行修)한 선비의 발탁 등을 주장하였다.
- 김정희(金正喜)와 함께 우리 나라의 금석문(金石文)을 수집, 금석학 연구에 정진하였다. 특히 1816년 성절사(聖節使) 일행을 따라 북경(北京)에 갔을 때 청의 금석학자 유연정(劉燕庭)과 교유, 그에게 조선 금석탁본(金石拓本) 수십 종을 기증하였다.
- 다음 해 귀국하여 김정희와 함께 비봉(碑峰)에 올라, 앞서 발견했던 비가 진흥왕의 순수비(巡狩碑)임을 확인, 68자를 심정(審定)하여 탁본을 작성하고 함께 엄밀한 고증을 거친 다음 이를 『해동금석존고(海東金石存攷)』와 함께 다시 유연정에게 보내어,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을 편찬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 문장·글씨·그림에 모두 능했고 1847년 왕명으로 국조보감찬집청(國朝寶鑑纂輯廳)의 총재가 되어 정조·순조의 두 왕 및 문조(文祖: 익종) 대리청정 때의 보감을 편찬하였다. 뒤에 헌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문과 소차(疏箚)를 모은 『운석유고(雲石遺稿)』 20권이 전하고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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