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기록화관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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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궁중기록화 복식 기타 후수백관01 석주선박물관.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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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밀창군 이직(密昌君 李樴)의 후수,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http://museum.dankook.ac.kr/)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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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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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복과 제복 차림을 할 때 [[조복 상의|적초의]]나 [[제복 상의|청초의]] 위에 뒤쪽 허리 아래로 드리우는 장식이다. <ref>국립고궁박물관, 『왕실문화도감』, 국립고궁박물관, 2013, 91쪽.</ref>
+
[[백관]]이 대사(大社), 경사일(慶事日), 원단(元旦), 동지(冬至) 및 조칙(詔勅)을 반포하거나 진표(進表)시에 또는 국가의 제사에 뒤쪽 허리 아래로 드리우는 장식이다.<ref>국립고궁박물관, 『왕실문화도감』, 국립고궁박물관, 2013, 91쪽.</ref>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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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복식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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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수(백관)|후수]]의 제도는 문헌상으로는 국말까지 변함이 없으며, [[후수(백관)|후수]]의 문양은 직접 짜서 표현하도록 되어 있으며, 문양을 표현하는 색사의 개수, 후수에 부착하는 환(環)으로 품계를 구별하였다.<ref>박성실ㆍ장정윤, 「조선시대 문무백관 조복제도의 고찰-가선대부 권우의 출토조복을 중심으로」, 『衣ㆍ紋의 조선 옷』, 민속원, 2016, 200~201쪽.</ref> 품계를 구분하는 [[후수(백관)|후수]] 문양의 종류에는 운학(雲鶴)ㆍ반조(盤鵰)ㆍ연작(練鵲)ㆍ계칙(鸂䳵)이며,<ref>박성실ㆍ장정윤, 「조선시대 문무백관 조복제도의 고찰-가선대부 권우의 출토조복을 중심으로」, 『衣ㆍ紋의 조선 옷』, 민속원, 2016,  200~201쪽</ref> 후수의 윗부분에는 1·2품 금환, 3·4품 은환, 5품 이하가 동환을 품계에 따라 1쌍씩 달았다.<ref>김문식ㆍ김지영ㆍ박례경ㆍ송지원ㆍ심승구ㆍ이은주, 『왕실의 천지제사』, 돌베개, 2011, 123~124쪽.</ref> 도설에서 보이는 [[후수(백관)|후수]]의 문양은 대부분 ‘학’으로 추정되며, 조선 전기에는 1쌍이었던 것이 조선 중기 2쌍으로 변화하여 국말에는 학의 수가 점점 많아진 것으로 보인다.<ref>박성실ㆍ장정윤, 「조선시대 문무백관 조복제도의 고찰-가선대부 권우의 출토조복을 중심으로」, 『衣ㆍ紋의 조선 옷』, 민속원, 2016, 200~201쪽.</ref>
===착용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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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세자]], 왕자, 대원군, [[문무백관]] 등이 착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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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후수(백관)|후수]] 유물의 문양은 대부분 학을 수 놓았으며, [[신경유|신경유(申景裕)]] [[후수(백관)|후수]]의 경우 문양을 알 수는 없지만 금(錦)직물이다.<ref>최연우, 「조선후기 관원 조복(朝服)의 구성과 형태 연구」, 『한복문화』 제18권 3호, 2015, 144쪽</ref> 이외 [[권우|권우(權堣)]] [[백관의 조복|조복]]의 [[후수(백관)|후수]]는 제도상에는 없는 ‘노사(鷺鷥)’ 문양이 2쌍 수 놓아져 있다. ‘노사(鷺鷥)’는 ‘백로’의 다른 이름으로 우리말 이름으로는 ‘해오라기’라고 한다.<ref>박성실ㆍ장정윤, 「조선시대 문무백관 조복제도의 고찰-가선대부 권우의 출토조복을 중심으로」, 『衣ㆍ紋의 조선 옷』, 민속원, 2016, 200~201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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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관의 제복]] [[후수(백관)|후수]]의 경우 [[임진왜란]] 이후에는 [[후수(백관)|후수]]의 문양을 자수 대신 그림을 그려 대신하기도 하였는데 [[숙종]]대 [[종묘의궤|『종묘의궤(宗廟儀軌)』]]에는 정1품의 헌관과 천조관만 사색사, 직성, 운학, 화금을 사용하고 나머지 헌관과 집사자들은 홍주(紅紬)에 그림을 그린다고 하였다. [[후수(백관)|후수]]의 형태는 조선 후기로 갈수록 화려해지면서 그 크기가 커지며, 제도상으로는 국말까지 수(綬)와 대대(大帶)는 따로 제작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국말의 유물에는 수(綬)가 대부분 대대(大帶)에 연결되어 있다.<ref>장정윤, 「朝鮮時代 文武百官 朝服에 關한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118쪽.</ref>
  
