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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수겸(李守謙)에게 수업하다가 출가의 뜻을 품고 법천사(法泉寺)관웅(寬雄)을 찾아가 수업하였다. 관웅을 따라 상경, | + | 이수겸(李守謙)에게 수업하다가 출가의 뜻을 품고 법천사(法泉寺)관웅(寬雄)을 찾아가 수업하였다. 관웅을 따라 상경, 개경 해안사(海安寺) 준광(俊光)의 제자가 되었다.<ref>김상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2574 해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blockquote| | {{blockquote| | ||
초년(齠年)의 나이에 이르러 이미 학문에 뜻을 두어 이수겸(李守謙)을 찾아가서 학업을 청하였다. 수겸(守謙)이 스님을 보고 특이한 그릇인줄 알고 말하기를, “나는 석학(碩學)이 될 기량(器量)을 지도할 능력이 없으니 너는 마땅히 밝은 스승을 찾도록 노력하라.” 하였다. 어느 날 관상을 잘 보는 한 노인이 있어 스님의 손금을 보고 국사에게 이르기를, “네가 만약 출가하여 스님이 된다면 반드시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 앞으로 통인달사(通人達士)가 되리라는 말을 듣고 다만 도주(道籌)에 종사할 생각에만 골똘히 잠기고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에는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노장(老莊)의 개설(槪說)에 대해서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따라서 사대부들의 헌면(軒冕)을 치수(錙銖)처럼 보고 고량진미(膏粱珍味)를 마치 강비(糠秕)와 같이 여겼다. | 초년(齠年)의 나이에 이르러 이미 학문에 뜻을 두어 이수겸(李守謙)을 찾아가서 학업을 청하였다. 수겸(守謙)이 스님을 보고 특이한 그릇인줄 알고 말하기를, “나는 석학(碩學)이 될 기량(器量)을 지도할 능력이 없으니 너는 마땅히 밝은 스승을 찾도록 노력하라.” 하였다. 어느 날 관상을 잘 보는 한 노인이 있어 스님의 손금을 보고 국사에게 이르기를, “네가 만약 출가하여 스님이 된다면 반드시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 앞으로 통인달사(通人達士)가 되리라는 말을 듣고 다만 도주(道籌)에 종사할 생각에만 골똘히 잠기고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에는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노장(老莊)의 개설(槪說)에 대해서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따라서 사대부들의 헌면(軒冕)을 치수(錙銖)처럼 보고 고량진미(膏粱珍味)를 마치 강비(糠秕)와 같이 여겼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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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웅에게 유식학(唯識學)을 수업하였는데, 해린은 관웅이 지어준 법호이다. 999년(목종 2)용흥사(龍興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1001년에는 숭교사(崇敎寺)의 개창과 함께 명성을 얻게 되었다. | + | 관웅에게 유식학(唯識學)을 수업하였는데, 해린은 관웅이 지어준 법호이다. 999년(목종 2)용흥사(龍興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1001년에는 숭교사(崇敎寺)의 개창과 함께 명성을 얻게 되었다.<ref>김상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2574 해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blockquote| | {{blockquote| | ||
이와 같이 영특함을 알게 된 웅공(雄公)은 기꺼워하면서 해린(海潾 : 潾은 麟의 오자)이라 이름을 지어 주었다. 통화(統和) 17년 수하(首夏)의 달에 용흥사 관단(官壇)에서 구족계를 품수(稟受)하였다. 탐·진·치의 마음을 씻어 그 오염(汚染)을 여의었으니 마치 손으로 공중(空中)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았다. 29살 때 숭교사(崇敎寺)를 창건할 때 감독을 맡았던 은공(恩功)으로 그 절의 초대(初代) 주지가 되었다. | 이와 같이 영특함을 알게 된 웅공(雄公)은 기꺼워하면서 해린(海潾 : 潾은 麟의 오자)이라 이름을 지어 주었다. 통화(統和) 17년 수하(首夏)의 달에 용흥사 관단(官壇)에서 구족계를 품수(稟受)하였다. 