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 태자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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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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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자사(太子寺)의 위치는 정확히 지적하기 어렵다. 다만 1964년부터 실시한 신라오악학술조사의 일환으로 이 절터 탐색을 시도한 일이 있었고, 그 결과 안동시 도산면 태자동의 폐사지 한 곳을 이 절터로 추정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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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자사에 관한 옛 기록들은 다음과 같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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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태종실록(太宗實錄)』 태종 7년 12월 2일조에 제주자복사(諸州資福寺)를 논하는 가운데 태자사를 ‘봉화태자사(奉化太子寺)’로 기록하였고, | ||
+ |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태자사를 ‘봉화현불우(奉化縣佛宇)’조에 기록하였고, | ||
+ | •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는 비의 원소재지를 ‘봉화군(奉化郡) 명호면(明湖面)’이라 하였고, | ||
+ | • 갈성말치(葛城末治)의 『조선금석고(朝鮮金石攷)』에는 ‘봉화군(奉化郡) 하남면(下南面) 태자리(太子里)’로 기록하였고, | ||
+ | • 『범우고(梵宇攷)』에는 ‘봉화태자사’로 기록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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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1일 (금) 17:37 판
奉化 太子寺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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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奉化 太子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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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내용
탑비(奉化太子寺朗空大師塔碑)는 원래 경상북도 봉화에 있던 태자사에 954년에 세워졌으나, 태자사는 조선 중기에 폐사되었다. 이후 비는 경상북도 영천(榮川)으로 옮겨졌는데, 이웃 군의 수령으로 있던 조선 시대 최고의 서화고동(書畵古董)의 감식가이자 수집가였던 상고당(尙古堂) 김광수(金光遂)[1696~?]가 이를 탁본하여 세상에 돌렸다고 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태자사(太子寺)의 위치는 정확히 지적하기 어렵다. 다만 1964년부터 실시한 신라오악학술조사의 일환으로 이 절터 탐색을 시도한 일이 있었고, 그 결과 안동시 도산면 태자동의 폐사지 한 곳을 이 절터로 추정하였다.
태자사에 관한 옛 기록들은 다음과 같다.
• 『태종실록(太宗實錄)』 태종 7년 12월 2일조에 제주자복사(諸州資福寺)를 논하는 가운데 태자사를 ‘봉화태자사(奉化太子寺)’로 기록하였고,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태자사를 ‘봉화현불우(奉化縣佛宇)’조에 기록하였고, •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는 비의 원소재지를 ‘봉화군(奉化郡) 명호면(明湖面)’이라 하였고, • 갈성말치(葛城末治)의 『조선금석고(朝鮮金石攷)』에는 ‘봉화군(奉化郡) 하남면(下南面) 태자리(太子里)’로 기록하였고, • 『범우고(梵宇攷)』에는 ‘봉화태자사’로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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