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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이미 스님의 법의 비가 雲霧에 휩싸였으나, 道岬寺는 龍宮과 같이 우뚝 솟아 있다. 도선국사의 古碑에 이끼가 끼어 드디어 거북의 머리는 결락되었다. 이를 보는 스님들마다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푸른 山은 내려다 보고 슬퍼하였다. 비록 태양과 같이 빛나는 偉大한 업적이 있더라도, 만약 그것을 傳해 주는 行蹟碑가 破缺되면어찌 後人들에게 보여줄 수 있겠는가? 마치 새의 날개가 자라서 멀리 날아가듯이일찍이 老宿(妙覺和尙 등)들이 建物을 보수하였으나, 상당 기간 동안 스님의 碑를 다시 세우지 못하였는데, 鸞새와 鳳새가 날아가듯 舊碑를 치우고 新碑를 세우기로 하였다. 이 때 그의 徒弟인 玉習大師가 각 사찰로 다니면서 贊助를 구하는 한편, 信徒들로부터 募金하여 무려 3년이 지나는 동안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다시 京都로 나를 찾아와 碑文을 재촉함이 더욱 간절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비록 “黃絹幼婦外孫虀臼”의 碑文을 지을만한 文章力이 부족하지만, 玉習上人의 간곡한 청탁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 |오래전부터 이미 스님의 법의 비가 雲霧에 휩싸였으나, 道岬寺는 龍宮과 같이 우뚝 솟아 있다. 도선국사의 古碑에 이끼가 끼어 드디어 거북의 머리는 결락되었다. 이를 보는 스님들마다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푸른 山은 내려다 보고 슬퍼하였다. 비록 태양과 같이 빛나는 偉大한 업적이 있더라도, 만약 그것을 傳해 주는 行蹟碑가 破缺되면어찌 後人들에게 보여줄 수 있겠는가? 마치 새의 날개가 자라서 멀리 날아가듯이일찍이 老宿(妙覺和尙 등)들이 建物을 보수하였으나, 상당 기간 동안 스님의 碑를 다시 세우지 못하였는데, 鸞새와 鳳새가 날아가듯 舊碑를 치우고 新碑를 세우기로 하였다. 이 때 그의 徒弟인 玉習大師가 각 사찰로 다니면서 贊助를 구하는 한편, 信徒들로부터 募金하여 무려 3년이 지나는 동안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다시 京都로 나를 찾아와 碑文을 재촉함이 더욱 간절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비록 “黃絹幼婦外孫虀臼”의 碑文을 지을만한 文章力이 부족하지만, 玉習上人의 간곡한 청탁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 ||
− | |출처= | + | |출처=이지관, "영암 도갑사 도선 수미 양대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427-42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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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2일 (토) 20:10 판
도선(道詵) | |
대표명칭 | 도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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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Doseon |
한자 | 道詵 |
생몰년 | 827(흥덕왕 2)-898(효공왕 2) |
시호 | 요공선사(了空禪師), 선각국사(先覺國師) |
호 | 연기(烟起) |
휘 | 도선(道詵) |
탑호 | 징성혜등(澄聖慧燈) |
자 | 옥룡자(玉龍子), 옥룡(玉龍) |
성씨 | 김씨(金氏), 최씨(崔氏) |
출신지 | 영암(靈巖) |
승탑비 |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 수미선사비 |
목차
정의
신라 말기의 승려
내용
도선과 두 개의 비문
도선과 관련된 비문은 두 가지가 전해져오고 있다.
-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ㆍ수미선사비(靈巖 道岬寺 道詵國師ㆍ守眉禪師碑) - 1653년 건립, 비 현존.
- 백계산 옥룡사 증시 선각국사 비명(白鷄山 玉龍寺 贈諡 先覺國師 碑銘) - 1173년 건립, 비는 현존하지 않음, 『동문선(東文選)』을 통해 확인 가능.
가계와 탄생
도선(道詵)은 827년 전라남도 영암에서 태어났다. 집안의 내력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나 태종 무열왕의 서얼손(庶孼孫)이라는 전승으로 보아 진골 귀족 출신일 가능성이 크다.[1]
스님의 휘는 도선(道詵)이요, 속성은 김씨이며, 신라국 영암 출신이다. 그의 세계에 있어서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史事는 유실하였다. 혹자는 이르기를 태종대왕의 서얼손 이라고도 하였다. | ||
출처: 이지관,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증성혜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32쪽. |
탄생설화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수미선사비문(靈巖 道岬寺 道詵國師·守眉禪師碑文)'에 따르면, 도선의 어머니는 최씨(崔氏)로 강가에 떠내려오는 오이를 먹고 임신하였다고 한다.
