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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사수(士洙), 호는 겸재(謙齋). 이재(李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21년(경종 1)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1728년(영조 4) 별시문과의 을과에 급제, 사간원정자(司諫院正字)·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등을 역임하였다. | + |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사수(士洙), 호는 겸재(謙齋). [[이재 | 이재(李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21년(경종 1)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1728년(영조 4) 별시문과의 을과에 급제, 사간원정자(司諫院正字)·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등을 역임하였다. |
1744년 지평(持平)으로 있을 때 영조가 기로소(耆老所: 70세이상 문관 정이품이상의 노인 우대소)에 들어감을 반대하다가 남해(南海)에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의 배소에 가시울타리를 쳐 그 안에 가두어 둠) 되었다가 2년 뒤 석방되었다. | 1744년 지평(持平)으로 있을 때 영조가 기로소(耆老所: 70세이상 문관 정이품이상의 노인 우대소)에 들어감을 반대하다가 남해(南海)에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의 배소에 가시울타리를 쳐 그 안에 가두어 둠) 되었다가 2년 뒤 석방되었다. | ||
세손강서원유선(世孫講書院諭善)이 되어 세손인 정조를 보도(輔導)하였으며, 참판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ref>이순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0793 박성원]",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세손강서원유선(世孫講書院諭善)이 되어 세손인 정조를 보도(輔導)하였으며, 참판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ref>이순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0793 박성원]",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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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효가 화민성속(化民成俗)의 근본이 되는 점을 들어 백성들을 보호하고 국기를 다지는 원동력이 됨을 정책적인 차원에서 실시해보려는 의도를 그의 저술들을 통하여 엿볼 수 있다. | 그는 효가 화민성속(化民成俗)의 근본이 되는 점을 들어 백성들을 보호하고 국기를 다지는 원동력이 됨을 정책적인 차원에서 실시해보려는 의도를 그의 저술들을 통하여 엿볼 수 있다. | ||
− | 그의 심성론은 스승인 이간(李柬)의 학설을 지지함으로써 한원진(韓元震) 등의 호론(湖論)을 반박하고 낙론(洛論)에 동조하였다.<ref>이순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0793 박성원]",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 그의 심성론은 스승인 [[이간 | 이간(李柬)]]의 학설을 지지함으로써 [[한원진 | 한원진(韓元震)]] 등의 [[호론 | 호론(湖論)]]을 반박하고 [[낙론 | 낙론(洛論)]]에 동조하였다.<ref>이순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0793 박성원]",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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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성원은 예서(禮書)의 연구에 적극적인 힘을 기울여 연구과정에서 의혹된 점을 일일이 초출하여 조목마다 그의 사견을 첨부하여 『예의유집(禮疑類輯) | + | 박성원은 예서(禮書)의 연구에 적극적인 힘을 기울여 연구과정에서 의혹된 점을 일일이 초출하여 조목마다 그의 사견을 첨부하여 [[예의유집 | 『예의유집(禮疑類輯)』]]이라는 책자를 만들어 후학들의 예서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 밖에도[[돈효록 | 『돈효록(敦孝錄)』]], [[보민록 | 『보민록(保民錄)』]], [[돈녕록 | 『돈녕록(敦寧錄)』]], [[겸재집 | 『겸재집(謙齋集)』]] 등의 저서가 있다.<ref>이순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0793 박성원]",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화동정음통석운고 |『화동정음통석운고』]]의 저술 | *[[화동정음통석운고 |『화동정음통석운고』]]의 저술 | ||
