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두"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ncyves Wiki
(→갤러리) |
|||
36번째 줄: | 36번째 줄: | ||
===갤러리=== | ===갤러리=== | ||
<gallery mode=packed-hover heights=200px> | <gallery mode=packed-hover heights=200px> | ||
− | 파일:최치원 복두(신라).jpg|최치원 복두(신라)<ref> | + | 파일:최치원 복두(신라).jpg|채용신이 그린(1924년) 최치원 복두(신라)<ref>무성서원 소장.</ref> |
− | 파일:강민첨 복두(고려).jpg|강민첨 복두(고려)<ref> | + | 파일:강민첨 복두(고려).jpg|보물 제588호 강민첨 복두(고려)<ref>국립중앙박물관(http://www.museum.go.kr/) 소장.</ref> |
</gallery> | </gallery> | ||
2017년 9월 8일 (금) 18:29 판
복두 (幞頭) |
|
대표명칭 | 복두 |
---|---|
한자표기 | 幞頭 |
구분 | 관 및 쓰개 |
착용신분 | 백관 |
착용성별 | 남성 |
목차
정의
내용
사각형의 직물을 머리에 두르고, 두 귀[角]를 먼저 정수리 아래에서 묶고 다른 두 귀를 뒤에서 앞으로 올려 이마에서 묶던 두건의 형태에서 시작었다.[1] 이후 한 폭의 직물을 묶던 형태를 고정화시켜 2단으로 턱이 진 네모형이 되고 앞으로 올려 묶던 두 귀는 퇴하하고 뒤로 내린 두 귀는 좌우로 길게 뻗쳐진 형태로 발전하였다.[2]
북주[後周] 무제(武帝)가 처음 만들었다고 하며,[3] 한대(漢代) 즈음 두건을 사용하다 동한(東漢) 이후 두건에서 조금 변형된 형태인 복건(幅巾)이 출현하였다.[4] 위진남북조 시기 선비족의 모자가 유입되면서 복두가 탄생했다.[5] 신라 진덕여왕 이후 당나라에서 받아들여, 두 귀가 양옆으로 길게 뻗은 전각복두를 착용하였다고 한다.[6] 조선시대는 사모의 사용이 확대되면서 착용례가 줄어들어 조선후기에는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앵삼(鶯衫)과 함께 어사화를 꽃은 복두를 착용했다.[7]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백관 | 복두 | A는 B를 착용하였다 | A ekc:wears B |
백관의 공복 | 복두 | A는 B를 일습으로 갖춘다 | A dcterms:hasPart B |
시간정보
공간정보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채화복두를 쓴 악공", 문화원형백과 전통머리모양과 머리치레거리,
주석
- ↑ 孫杞, 『中國古輿服論叢』, 文物出版社, 1993, 205~223쪽.
- ↑ 孫杞, 『中國古輿服論叢』, 文物出版社, 1993, 205~223쪽.
- ↑ 孫杞, 『中國古輿服論叢』, 文物出版社, 1993, 205~223쪽.
- ↑ 孫杞, 『中國古輿服論叢』, 文物出版社, 1993, 205~223쪽.
- ↑ 孫杞, 『中國古輿服論叢』, 文物出版社, 1993, 205~223쪽.
- ↑ 한국복식사전, 전각복두
- ↑ 한국복식사전:복두
- ↑ 무성서원 소장.
- ↑ 국립중앙박물관(http://www.museum.go.kr/) 소장.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柳喜卿, 「우리나라의 冠帽」, 『대한가정학회지』 제4권, 대한가정학회, 1963.
- 李民周, 「朝鮮時代 王族冠帽에 關한 연구」,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6.
- 孫杞, 『中國古輿服論叢』, 文物出版社, 1993.
- 趙庚姬, 「朝幞頭에 關한 硏究」,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1.
- 황의숙 외3인, 『아름다운 한국복식』, 수학사,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