'백계산 옥룡사 증시 선각국사비명(白鷄山 玉龍寺 贈諡 先覺國師 碑銘)'에 따르면, 도선의 어머니는 강씨(姜氏)로, 꿈에 어떤 사람이 광채나는 구슬 한 개를 주면서 삼키라고 하였는데 그 후 태기가 있었고, 만삭이 되도록 오직 독경과 염불에만 뜻을 두었다고 한다.[2]
출가수행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수미선사비문(靈巖 道岬寺 道詵國師·守眉禪師碑文)'에 따르면, 도선은 월남사(月南寺)로 출가하여 불경을 배웠다.
일찍이 月南寺로 가서 佛經(貝葉)을 배웠다. | ||
출처: 이지관, "영암 도갑사 도선 수미 양대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423쪽. |
'백계산 옥룡사 증시 선각국사비명(白鷄山 玉龍寺 贈諡 先覺國師 碑銘)'에 따르면, 도선은 15세에 출가하여 월유산 화엄사(華嚴寺)에서 승려가 되었다.[3]
도선은 20세가 되던 846년(문성왕 8)에 교법을 떠나 스스로 선정 수행을 하려 하였는데, 마침 혜철이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현재의 전라남도 곡성군 동리산 대안사(大安寺)에서 가르침을 편다는 이야기를 듣고 혜철의 문하에 가서 수학하였다. 23세가 되던 849년(문성왕 11)에는 혜철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4]
활동
도선은 운봉산(雲峯山)에 굴을 파고 수도하기도 하였으며, 태백산(太白山)에 움막을 치고 여름 한철을 보내기도 하였다.[5]
도선은 863년(헌안왕 4) 37세의 나이로 희양현(曦陽縣: 현 전라남도 광양시) 백계산 옥룡사에 주석하여 35년간 머물면서 제자를 양성하였다. 또한 헌강왕(憲康王)의 초빙으로 궁궐에서 설법하였지만 수도의 번잡함을 싫어하여 얼마 후에 다시 옥룡사로 돌아왔다.[6]
입적
도선은 옥룡사에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입적을 예언한 후 898년(효공왕 2) 3월 10일에 향년 72세로 입적하였다.[7]
탑비의 건립
도선이 세상을 떠난 후에 효공왕은 '요공선사(了空禪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옥룡사에 세워진 그의 탑을 '징성혜등(澄聖慧燈)'으로 명명(命名)하였다. 또한 박인범(朴仁範)에게 비문을 짓도록 명하였으나 돌에 새기지는 못했다.
이후 고려 현종 때 대선사(大禪師), 숙종 때 왕사(王師)로 추증하였고, 인종은 '선각국사(先覺國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또한 1150년(의종 4)에는 왕명으로 최유청(崔惟淸)이 글을 짓고 정서(鄭叙)가 글씨를 쓴 비석을 개경(開京) 국청사(國淸寺)에 세웠다. 1172년(명종 2)에 옥룡사의 주지 지문(志文)이 비석을 옥룡사로 옮겼다.
또한 1653년(효종 4)에는 도선이 머물렀다고 전하는 영암 도갑사에 도선의 비가 건립되었다.[8]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 수미선사비는 1636년(인조 14) 4월에 건립을 시작하여 17년 후인 1653년(효종 4) 4월에 완료되었다. 비문에 따르면 본래 이곳에 도선의 고비(古碑)가 있었는데 비바람으로 글자가 마멸되고 귀부의 머리가 결락되는 등 훼손이 심하여 다시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도갑사를 중창한 옥습대사(玉習大師)가 3년에 걸쳐 각 사찰에 다니면서 찬조를 구하는 한편, 신도들로부터 모금하고 한양까지 가서 비문을 청탁하였다. 비석에 사용된 돌은 전라도 관찰사의 도움으로 부역을 통해 여산(礪山)에서 운반해 왔으며, 돌이 도착한 이후 7개월 만에 공사가 완료되었다고 한다.[9]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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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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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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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홍기승, "도선",
『디지털도봉구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영숙, 「영암 도갑사 도선·수미비의 조성배경에 대한 고찰」, 『문화사학』32, 한국문화사학회, 2009, 178쪽.
- ↑ 배종호, "도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최연식, "도선",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배종호, "도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최연식, "도선",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최연식, "도선",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최연식, "도선",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최연식, "영암 도갑사 도선 국사·수미 선사비",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이지관, "영암 도갑사 도선 수미 양대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400-455쪽.
- 이지관,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증성혜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22-448쪽.
- "도갑사도선수미양대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소. - "옥룡사선각국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소. - 배종호, "도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도선",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홍기승, "도선",
『디지털도봉구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최연식, "도선",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