===착용상황===
+
=='''지식 관계망'''==
국가 제사를 지낼 때, 정월 초하루, 동짓날, 경축일 등에 [[왕]]에게 하례(賀禮)를 드리는 의례에 참석할 때 드리운다.<ref>국립고궁박물관, 『왕실문화도감』, 국립고궁박물관, 2013, 89쪽.</ref>
 
 
 
===형태===
 
비단 위에 관품에 따라 다른 종류의 새를 수놓은 몸판과 아래에 늘어뜨려진 망수(網綏)로 되어 있고, 몸판 위에 2개의 환(環)이 달려 있다.<ref>국립고궁박물관, 『왕실문화도감』, 국립고궁박물관, 2013, 90쪽.</ref><br/>
 
『국조오례의서례』에는 3품 이상 황록적자 4색으로 짜며 4~6품은 3색, 7품은 2색으로 짠다고 하였다. 또한 무늬도 1·2품 운학(雲鶴), 3품 소리개[반조(盤鵰)], 4~6품 때까치[연작(練鹊)], 7품 이하가 비오리[계칙(㶉鶒)]으로 품계에 따라 차등을 두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그림을 그려 자수를 대신하기도 하였는데 숙종대 『종묘의궤』에는 정1품의 헌관과 천조관만 사색사, 직성, 운학, 화금을 사용하고 나머지 헌관과 집사자들은 홍주(紅紬)에 그림을 그린다고 하였다.<br/>
 
후수의 윗부분에는 1·2품 금환, 3·4품 은환, 5품 이하가 동환을 품계에 따라 1쌍씩 달았다.<ref>김문식·김지영·박례경·송지원·심승구·이은주, 『왕실의 천지제사』, 돌베개, 2011, 123~124쪽.</ref>
 
 
 
===기타===
 
조선후기 후수 유물의 자수 무늬를 보면 다른 새는 보이지 않고 학만 보인다. 3쌍, 4쌍, 5쌍 등 다양하게 수를 놓은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영조 대 밀창군 묘 출토의 후수는 2쌍의 학을 수놓았다. 후기로 가면서 학의 마리 수가 품계를 구분하는 단서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ref>김문식·김지영·박례경·송지원·심승구·이은주, 『왕실의 천지제사』, 돌베개, 2011, 124쪽.</ref>
 
 
 
