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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선은 선승이었지만 풍수지리설의 대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도선이 풍수지리설을 수학한 배경에 대해 『[[고려사]]』와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 수미선사비]]'에서는 중국에 유학하여 밀교 승려인 [[일행|일행(一行)]]에게서 지리법(地理法, 풍수설)을 배워왔다고 하였으나, [[일행]]은 도선 보다 백여 년 전에 활동하였던 인물이기 때문에 설득력이 약하다. 반면,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비]]'에서는 지리산 구령(甌嶺)에서 수행할 때 이인(異人)을 만나 구례현 경계 지점의 남해변에서 풍수설을 전수받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후 도선은 당시의 시대상에 대한 인식과 풍수지리설을 결부하여 지기쇠왕설(地氣衰旺說)과 비보사탑설(裨補寺塔說)을 주장하였는데, 고려 시대에는 도선의 풍수 사상이 국가적으로 널리 수용되었다.<ref>최연식, "[http://yeongam.grandculture.net/Contents?local=yeongam&dataType=01&contents_id= | + | 도선은 선승이었지만 풍수지리설의 대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도선이 풍수지리설을 수학한 배경에 대해 『[[고려사]]』와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 수미선사비]]'에서는 중국에 유학하여 밀교 승려인 [[일행|일행(一行)]]에게서 지리법(地理法, 풍수설)을 배워왔다고 하였으나, [[일행]]은 도선 보다 백여 년 전에 활동하였던 인물이기 때문에 설득력이 약하다. 반면,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비]]'에서는 지리산 구령(甌嶺)에서 수행할 때 이인(異人)을 만나 구례현 경계 지점의 남해변에서 풍수설을 전수받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후 도선은 당시의 시대상에 대한 인식과 풍수지리설을 결부하여 지기쇠왕설(地氣衰旺說)과 비보사탑설(裨補寺塔說)을 주장하였는데, 고려 시대에는 도선의 풍수 사상이 국가적으로 널리 수용되었다.<ref>최연식, "[http://yeongam.grandculture.net/Contents?local=yeongam&dataType=01&contents_id=GC04400988 도선]", <html><online style="color:purple">『디지털영암문화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blockquote | {{blockquote | ||
|舞象하는 나이가 되기 전에 使臣을 따라 중국으로 가서 胡渭가 지은 禹貢의 山川說에 따라 두루 살펴보고 唐家의 文物을 익혔다. 唐나라 皇帝가 宮內의 延英殿에서 스님을 영접하고 간곡히 부탁하기를 朕의 꿈에 金人이 나타나 돌아가신 大行 皇帝의 新陵의 터를 스님을 초청하여 占卜토록 하라는 現夢을 받았으니, 스님은 사양하지 말고 가장 좋은 明堂 터를 잡아 달라고 청하였다. 道詵은 피할 수가 없어 竈王神이 지신한대로 황제가 타고 다니는 御馬가운데 병든 白色 말 한 마리를 내려달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가장 吉한 터를 잡아 바쳤는데, 보는 사람마다 칭찬하기를 天賦的으로 타고난 地理에 대해 特異한 眼目을 가졌다고 칭송하였다. 그러나 스님은 어찌 地術에 대한 능력뿐이겠는가! 天子도 國師로 책봉하여 존경하였으며, 一行禪師도 이 땅의 사람이 아니고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고 찬탄하였다. 그리고 국사는 金箱과 玉笈을 두루 연구하여 꿰뚫었으며, 赤縣의 黃圖를 탐구하여 깊이 통달하였다. 그 후 동쪽으로 돌아가 연마한 地術을 振作하는 한편, 北學한 金箱,玉笈,黃圖의 내용으로써 時局을 구제하겠다면서 황제에게 귀국시켜줄 것을 요청하였다. 우리 나라에 귀국한 후 地形을 살펴보니 行舟形局이었다.그러므로 배의 首尾를 鎭壓하기 위해서 절을 짓고 塔을 設立하게 하였다. | |舞象하는 나이가 되기 전에 使臣을 따라 중국으로 가서 胡渭가 지은 禹貢의 山川說에 따라 두루 살펴보고 唐家의 文物을 익혔다. 唐나라 皇帝가 宮內의 延英殿에서 스님을 영접하고 간곡히 부탁하기를 朕의 꿈에 金人이 나타나 돌아가신 大行 皇帝의 新陵의 터를 스님을 초청하여 占卜토록 하라는 現夢을 받았으니, 스님은 사양하지 말고 가장 좋은 明堂 터를 잡아 달라고 청하였다. 