탐·진·치의 마음을 씻어 그 오염(汚染)을 여의었으니 마치 손으로 공중(空中)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았다. 29살 때 숭교사(崇敎寺)를 창건할 때 감독을 맡았던 은공(恩功)으로 그 절의 초대(初代) 주지가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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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운사(慈雲寺)의 법회에 참석한 뒤, 관웅이 있던 법천사로 옮겨 수업하였다. 1004년 왕륜사(王輪寺)에서 실시된 대선(大選)에 급제, 대덕(大德)이 되었다. | + | 자운사(慈雲寺)의 법회에 참석한 뒤, 관웅이 있던 법천사로 옮겨 수업하였다. 1004년 왕륜사(王輪寺)에서 실시된 대선(大選)에 급제, 대덕(大德)이 되었다.<ref>김상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2574 해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blockquote| | {{blockquote| | ||
나이 21세 때 왕륜사(王輪寺) 대선장(大選場)에 나아가서 담경(談經) 시험을 보았는데, 그의 말은 평범하나 그 뜻은 매우 심오하였다. 시험의 문제는 같았으나 국사의 답안은 다른 사람들보다 특이하였다. 저들 자신의 답안이 틀려서 자신의 소망에 어긋난 자들은 마치 소경이 촛불을 잡은 것과 같았으며, 혹은 시기하여 머트럽게 다투던 자들은 마치 함장(銜杖)한 것과 같이 입을 열지 못하였다. 마음에는 모든 반연을 쉬었으니 감히 파도가 물에 의지한 것을 탄식할 것이며, 진여법(眞如法)은 모든 움직임을 여의었으니 마땅히 탁약(槖籥)의 가풍(假風)을 비웃을 수 있겠는가. 토의하는 광장(廣場)에서는 주위로부터 집중적인 공세를 받았으나 마치 교범파제(憍梵婆提 : gavāṃpati) 등의 호부장자(豪富長者)들로 구성된 그룹의 첩벽(疊壁)이 무너지고 모두 논리에 강복(降伏)하고 부처님께로 귀화한 것과 같았으며 견고한 인욕의 갑옷이여! 니건자(尼乾子)를 비롯한 외도(外道) 육사(六師)들의 일(一)·이(異)·유(有)·무(無) 등의 교란적인 주장이 부처님 사자후(獅子吼)의 일성으로 말미암아 모두 사라진 것과 같았다. | 나이 21세 때 왕륜사(王輪寺) 대선장(大選場)에 나아가서 담경(談經) 시험을 보았는데, 그의 말은 평범하나 그 뜻은 매우 심오하였다. 시험의 문제는 같았으나 국사의 답안은 다른 사람들보다 특이하였다. 저들 자신의 답안이 틀려서 자신의 소망에 어긋난 자들은 마치 소경이 촛불을 잡은 것과 같았으며, 혹은 시기하여 머트럽게 다투던 자들은 마치 함장(銜杖)한 것과 같이 입을 열지 못하였다. 마음에는 모든 반연을 쉬었으니 감히 파도가 물에 의지한 것을 탄식할 것이며, 진여법(眞如法)은 모든 움직임을 여의었으니 마땅히 탁약(槖籥)의 가풍(假風)을 비웃을 수 있겠는가. 토의하는 광장(廣場)에서는 주위로부터 집중적인 공세를 받았으나 마치 교범파제(憍梵婆提 : gavāṃpati) 등의 호부장자(豪富長者)들로 구성된 그룹의 첩벽(疊壁)이 무너지고 모두 논리에 강복(降伏)하고 부처님께로 귀화한 것과 같았으며 견고한 인욕의 갑옷이여! 니건자(尼乾子)를 비롯한 외도(外道) 육사(六師)들의 일(一)·이(異)·유(有)·무(無) 등의 교란적인 주장이 부처님 사자후(獅子吼)의 일성으로 말미암아 모두 사라진 것과 같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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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11년(현종 2) 본사인 법천사로 돌아가던 중 진조(眞肇)를 만나 역산법(曆算法)을 배웠고, 그 해에 대사(大師)가 되었다. 1021년평양중흥사(重興寺)에서 중대사(重大師)가 된 뒤, 수다사(水多寺)의 주지가 되었으며, 1030년 다시 개경 해안사의 주지가 되었다. | + | 1011년(현종 2) 본사인 법천사로 돌아가던 중 진조(眞肇)를 만나 역산법(曆算法)을 배웠고, 그 해에 대사(大師)가 되었다. 1021년평양중흥사(重興寺)에서 중대사(重大師)가 된 뒤, 수다사(水多寺)의 주지가 되었으며, 1030년 다시 개경 해안사의 주지가 되었다.<ref>김상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2574 해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blockquote| | {{blockquote| | ||
