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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선은 20세가 되던 846년([[신라 문성왕|문성왕]] 8)에 교법을 떠나 스스로 선정 수행을 하려 하였는데, 마침 [[혜철|혜철]]이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현재의 전라남도 곡성군 동리산 [[곡성 태안사|대안사(大安寺)]]에서 가르침을 편다는 이야기를 듣고 [[혜철]]의 문하에 가서 수학하였다. 23세가 되던 849년([[신라 문성왕|문성왕]] 11)에는 [[혜철]] | + | 도선은 20세가 되던 846년([[신라 문성왕|문성왕]] 8)에 교법을 떠나 스스로 선정 수행을 하려 하였는데, 마침 [[혜철|혜철]]이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현재의 전라남도 곡성군 동리산 [[곡성 태안사|대안사(大安寺)]]에서 가르침을 편다는 이야기를 듣고 [[혜철]]의 문하에 가서 수학하였다. 23세가 되던 849년([[신라 문성왕|문성왕]] 11)에는 [[혜철]]로부터 [[구족계|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ref>최연식, "[http://yeongam.grandculture.net/Contents?local=yeongam&dataType=01&contents_id=GC04400988 도선]", <html><online style="color:purple">『디지털영암문화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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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왕 8년 20살 때에 이르러 홀연히 스스로 생각한 나머지 말하기를, "대장부가 마땅히 교법을 여의고 스스로 靜慮하여야 할 것이어늘 어찌 능히 움직이지 않고 올올(兀兀)하게 문자에만 고수하고 있겠는가." 이때 혜철대사가 密印을 서당지장(西堂智藏) 禪師로부터 전해받고, 귀국하여 전라남도 곡성군 동리산 대안사에서 開堂하여 연설하고 있었으므로 법을 구하는 자가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스님도 선문에 구의(摳衣)하여 제자가 되려고 청하였다. 혜철대사가 그의 총명함을 가상하게 여겨 알뜰히 지도하였다. 무릇 이른바 말이 없는 말과 法이 없는 法을허중(虛中)에서 주고 받아 확연히 크게 깨달았다. 23살 때 혜철대사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이미 一乘了義를 통달하고, 參學하여 일정한 곳이 없었다. | |문성왕 8년 20살 때에 이르러 홀연히 스스로 생각한 나머지 말하기를, "대장부가 마땅히 교법을 여의고 스스로 靜慮하여야 할 것이어늘 어찌 능히 움직이지 않고 올올(兀兀)하게 문자에만 고수하고 있겠는가." 이때 혜철대사가 密印을 서당지장(西堂智藏) 禪師로부터 전해받고, 귀국하여 전라남도 곡성군 동리산 대안사에서 開堂하여 연설하고 있었으므로 법을 구하는 자가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스님도 선문에 구의(摳衣)하여 제자가 되려고 청하였다. 혜철대사가 그의 총명함을 가상하게 여겨 알뜰히 지도하였다. 무릇 이른바 말이 없는 말과 法이 없는 法을허중(虛中)에서 주고 받아 확연히 크게 깨달았다. 23살 때 혜철대사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이미 一乘了義를 통달하고, 參學하여 일정한 곳이 없었다. |
2017년 9월 2일 (토) 18:39 판
도선(道詵) | |
대표명칭 | 도선 |
---|---|
영문명칭 | Doseon |
한자 | 道詵 |
생몰년 | 827(흥덕왕 2)-898(효공왕 2) |
시호 | 요공선사(了空禪師), 선각국사(先覺國師) |
호 | 연기(烟起) |
휘 | 도선(道詵) |
탑호 | 징성혜등(澄聖慧燈) |
자 | 옥룡자(玉龍子), 옥룡(玉龍) |
성씨 | 김씨(金氏), 최씨(崔氏) |
출신지 | 영암(靈巖) |
승탑비 |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 수미선사비 |
목차
정의
신라 말기의 승려
내용
도선과 두 개의 비문
도선과 관련된 비문은 두 가지가 전해져오고 있다.
-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ㆍ수미선사비(靈巖 道岬寺 道詵國師ㆍ守眉禪師碑) - 1653년 건립, 비 현존.
- 백계산 옥룡사 증시 선각국사 비명(白鷄山 玉龍寺 贈諡 先覺國師 碑銘) - 1173년 건립, 비는 현존하지 않음, 『동문선(東文選)』을 통해 확인 가능.
가계와 탄생
도선(道詵)은 827년 전라남도 영암에서 태어났다. 집안의 내력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나 태종 무열왕의 서얼손(庶孼孫)이라는 전승으로 보아 진골 귀족 출신일 가능성이 크다.[1]
스님의 휘는 도선(道詵)이요, 속성은 김씨이며, 신라국 영암 출신이다. 그의 세계에 있어서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史事는 유실하였다. 혹자는 이르기를 태종대왕의 서얼손 이라고도 하였다. | ||
출처: 이지관,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증성혜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32쪽. |
탄생설화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수미선사비문(靈巖 道岬寺 道詵國師·守眉禪師碑文)'에 따르면, 도선의 어머니는 최씨(崔氏)로 강가에 떠내려오는 오이를 먹고 임신하였다고 한다.
'백계산 옥룡사 증시 선각국사비명(白鷄山 玉龍寺 贈諡 先覺國師 碑銘)'에 따르면, 도선의 어머니는 강씨(姜氏)로, 꿈에 어떤 사람이 광채나는 구슬 한 개를 주면서 삼키라고 하였는데 그 후 태기가 있었고, 만삭이 되도록 오직 독경과 염불에만 뜻을 두었다고 한다.[2]
출가수행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수미선사비문(靈巖 道岬寺 道詵國師·守眉禪師碑文)'에 따르면, 도선은 월남사(月南寺)로 출가하여 불경을 배웠다.
일찍이 月南寺로 가서 佛經(貝葉)을 배웠다. | ||
출처: 이지관, "영암 도갑사 도선 수미 양대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423쪽. |
'백계산 옥룡사 증시 선각국사비명(白鷄山 玉龍寺 贈諡 先覺國師 碑銘)'에 따르면, 도선은 15세에 출가하여 월유산 화엄사(華嚴寺)에서 승려가 되었다.[3]
도선은 20세가 되던 846년(문성왕 8)에 교법을 떠나 스스로 선정 수행을 하려 하였는데, 마침 혜철이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현재의 전라남도 곡성군 동리산 대안사(大安寺)에서 가르침을 편다는 이야기를 듣고 혜철의 문하에 가서 수학하였다. 23세가 되던 849년(문성왕 11)에는 혜철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4]
활동
입적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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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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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홍기승, "도선",
『디지털도봉구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영숙, 「영암 도갑사 도선·수미비의 조성배경에 대한 고찰」, 『문화사학』32, 한국문화사학회, 2009, 178쪽.
- ↑ 배종호, "도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최연식, "도선",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이지관, "영암 도갑사 도선 수미 양대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400-455쪽.
- 이지관,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증성혜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22-448쪽.
- "도갑사도선수미양대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소. - "옥룡사선각국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소. - 배종호, "도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도선",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홍기승, "도선",
『디지털도봉구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최연식, "도선",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