道詵은 피할 수가 없어 竈王神이 지신한대로 황제가 타고 다니는 御馬가운데 병든 白色 말 한 마리를 내려달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가장 吉한 터를 잡아 바쳤는데, 보는 사람마다 칭찬하기를 天賦的으로 타고난 地理에 대해 特異한 眼目을 가졌다고 칭송하였다. 그러나 스님은 어찌 地術에 대한 능력뿐이겠는가! 天子도 國師로 책봉하여 존경하였으며, 一行禪師도 이 땅의 사람이 아니고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고 찬탄하였다. 그리고 국사는 金箱과 玉笈을 두루 연구하여 꿰뚫었으며, 赤縣의 黃圖를 탐구하여 깊이 통달하였다. 그 후 동쪽으로 돌아가 연마한 地術을 振作하는 한편, 北學한 金箱,玉笈,黃圖의 내용으로써 時局을 구제하겠다면서 황제에게 귀국시켜줄 것을 요청하였다. 우리 나라에 귀국한 후 地形을 살펴보니 行舟形局이었다.그러므로 배의 首尾를 鎭壓하기 위해서 절을 짓고 塔을 設立하게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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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와의 관계=== | ===고려 태조와의 관계=== | ||
− | 고려 시대에 도선은 고려의 건국을 예언한 인물로서 널리 숭상되었다. 송악에서 [[고려 태조|고려 태조 왕건]]의 아버지인 [[왕용건|왕용건(王龍建)]]을 만나 왕자(王者)가 출생할 터를 잡아 주고 "2년 후에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예언하였으며, [[고려 태조|왕건]]이 17세가 되던 해에 [[고려 태조|왕건]]에게 지리(地利), 천시(天時)를 알려 주어 후삼국 통일을 이룰 수 있게 하였다는 일화가 널리 유포되었다.<ref>최연식, "[http://yeongam.grandculture.net/Contents?local=yeongam&dataType=01&contents_id= | + | 고려 시대에 도선은 고려의 건국을 예언한 인물로서 널리 숭상되었다. 송악에서 [[고려 태조|고려 태조 왕건]]의 아버지인 [[왕용건|왕용건(王龍建)]]을 만나 왕자(王者)가 출생할 터를 잡아 주고 "2년 후에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예언하였으며, [[고려 태조|왕건]]이 17세가 되던 해에 [[고려 태조|왕건]]에게 지리(地利), 천시(天時)를 알려 주어 후삼국 통일을 이룰 수 있게 하였다는 일화가 널리 유포되었다.<ref>최연식, "[http://yeongam.grandculture.net/Contents?local=yeongam&dataType=01&contents_id=GC04400988 도선]", <html><online style="color:purple">『디지털영암문화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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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 가까운 곳을 두루 둘러보고 王建의 아버지에게 白雪이 퍼붓는 때에도 눈이 내리지 않는 곳(明堂)에 집터를 잡아주어 王이 될 아들을 낳게하였을 뿐 아니라 半千年間 王業을 누릴 수 있는 松嶽에 王都를 정해 주었다. 요청하였다. 우리 나라에 귀국한 후 地形을 살펴보니 行舟形局이었다.그러므로 배의 首尾를 鎭壓하기 위해서 절을 짓고 塔을 設立하게 하였다. | |멀고 가까운 곳을 두루 둘러보고 王建의 아버지에게 白雪이 퍼붓는 때에도 눈이 내리지 않는 곳(明堂)에 집터를 잡아주어 王이 될 아들을 낳게하였을 뿐 아니라 半千年間 王業을 누릴 수 있는 松嶽에 王都를 정해 주었다. 요청하였다. 우리 나라에 귀국한 후 地形을 살펴보니 行舟形局이었다.그러므로 배의 首尾를 鎭壓하기 위해서 절을 짓고 塔을 設立하게 하였다. |
2017년 9월 2일 (토) 23:43 판
도선(道詵) | |
대표명칭 | 도선 |
---|---|
영문명칭 | Doseon |
한자 | 道詵 |
생몰년 | 827(흥덕왕 2)-898(효공왕 2) |
시호 | 요공선사(了空禪師), 선각국사(先覺國師) |
호 | 연기(烟起) |
휘 | 도선(道詵) |
탑호 | 징성혜등(澄聖慧燈) |
자 | 옥룡자(玉龍子), 옥룡(玉龍) |
성씨 | 김씨(金氏), 최씨(崔氏) |
출신지 | 영암(靈巖) |
승탑비 |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 수미선사비 |
목차
정의
신라 말기의 승려.