− | 영조 23년(1747)에 지은 것인데, 정조 11년(1787) 책머리에 정조가 정음통석서(正音通釋序)를 써서 간행시켰기 때문에 『정음통석(正音通釋)』이라고도 한다. 그밖에 이본이 몇 종류가 있다. 『삼운통고(三韻通考) | + | 영조 23년(1747)에 지은 것인데, 정조 11년(1787) 책머리에 정조가 정음통석서(正音通釋序)를 써서 간행시켰기 때문에 『정음통석(正音通釋)』이라고도 한다. 그밖에 이본이 몇 종류가 있다. [[삼운통고 | 『삼운통고(三韻通考)』]]와 [[사성통해 | 『사성통해(四聲通解)』]]에 의거하여 당시의 우리 나라와 중국의 한자음을 밝힌 운서다. 중국어 역관인 이언용(李彦容)이 많이 도왔다고 한다.<ref>이응백 외, 『국어국문학자료사전』, 한국사전연구사, 1998. 네이버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89208&cid=41708&categoryId=41711 박성원]",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지식 관계망== | ==지식 관계망== |
2017년 9월 5일 (화) 20:41 판
박성원(朴聖源) | |
대표명칭 | 박성원 |
---|---|
한자표기 | 朴聖源 |
생몰년 | 1697-1767 |
본관 | 밀양(密陽) |
호 | 겸재(謙齋) |
자 | 사수(士洙) |
대표저서 | 보민록, 겸재집 |
대표직함 | 지평, 세손강서원유선 |
유형 | 문신 |
목차
정의
박성원(1697∼1767)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내용
생애 및 관직활동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사수(士洙), 호는 겸재(謙齋). 이재(李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21년(경종 1)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1728년(영조 4) 별시문과의 을과에 급제, 사간원정자(司諫院正字)·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등을 역임하였다. 1744년 지평(持平)으로 있을 때 영조가 기로소(耆老所: 70세이상 문관 정이품이상의 노인 우대소)에 들어감을 반대하다가 남해(南海)에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의 배소에 가시울타리를 쳐 그 안에 가두어 둠) 되었다가 2년 뒤 석방되었다. 세손강서원유선(世孫講書院諭善)이 되어 세손인 정조를 보도(輔導)하였으며, 참판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1]
학술활동 및 저서
학술활동
그는 효가 화민성속(化民成俗)의 근본이 되는 점을 들어 백성들을 보호하고 국기를 다지는 원동력이 됨을 정책적인 차원에서 실시해보려는 의도를 그의 저술들을 통하여 엿볼 수 있다. 그의 심성론은 스승인 이간(李柬)의 학설을 지지함으로써 한원진(韓元震) 등의 호론(湖論)을 반박하고 낙론(洛論)에 동조하였다.[2]
저서
박성원은 예서(禮書)의 연구에 적극적인 힘을 기울여 연구과정에서 의혹된 점을 일일이 초출하여 조목마다 그의 사견을 첨부하여 『예의유집(禮疑類輯)』이라는 책자를 만들어 후학들의 예서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 밖에도 『돈효록(敦孝錄)』, 『보민록(保民錄)』, 『돈녕록(敦寧錄)』, 『겸재집(謙齋集)』 등의 저서가 있다.[3]
- 『화동정음통석운고』의 저술
영조 23년(1747)에 지은 것인데, 정조 11년(1787) 책머리에 정조가 정음통석서(正音通釋序)를 써서 간행시켰기 때문에 『정음통석(正音通釋)』이라고도 한다. 그밖에 이본이 몇 종류가 있다. 『삼운통고(三韻通考)』와 『사성통해(四聲通解)』에 의거하여 당시의 우리 나라와 중국의 한자음을 밝힌 운서다. 중국어 역관인 이언용(李彦容)이 많이 도왔다고 한다.[4]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박성원 | 화동정음통석운고 | A는 B를 저술하였다 | |
화동정음통석운고 | 사성통해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화동정음통석운고 | 언문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시각자료
갤러리
- 한글팀 박성원.jpg
주석
- ↑ 이순두, "박성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순두, "박성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순두, "박성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응백 외, 『국어국문학자료사전』, 한국사전연구사, 1998. 네이버 참조: "박성원",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김윤정, 「謙齋 朴聖源의 禮學과 『禮疑類輯』의 성격」, 『韓國文化』Vol.61 ,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2013.분루: 인물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