통화년중(統和年中)에 “강진홍도(講眞弘道)”란 법호를 받았으며, 28년에는 국사께서 법고사(法皐寺)로 돌아가는 길에 도강(都講)인 진조(眞肇) 스님을 만나 동행하다가 진조(眞肇) 스님이 역산(曆算)하는 법을 잘 안다는 말을 듣고 국사께서 가르쳐 주기를 청하였는데, 누구나 이를 취하려 하면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쉽고, 도모하여 옮기면 밝아서 소경이 눈을 뜬 것과 같이 여용(餘勇)을 보통 무리들에게나 끼쳐주며, 다능(多能)을 비루(鄙陋)한 것을 연구함과 같았다. 통목화(統木禾) 말년은 우리 성고(聖考) 현종(顯宗)께서 보위에 오르신지 5년째 되던 해이다. 특히 현종 임금으로부터 존장(尊獎)하는 은총을 입어 대사(大師)의 법계를 받았다. | 통화년중(統和年中)에 “강진홍도(講眞弘道)”란 법호를 받았으며, 28년에는 국사께서 법고사(法皐寺)로 돌아가는 길에 도강(都講)인 진조(眞肇) 스님을 만나 동행하다가 진조(眞肇) 스님이 역산(曆算)하는 법을 잘 안다는 말을 듣고 국사께서 가르쳐 주기를 청하였는데, 누구나 이를 취하려 하면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쉽고, 도모하여 옮기면 밝아서 소경이 눈을 뜬 것과 같이 여용(餘勇)을 보통 무리들에게나 끼쳐주며, 다능(多能)을 비루(鄙陋)한 것을 연구함과 같았다. 통목화(統木禾) 말년은 우리 성고(聖考) 현종(顯宗)께서 보위에 오르신지 5년째 되던 해이다. 특히 현종 임금으로부터 존장(尊獎)하는 은총을 입어 대사(大師)의 법계를 받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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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덕종 때에는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었다가 곧 수좌(首座)가 되었고, 1045년(정종 11) 승통(僧統)이 되었다. 1046년(문종 1) 궁중에 초청받아 유심묘의(唯心妙義)를 강의하고, 이듬해 이자연(李子淵)의 제5자 소현(韶顯)을 출가시켰다. | + | 덕종 때에는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었다가 곧 수좌(首座)가 되었고, 1045년(정종 11) 승통(僧統)이 되었다. 1046년(문종 1) 궁중에 초청받아 유심묘의(唯心妙義)를 강의하고, 이듬해 이자연(李子淵)의 제5자 소현(韶顯)을 출가시켰다.<ref>김상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2574 해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blockquote| | {{blockquote| | ||
덕종(悳宗)이 즉위하여서는 보다 더욱 존중히 모시는 한편 특별히 삼중대사(三重大師)의 법호를 수정(授呈)하고 아울러 마납(磨衲)으로 만든 법복 한 벌을 증사(贈賜)하였으며, ‘탐현도원(‘探玄道源)’이라는 법칭(法稱)을 첨가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않아 수좌(首座)의 법호를 올리고 겸하여 마납(磨衲) 복전의(福田衣) 한 상자를 하사하였다. (결락) | 덕종(悳宗)이 즉위하여서는 보다 더욱 존중히 모시는 한편 특별히 삼중대사(三重大師)의 법호를 수정(授呈)하고 아울러 마납(磨衲)으로 만든 법복 한 벌을 증사(贈賜)하였으며, ‘탐현도원(‘探玄道源)’이라는 법칭(法稱)을 첨가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않아 수좌(首座)의 법호를 올리고 겸하여 마납(磨衲) 복전의(福田衣) 한 상자를 하사하였다. (결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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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54년 현화사(玄化寺) 주지가 되어 절을 크게 중수하고, 법상종 교단을 이끌었다. | + | 1054년 현화사(玄化寺) 주지가 되어 절을 크게 중수하고, 법상종 교단을 이끌었다.<ref>김상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2574 해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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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희(重熙) 23년 남녀월(南呂月)에 성칙(聖勅)을 내려 현화사(玄化寺)로 이석(移錫)케 하므로 국사는 고사하였으나 하는 수 없이 마침내 허락하였다. | 중희(重熙) 23년 남녀월(南呂月)에 성칙(聖勅)을 내려 현화사(玄化寺)로 이석(移錫)케 하므로 국사는 고사하였으나 하는 수 없이 마침내 허락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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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56년 왕사(王師)가 되고, 1058년 봉은사(奉恩寺)에서 국사에 올라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 + | 1056년 왕사(王師)가 되고, 1058년 봉은사(奉恩寺)에서 국사에 올라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이때 영통사(靈通寺)의 주승(主僧)인 난원(爛圓) 스님은 왕사로 책봉되었다. 1067년 은퇴하여 본사인 법천사로 돌아갔다. <ref>김상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2574 해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blockquote| | {{blockquote| | ||