내용
도선과 두 개의 비문
도선과 관련된 비문은 두 가지가 전해져오고 있다.
-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ㆍ수미선사비(靈巖 道岬寺 道詵國師ㆍ守眉禪師碑) - 1653년 건립, 비 현존.
- 백계산 옥룡사 증시 선각국사 비명(白鷄山 玉龍寺 贈諡 先覺國師 碑銘) - 1173년 건립, 비는 현존하지 않음, 『동문선(東文選)』을 통해 확인 가능.
가계와 탄생
도선(道詵)은 827년 전라남도 영암에서 태어났다. 집안의 내력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나 태종 무열왕의 서얼손(庶孼孫)이라는 전승으로 보아 진골 귀족 출신일 가능성이 크다.[1]
스님의 휘는 도선(道詵)이요, 속성은 김씨이며, 신라국 영암 출신이다. 그의 세계에 있어서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史事는 유실하였다. 혹자는 이르기를 태종대왕의 서얼손 이라고도 하였다. | ||
출처: 이지관,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증성혜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32쪽. |
탄생설화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수미선사비문(靈巖 道岬寺 道詵國師·守眉禪師碑文)'에 따르면, 도선의 어머니는 최씨(崔氏)로 강가에 떠내려오는 오이를 먹고 임신하였다고 한다.
'백계산 옥룡사 증시 선각국사비명(白鷄山 玉龍寺 贈諡 先覺國師 碑銘)'에 따르면, 도선의 어머니는 강씨(姜氏)로, 꿈에 어떤 사람이 광채나는 구슬 한 개를 주면서 삼키라고 하였는데 그 후 태기가 있었고, 만삭이 되도록 오직 독경과 염불에만 뜻을 두었다고 한다.[2]
출가수행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수미선사비문(靈巖 道岬寺 道詵國師·守眉禪師碑文)'에 따르면, 도선은 월남사(月南寺)로 출가하여 불경을 배웠다.
일찍이 月南寺로 가서 佛經(貝葉)을 배웠다. | ||
출처: 이지관, "영암 도갑사 도선 수미 양대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423쪽. |
'백계산 옥룡사 증시 선각국사비명(白鷄山 玉龍寺 贈諡 先覺國師 碑銘)'에 따르면, 도선은 15세에 출가하여 월유산 화엄사(華嚴寺)에서 승려가 되었다.[3]
도선은 20세가 되던 846년(문성왕 8)에 교법을 떠나 스스로 선정 수행을 하려 하였는데, 마침 혜철이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현재의 전라남도 곡성군 동리산 대안사(大安寺)에서 가르침을 편다는 이야기를 듣고 혜철의 문하에 가서 수학하였다. 23세가 되던 849년(문성왕 11)에는 혜철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4]
활동
도선은 운봉산(雲峯山)에 굴을 파고 수도하기도 하였으며, 태백산(太白山)에 움막을 치고 여름 한철을 보내기도 하였다.[5]
도선은 863년(헌안왕 4) 37세의 나이로 희양현(曦陽縣: 현 전라남도 광양시) 백계산 옥룡사에 주석하여 35년간 머물면서 제자를 양성하였다. 또한 헌강왕(憲康王)의 초빙으로 궁궐에서 설법하였지만 수도의 번잡함을 싫어하여 얼마 후에 다시 옥룡사로 돌아왔다.[6]
입적
도선은 옥룡사에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입적을 예언한 후 898년(효공왕 2) 3월 10일에 향년 72세로 입적하였다.[7]
탑비의 건립
도선이 세상을 떠난 후에 효공왕은 '요공선사(了空禪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옥룡사에 세워진 그의 탑을 '징성혜등(澄聖慧燈)'으로 명명(命名)하였다. 또한 박인범(朴仁範)에게 비문을 짓도록 명하였으나 돌에 새기지는 못했다.
이후 고려 현종 때 대선사(大禪師), 숙종 때 왕사(王師)로 추증하였고, 인종은 '선각국사(先覺國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또한 1150년(의종 4)에는 왕명으로 최유청(崔惟淸)이 글을 짓고 정서(鄭叙)가 글씨를 쓴 비석을 개경(開京) 국청사(國淸寺)에 세웠다. 1172년(명종 2)에 옥룡사의 주지 지문(志文)이 비석을 옥룡사로 옮겼다.