==지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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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궁중기록화 복식 기타 후수백관02 의문의조선옷 203쪽.jpg | 권우(權堣, 1610~16750)묘 출토 후수.<ref>경기도박물관, 『衣ㆍ紋의 조선 옷』, 민속원, 2016, 203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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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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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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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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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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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인용 및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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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박물관, 『衣ㆍ紋의 조선 옷』, 민속원, 2016.
 +
* 高光林, 「金冠 朝服에 關한 硏究」, 인천교육대학교 논문집12, 1978.
 +
* 高光林, 『韓國의 冠服』, 和成社, 1990.
 +
* 국립고궁박물관, 『왕실문화도감』, 국립고궁박물관, 2013.
 +
* 단국대학교 석주선 기념박물관, 『名選-中』, 단국대학교출판부, 2004.
 +
* 류희경, 『우리옷 이천년』, 미술문화, 2001.
 +
* 문화재청, 『한국의 초상화-역사속의 인물과 조우하다』, 문화재청, 2007.
 +
* 李善熙, 「祭服의 起源과 變遷에 關한 硏究」, 성신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
 +
* 朴京子, 「祭禮의 思想과 祭服에 關한 硏究」, 성신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75.
 +
* 석주선, 『한국복식사』, 보진재, 1971.
 +
* 石宙善, 『衣』, 고려서적주식회사, 1985.
 +
* 이강칠 외, 『역사인물초상화대사전』, 현암사, 2003.
 +
* 임상임ㆍ유관순ㆍ추미경, 「조선후기 죽산(竹山) 박씨 집안의 조복(朝服)에 관한 연구 –원광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赤綃衣·赤綃裳을 중심으로-」, 『한국의류학회지』 26권 5호, 한국의류학회, 2002.
 +
* 장정윤, 「朝鮮時代 文武百官 朝服에 關한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
* 최영선, 「朝鮮時代 文武百官 祭服에 關한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4.
 +
* 홍나영ㆍ신혜성ㆍ이은진 지음, 『동아시아 복식의 역사』, 교문사, 2011.
  
 
===더 읽을거리===
 
===더 읽을거리===
 
===유용한 정보===
 
  
 
[[분류:궁중기록화]]
 
[[분류:궁중기록화]]
 
[[분류:복식]]
 
[[분류:복식]]

2017년 9월 18일 (월) 18:51 판


후수
(後綬)
밀창군 이직(密昌君 李樴)의 후수,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http://museum.dankook.ac.kr/) 소장.
대표명칭 후수
한자표기 後綬
이칭별칭 수(綬)
구분 기타
착용신분 왕세자, 백관
착용성별 남성



정의

백관이 대사(大社), 경사일(慶事日), 원단(元旦), 동지(冬至) 및 조칙(詔勅)을 반포하거나 진표(進表)시에 또는 국가의 제사에 뒤쪽 허리 아래로 드리우는 장식이다.[1]

내용

후수의 제도는 문헌상으로는 국말까지 변함이 없으며, 후수의 문양은 직접 짜서 표현하도록 되어 있으며, 문양을 표현하는 색사의 개수, 후수에 부착하는 환(環)으로 품계를 구별하였다.[2] 품계를 구분하는 후수 문양의 종류에는 운학(雲鶴)ㆍ반조(盤鵰)ㆍ연작(練鵲)ㆍ계칙(鸂䳵)이며,[3] 후수의 윗부분에는 1·2품 금환, 3·4품 은환, 5품 이하가 동환을 품계에 따라 1쌍씩 달았다.[4] 도설에서 보이는 후수의 문양은 대부분 ‘학’으로 추정되며, 조선 전기에는 1쌍이었던 것이 조선 중기 2쌍으로 변화하여 국말에는 학의 수가 점점 많아진 것으로 보인다.[5]

남아 있는 후수 유물의 문양은 대부분 학을 수 놓았으며, 신경유(申景裕) 후수의 경우 문양을 알 수는 없지만 금(錦)직물이다.[6] 이외 권우(權堣) 조복후수는 제도상에는 없는 ‘노사(鷺鷥)’ 문양이 2쌍 수 놓아져 있다. ‘노사(鷺鷥)’는 ‘백로’의 다른 이름으로 우리말 이름으로는 ‘해오라기’라고 한다.[7] 백관의 제복 후수의 경우 임진왜란 이후에는 후수의 문양을 자수 대신 그림을 그려 대신하기도 하였는데 숙종『종묘의궤(宗廟儀軌)』에는 정1품의 헌관과 천조관만 사색사, 직성, 운학, 화금을 사용하고 나머지 헌관과 집사자들은 홍주(紅紬)에 그림을 그린다고 하였다. 후수의 형태는 조선 후기로 갈수록 화려해지면서 그 크기가 커지며, 제도상으로는 국말까지 수(綬)와 대대(大帶)는 따로 제작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국말의 유물에는 수(綬)가 대부분 대대(大帶)에 연결되어 있다.[8]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왕세자 후수(백관) A는 B를 착용하였다 A ekc:wears B
백관 후수(백관) A는 B를 착용하였다 A ekc:wears B
종친 후수(백관) A는 B를 착용하였다 A ekc:wears B
백관의 조복 후수(백관) A는 B를 일습으로 갖춘다 A dcterms:hasPart B
백관의 제복 후수(백관) A는 B를 일습으로 갖춘다 A dcterms:hasPart B
후수(백관) 제복 상의 A는 B와 같이 착용하였다 A ekc:goesWith B
후수(백관) 제복 하상 A는 B와 같이 착용하였다 A ekc:goesWith B
후수(백관) 조복 상의 A는 B와 같이 착용하였다 A ekc:goesWith B
후수(백관) 조복 하상 A는 B와 같이 착용하였다 A ekc:goesWith B

