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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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탑은 [[구례 연곡사|연곡사]] 서쪽에 있으며, 소요대사의 사리를 모셔두고 있다. 승려의 사리를 두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그 아래에 기단(基壇)을 두고, 위로는 머리장식을 얹었으며, 각 부분이 8각으로 이루어져 있다.<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2,01540000,36 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문화재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정보』<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ref> | 이 탑은 [[구례 연곡사|연곡사]] 서쪽에 있으며, 소요대사의 사리를 모셔두고 있다. 승려의 사리를 두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그 아래에 기단(基壇)을 두고, 위로는 머리장식을 얹었으며, 각 부분이 8각으로 이루어져 있다.<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2,01540000,36 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문화재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정보』<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ref> | ||
− | 기단은 3단으로 나누어 각 단마다 연꽃무늬를 새겼으며, 그 위로 탑신을 받치도록 두툼한 괴임을 둔 점이 독특하다. 탑신의 몸돌은 한 면에만 문짝 모양을 새기고, 다른 곳에는 8부신중상(八部神衆像)을 돋을새김해 두었다 | + | 기단은 3단으로 나누어 각 단마다 연꽃무늬를 새겼으며, 그 위로 탑신을 받치도록 두툼한 괴임을 둔 점이 독특하다. 탑신의 몸돌은 한 면에만 문짝 모양을 새기고, 다른 곳에는 8부신중상(八部神衆像)을 돋을새김해 두었다.<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2,01540000,36 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문화재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정보』<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ref> |
− | + | 탑신석 1면에 ‘逍遙大師之塔(소요대사지탑)’, ‘順治六年庚寅(순치6년경인)’이라는 2줄의 오목새김명문이 있다. [[태능|소요대사]]는 1649년에 입멸하였는데, 바로 그 다음해에 이 승탑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ref>정영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6688 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 | + | 지붕돌은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큼지막하게 꽃장식을 얹어두었으며,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비교적 완전하게 남아 있다.<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2,01540000,36 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문화재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정보』<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ref> | |
+ | [[승탑]]과 [[탑비]]를 별도로 세우지 않고 승탑의 탑신석이나 다른 부재에 글자를 새기는 예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 승탑도 그 예의 하나이다.<ref>정영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6688 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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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12일 (화) 17:00 판
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 (求禮 鷰谷寺 逍遙大師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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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 이후 추가 예정 | |
대표명칭 | 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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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Stupa of Buddhist Monk Soyo at Yeongoksa Temple, Gurye |
한자 | 求禮 鷰谷寺 逍遙大師塔 |
주소 | 전남 구례군 토지면 피아골로 806-16, 연곡사 (내동리) |
문화재 지정번호 | 보물 제154호 |
문화재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
소유자 | 연곡사 |
관리자 | 연곡사 |
건립시대 | 조선시대 |
관련승려 | 태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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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연곡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승탑.
내용
이 탑은 연곡사 서쪽에 있으며, 소요대사의 사리를 모셔두고 있다. 승려의 사리를 두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그 아래에 기단(基壇)을 두고, 위로는 머리장식을 얹었으며, 각 부분이 8각으로 이루어져 있다.[1]
기단은 3단으로 나누어 각 단마다 연꽃무늬를 새겼으며, 그 위로 탑신을 받치도록 두툼한 괴임을 둔 점이 독특하다. 탑신의 몸돌은 한 면에만 문짝 모양을 새기고, 다른 곳에는 8부신중상(八部神衆像)을 돋을새김해 두었다.[2]
탑신석 1면에 ‘逍遙大師之塔(소요대사지탑)’, ‘順治六年庚寅(순치6년경인)’이라는 2줄의 오목새김명문이 있다. 소요대사는 1649년에 입멸하였는데, 바로 그 다음해에 이 승탑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3]
지붕돌은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큼지막하게 꽃장식을 얹어두었으며,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비교적 완전하게 남아 있다.[4]
승탑과 탑비를 별도로 세우지 않고 승탑의 탑신석이나 다른 부재에 글자를 새기는 예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 승탑도 그 예의 하나이다.[5]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 | 구례 연곡사 | A는 B에 있다 | |
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 | 태능 |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
주석
- ↑ "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 - ↑ "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 - ↑ 정영호, "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 - ↑ 정영호, "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정영호, "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