또한 1653년(효종 4)에는 도선이 머물렀다고 전하는 영암 도갑사에 도선의 비가 건립되었다.[8]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 수미선사비는 1636년(인조 14) 4월에 건립을 시작하여 17년 후인 1653년(효종 4) 4월에 완료되었다. 비문에 따르면 본래 이곳에 도선의 고비(古碑)가 있었는데 비바람으로 글자가 마멸되고 귀부의 머리가 결락되는 등 훼손이 심하여 다시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도갑사를 중창한 옥습대사(玉習大師)가 3년에 걸쳐 각 사찰에 다니면서 찬조를 구하는 한편, 신도들로부터 모금하고 한양까지 가서 비문을 청탁하였다. 비석에 사용된 돌은 전라도 관찰사의 도움으로 부역을 통해 여산(礪山)에서 운반해 왔으며, 돌이 도착한 이후 7개월 만에 공사가 완료되었다고 한다.[9]
풍수지리사상
도선은 선승이었지만 풍수지리설의 대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도선이 풍수지리설을 수학한 배경에 대해 『고려사』와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 수미선사비'에서는 중국에 유학하여 밀교 승려인 일행(一行)에게서 지리법(地理法, 풍수설)을 배워왔다고 하였으나, 일행은 도선 보다 백여 년 전에 활동하였던 인물이기 때문에 설득력이 약하다. 반면,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비'에서는 지리산 구령(甌嶺)에서 수행할 때 이인(異人)을 만나 구례현 경계 지점의 남해변에서 풍수설을 전수받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후 도선은 당시의 시대상에 대한 인식과 풍수지리설을 결부하여 지기쇠왕설(地氣衰旺說)과 비보사탑설(裨補寺塔說)을 주장하였는데, 고려 시대에는 도선의 풍수 사상이 국가적으로 널리 수용되었다.[10]
고려 태조와의 관계
고려 시대에 도선은 고려의 건국을 예언한 인물로서 널리 숭상되었다. 송악에서 고려 태조 왕건의 아버지인 왕용건(王龍建)을 만나 왕자(王者)가 출생할 터를 잡아 주고 "2년 후에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예언하였으며, 왕건이 17세가 되던 해에 왕건에게 지리(地利), 천시(天時)를 알려 주어 후삼국 통일을 이룰 수 있게 하였다는 일화가 널리 유포되었다.[11]
또한 태조는 도선에 영향을 받아, '훈요십조(訓要十條)' 제2조에서 도선이 정한 곳 외에 함부로 사찰을 짓지 말 것을 강조하였다.[12]
둘째, 여러 사원은 모두 도선(道詵)이 산수(山水)의 순역(順逆)을 미루어 점쳐서 개창한 것으로, 도선이 이르기를, ‘내가 점을 쳐 정한 곳 외에 함부로 덧붙여 창건하면 지덕(地德)이 줄어들고 엷어져 조업(祚業)이 길지 못하리라.’고 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후세의 국왕이나 공후(公侯)·후비(后妃)·조신(朝臣)이 각각 원당(願堂)이라 일컬으며 혹시 더 만들까봐 크게 근심스럽다. 신라(新羅) 말에 다투어 사원[浮屠]을 짓다가 지덕이 쇠하고 손상되어 결국 망하는 데 이르렀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
출처: 『고려사』 세가 태조 26년 4월 계묘.[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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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기승, "도선",
『디지털도봉구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영숙, 「영암 도갑사 도선·수미비의 조성배경에 대한 고찰」, 『문화사학』32, 한국문화사학회, 2009, 178쪽.
- ↑ 배종호, "도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최연식, "도선",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배종호, "도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최연식, "도선",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최연식, "도선",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최연식, "도선",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최연식, "영암 도갑사 도선 국사·수미 선사비",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최연식, "도선",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최연식, "도선",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홍기승, "도선",
『디지털도봉구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왕이 훈요10조를 내리다", 고려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참고문헌
- 이지관, "영암 도갑사 도선 수미 양대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400-455쪽.
- 이지관,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증성혜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22-448쪽.
- "도갑사도선수미양대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소. - "옥룡사선각국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소. - 배종호, "도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도선",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홍기승, "도선",
『디지털도봉구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최연식, "도선",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