그리하여 그 해 11월 4일 대가(大駕)가 내제석원(內帝釋院)으로 행행(行幸)하여 예배(禮拜)를 갖추어 왕사(王師)로 추대하였다. 그 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어가(御駕)에 동재(同載)하고 다녔으니, 마치 강승회(康僧會) 스님이 오왕(吳王) 손권(孫權)의 어가(御駕)에 동승하고 다녔던 것은 모두 스님의 하풍(下風)에 있었기 때문이다. 청녕(淸寧) 3년에 이르러 ‘융소(融炤)’라는 법칭(法稱)을 진정(進呈)하였다. 4년 5월 초하루에 임금께서 스님을 국사(國師)로 책봉코자 하여 친서를 보내 삼청(三請)하였다. 그리하여 그 달 19일 왕이 금가(金駕)를 준비해 봉은사(奉恩寺)로 행행(幸行)하여 우리 해린(海鱗) 스님을 국사로 봉하고, 영통사(靈通寺)의 주승(主僧)인 난원(爛圓) 스님을 왕사(王)로 책봉하였다. | 그리하여 그 해 11월 4일 대가(大駕)가 내제석원(內帝釋院)으로 행행(行幸)하여 예배(禮拜)를 갖추어 왕사(王師)로 추대하였다. 그 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어가(御駕)에 동재(同載)하고 다녔으니, 마치 강승회(康僧會) 스님이 오왕(吳王) 손권(孫權)의 어가(御駕)에 동승하고 다녔던 것은 모두 스님의 하풍(下風)에 있었기 때문이다. 청녕(淸寧) 3년에 이르러 ‘융소(融炤)’라는 법칭(法稱)을 진정(進呈)하였다. 4년 5월 초하루에 임금께서 스님을 국사(國師)로 책봉코자 하여 친서를 보내 삼청(三請)하였다. 그리하여 그 달 19일 왕이 금가(金駕)를 준비해 봉은사(奉恩寺)로 행행(幸行)하여 우리 해린(海鱗) 스님을 국사로 봉하고, 영통사(靈通寺)의 주승(主僧)인 난원(爛圓) 스님을 왕사(王)로 책봉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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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70년 10월에 법천사에서 입적하였다. 시호는 지광(智光), 탑호(塔號)는 현묘(玄妙)이다. | + | 1070년 10월에 법천사에서 입적하였다. 시호는 지광(智光), 탑호(塔號)는 현묘(玄妙)이다. <ref>김상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2574 해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blockquote| | {{blockquote| | ||
10월 23일 편안히 우협(右脇)으로 누워 취침하였다. 이날 밤에 이슬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국사께서 잠을 깨어 가부좌(跏趺坐)를 맺고 앉아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결락) 바깥 날씨가 어떤가?”하니 대답하기를, “이슬비가 내리고 있읍니다.”라는 대답을 듣고서 곧 입적하였다. 옛적 추자(鶖子)가 입적(入寂)함에 당하여 무색계(無色界)의 제천(諸天)이 흘린 바 눈물이 마치 봄에 내리는 이슬비와 같았으니, 지금 국사께서 시화(示化)하던 오늘밤에 내린 비인들 어찌 제천(諸天)이 흘린 눈물이 아니겠는가. 오호 애재(哀哉)라! 세수는 87세요, 승랍은 72세였다. | 10월 23일 편안히 우협(右脇)으로 누워 취침하였다. 이날 밤에 이슬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국사께서 잠을 깨어 가부좌(跏趺坐)를 맺고 앉아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결락) 바깥 날씨가 어떤가?”하니 대답하기를, “이슬비가 내리고 있읍니다.”라는 대답을 듣고서 곧 입적하였다. 옛적 추자(鶖子)가 입적(入寂)함에 당하여 무색계(無色界)의 제천(諸天)이 흘린 바 눈물이 마치 봄에 내리는 이슬비와 같았으니, 지금 국사께서 시화(示化)하던 오늘밤에 내린 비인들 어찌 제천(諸天)이 흘린 눈물이 아니겠는가. 오호 애재(哀哉)라! 세수는 87세요, 승랍은 72세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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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연구원, 「고려시대의 원주불교」,『원주 불교와 유적』, 원주시, 2008. | *한국불교연구원, 「고려시대의 원주불교」,『원주 불교와 유적』, 원주시, 2008. | ||
