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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5일 (화) 11:55 판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扶餘 普光寺址 大普光禪師碑) |
|
대표명칭 |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
---|---|
영문명칭 | Stele for Great Master Bogwang from Bogwangsa Temple Site, Buyeo |
한자 | 扶餘 普光寺址 大普光禪師碑 |
주소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동남리) 국립부여박물관 |
문화재 지정번호 | 보물 제107호 |
문화재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
찬자 | 위소(危素) |
서자 | 양지(楊池) |
각자 | 회정(懷淨), 이충언(李忠言) |
서체 | 해서(楷書) |
승려 | 충감(冲鑑) |
건립연대 | 135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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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보광사지(普光寺址)에서 발견된 고려시대의 승려 원명국사 충감(圓明國師 冲鑑, 1275-1339)의 탑비.
내용
개요
높이 약 2.6m. 이 비는 현재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는 없고, 비몸만 남아있다. 비몸의 가장자리는 덩굴무늬를 띠 모양으로 둘러 새겼다. 석재는 편마암이고 윗쪽의 양끝을 사선으로 잘라냈다. 비문은 두 차례에 걸쳐서 새겨졌는데 앞면은 1358년(공민왕 7) 건립 당시 새겼고, 뒷면은 1750년(영조 26)에 추가했다.[1] 비의 앞면 제일 윗부분에는 "고려임주대보광선사비(高麗林州大普光禪寺碑)"라는 10자의 전액(篆額)이 있고 비의 제목은 "고려임주대보광선사중창비(高麗林州大普光禪寺重創碑)"로 되어 있다.[2]
비문은 충감의 제자이자 당시 선원사(禪源寺) 주지였던 굉연(宏演)이 원나라에서 문장가로 이름높았던 위소(危素)에게 부탁해서 지은 것이다. 양지(楊池)가 썼으며, 주백기(周伯琦)가 전액을 썼다.[3][4] 비의 상태는 전체적으로 균열이 많으며 지대석(址臺石)[5]과 비몸은 시멘트로 접착하였고 비몸에도 시멘트로 보수한 부분이 여러 군데 있다. 고려시대 후기의 비석 양식과 불교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6]
1963년 보물 제107호로 지정되었다.
비문
전면
비문 전면은 원명국사 충감의 생애와 보광사(普光寺)의 중창과정 두 부분으로 기술되어있다.[7] 충감은 선원사(禪源寺) 출신으로 중국의 강남지방에 유학한 후 간화선의 대가로 이름이 높던 몽산(蒙山) 덕이(德異)의 제자 철산(鐵山) 소경(紹瓊)과 함께 귀국하여 간화선(看話禪)[8] 풍을 널리 퍼뜨렸고, 선종 승려들의 생활규범을 정리한 『선문청규(禪門淸規)』의 보급에도 힘썼다. 1336년(충숙왕 5)에 그가 개경을 떠나 보광사로 은퇴하자 지방관과 충감의 가족들이 물자를 시주하여 보광사를 크게 중창하였고, 이후 이 곳에는 그의 문도들이 주석하게 되었다.[9]
후면
뒷면의 추가된 기록에는 임진왜란 때 건물이 모두 불타 없어지고, 기록을 적은 비도 알아볼 수 없으므로 주지인 능일(能一)이 고쳐 새긴다고 되어있다.
국사께서 머무실 때 이 절을 창건하였는데 임진년의 병란에 건물이 모두 불탈 때에 비를 보관하고 있던 건물도 잿더미가 되는 것을 면치 못하였다. 그래서 행적을 기록한 비석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마멸이 심하여 글씨를 누군들 알아 볼 수 있겠는가. 국사의 행적이 사라져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주지인 석(釋) 능일(能一)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장인들을 모아 비석의 기록을 새롭게 하니 천년 전의 옛 자취가 어제 일처럼 분명하게 되었다. 아아, 아름답도다. | ||
출처: 한기문, 『한국금석문집성34: 고려18 비문18』, 한국국학진흥원, 2014, 37쪽.[10] |
비문 보러가기 |
• 한기문, 『한국금석문집성 34: 고려18 비문18』, 한국국학진흥원, 2014.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34: 고려18 비문18", |
• "보광사대보광선사비", 금석문세부정보, |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 충감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 위소 |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 |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 양지 | A는 B가 비문을 썼다 | |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 이충언 | A는 B가 비문을 새겼다 | |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 부여 보광사 | A는 B에 있었다 | |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 부여 보광사지 | A는 B에 있었다 | |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 국립부여박물관 | A는 B에 있다 | |
부여 보광사지 | 부여 보광사 | A는 B의 터이다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문화재검색』online , 문화재청. - ↑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두산백과』online . - ↑ 김응현,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찬자와 서자가 모두 원말의 문한관이자 당대의 지성이었다는 점에서 려원 문화교류가 승려와 문인들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기문, 『한국금석문집성34: 고려18 비문18』, 한국국학진흥원, 2014, 30쪽. 온라인 참조:"한국금석문집성34: 고려18 비문18",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 누리미디어. - ↑ 건축물을 세우기 위하여 잡은 터에 쌓은 돌
- ↑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두산백과』online . - ↑ "보광사",
『조선왕조실록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간화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보광사대보광선사비", 금석문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소. - ↑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한국금석문집성34: 고려18 비문18,
『KR-pia - 한국의지식콘텐츠』online , 누리미디어.
참고문헌
- 김응현,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기문, 『한국금석문집성34: 고려18 비문18』, 한국국학진흥원, 2014, 29~38쪽. 온라인 참조:"한국금석문집성34: 고려18 비문18",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 누리미디어. -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문화재검색』online , 문화재청. -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두산백과』online . - "보광사대보광선사비", 금석문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소. - "보광사",
『조선왕조실록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