시간정보

공간정보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주석

  1. 국립고궁박물관, 『왕실문화도감』, 국립고궁박물관, 2013, 91쪽.
  2. 박성실ㆍ장정윤, 「조선시대 문무백관 조복제도의 고찰-가선대부 권우의 출토조복을 중심으로」, 『衣ㆍ紋의 조선 옷』, 민속원, 2016, 200~201쪽.
  3. 박성실ㆍ장정윤, 「조선시대 문무백관 조복제도의 고찰-가선대부 권우의 출토조복을 중심으로」, 『衣ㆍ紋의 조선 옷』, 민속원, 2016, 200~201쪽
  4. 김문식ㆍ김지영ㆍ박례경ㆍ송지원ㆍ심승구ㆍ이은주, 『왕실의 천지제사』, 돌베개, 2011, 123~124쪽.
  5. 박성실ㆍ장정윤, 「조선시대 문무백관 조복제도의 고찰-가선대부 권우의 출토조복을 중심으로」, 『衣ㆍ紋의 조선 옷』, 민속원, 2016, 200~201쪽.
  6. 최연우, 「조선후기 관원 조복(朝服)의 구성과 형태 연구」, 『한복문화』 제18권 3호, 2015, 144쪽
  7. 박성실ㆍ장정윤, 「조선시대 문무백관 조복제도의 고찰-가선대부 권우의 출토조복을 중심으로」, 『衣ㆍ紋의 조선 옷』, 민속원, 2016, 200~201쪽.
  8. 장정윤, 「朝鮮時代 文武百官 朝服에 關한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118쪽.
  9. 경기도박물관, 『衣ㆍ紋의 조선 옷』, 민속원, 2016, 203쪽.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경기도박물관, 『衣ㆍ紋의 조선 옷』, 민속원, 2016.
  • 高光林, 「金冠 朝服에 關한 硏究」, 인천교육대학교 논문집12, 1978.
  • 高光林, 『韓國의 冠服』, 和成社, 1990.
  • 국립고궁박물관, 『왕실문화도감』, 국립고궁박물관, 2013.
  • 단국대학교 석주선 기념박물관, 『名選-中』, 단국대학교출판부, 2004.
  • 류희경, 『우리옷 이천년』, 미술문화, 2001.
  • 문화재청, 『한국의 초상화-역사속의 인물과 조우하다』, 문화재청, 2007.
  • 李善熙, 「祭服의 起源과 變遷에 關한 硏究」, 성신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
  • 朴京子, 「祭禮의 思想과 祭服에 關한 硏究」, 성신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75.
  • 석주선, 『한국복식사』, 보진재, 1971.
  • 石宙善, 『衣』, 고려서적주식회사, 1985.
  • 이강칠 외, 『역사인물초상화대사전』, 현암사, 2003.
  • 임상임ㆍ유관순ㆍ추미경, 「조선후기 죽산(竹山) 박씨 집안의 조복(朝服)에 관한 연구 –원광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赤綃衣·赤綃裳을 중심으로-」, 『한국의류학회지』 26권 5호, 한국의류학회, 2002.
  • 장정윤, 「朝鮮時代 文武百官 朝服에 關한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 최영선, 「朝鮮時代 文武百官 祭服에 關한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4.
  • 홍나영ㆍ신혜성ㆍ이은진 지음, 『동아시아 복식의 역사』, 교문사, 2011.

더 읽을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