*김혜완, 「신라하대·고려전기 원주 불교의 전개와 신앙」, 『사림』 21호, 수선사학회, 2004, 1-29쪽. | *김혜완, 「신라하대·고려전기 원주 불교의 전개와 신앙」, 『사림』 21호, 수선사학회, 2004, 1-29쪽. | ||
− | *김상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2574 해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 *김상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2574 해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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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3일 (일) 00:03 판
해린(海麟) | |
대표명칭 | 해린 |
---|---|
한자 | 海麟 |
생몰년 | 984년(성종 3)-1067년(문종21) |
시호 | 지광(智光) |
휘 | 해린(海麟) |
탑호 | 현묘(玄妙) |
자 | 거룡(巨龍) |
성씨 | 원씨(元氏) |
속명 | 수몽(水夢) |
출신지 | 강원 원주 |
승탑 |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
승탑비 |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 |
목차
정의
고려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출가수행
이수겸(李守謙)에게 수업하다가 출가의 뜻을 품고 법천사(法泉寺)관웅(寬雄)을 찾아가 수업하였다. 관웅을 따라 상경, 개경 해안사(海安寺) 준광(俊光)의 제자가 되었다.[1]
관웅에게 유식학(唯識學)을 수업하였는데, 해린은 관웅이 지어준 법호이다. 999년(목종 2)용흥사(龍興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1001년에는 숭교사(崇敎寺)의 개창과 함께 명성을 얻게 되었다.[2]
활동
자운사(慈雲寺)의 법회에 참석한 뒤, 관웅이 있던 법천사로 옮겨 수업하였다. 1004년 왕륜사(王輪寺)에서 실시된 대선(大選)에 급제, 대덕(大德)이 되었다.[3]
1011년(현종 2) 본사인 법천사로 돌아가던 중 진조(眞肇)를 만나 역산법(曆算法)을 배웠고, 그 해에 대사(大師)가 되었다. 1021년평양중흥사(重興寺)에서 중대사(重大師)가 된 뒤, 수다사(水多寺)의 주지가 되었으며, 1030년 다시 개경 해안사의 주지가 되었다.[4]
덕종 때에는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었다가 곧 수좌(首座)가 되었고, 1045년(정종 11) 승통(僧統)이 되었다. 1046년(문종 1) 궁중에 초청받아 유심묘의(唯心妙義)를 강의하고, 이듬해 이자연(李子淵)의 제5자 소현(韶顯)을 출가시켰다.[5]
1054년 현화사(玄化寺) 주지가 되어 절을 크게 중수하고, 법상종 교단을 이끌었다.[6]
1056년 왕사(王師)가 되고, 1058년 봉은사(奉恩寺)에서 국사에 올라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이때 영통사(靈通寺)의 주승(主僧)인 난원(爛圓) 스님은 왕사로 책봉되었다. 1067년 은퇴하여 본사인 법천사로 돌아갔다. [7]
입적
1070년 10월에 법천사에서 입적하였다. 시호는 지광(智光), 탑호(塔號)는 현묘(玄妙)이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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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 ↑ 김상현, "해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상현, "해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상현, "해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상현, "해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상현, "해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상현, "해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상현, "해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상현, "해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김남윤, 「고려 전기의 법상종과 해린」, 『강원불교사연구』, 소화, 1996.
- 한국불교연구원, 「고려시대의 원주불교」,『원주 불교와 유적』, 원주시, 2008.
- 김혜완, 「신라하대·고려전기 원주 불교의 전개와 신앙」, 『사림』 21호, 수선사학회, 2004, 1-29쪽.
- 김상현, "해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