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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열왕 표준영정은 1975년 [[김기창]]이 문화재관리국의 의뢰를 받아 제작한 영정으로 [[경주 통일전]]에 소장되어 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90433&cid=49234&categoryId=49234 태종무열왕(김춘추) 영정]", 문화원형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박정희]] 정권이 1970년대부터 추진한 사적지 정화 작업의 일환으로 [[현충사|아산 현충사(顯忠祠)]], [[금산 칠백의총|금산 칠백의총(七百義塚)]], [[임진왜란]] 관련 유적, 강화도 유적 등의 종합적인 보수 복원이 이루어졌고, 이와 함께 [[유관순]], [[윤봉길]] 의사 항일독립운동과 관련된 의사들의 사당이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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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이 1970년대부터 추진한 사적지 정화 작업의 일환으로 [[현충사|아산 현충사(顯忠祠)]], [[금산 칠백의총|금산 칠백의총(七百義塚)]], [[임진왜란]] 관련 유적, 강화도 유적, [[유관순]], [[윤봉길]] 의사와 같은 항일독립운동 의사들의 사당 호국문화유적의 근본적인 보수 복원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적지 정화 작업 중에는 사당 내에 봉안되는 선현의 초상화가 표준영정으로 제작되었으며, 무열왕 영정도 [[문무왕 표준영정|문무왕 영정]]과 함께 1977년 그려져 [[경주 통일전]]에 봉안되었다.<ref>이영미, 「한국표준영정연구 : 제도의 제정과 변천과정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한국근현대미술사전공 석사학위 논문, 2015, 103쪽.</ref>
 
 
경주 통일전에 김유신, 무열왕, 문무왕의 영정을 제작하면서 삼국통일과 관련된 기록
 
화가 함께 제작되었다. 본전인 통일전에는 장우성에 의해 김유신 영정이, 김기창에 의해
 
무열왕과 문무왕의 영정이 제작되었고, 본전을 에워싼 회랑에는 오승우에 의해 삼국통
 
일과정의 중요사실을 그린 대형기록화 8폭이 제작되었다. 기록화는 단석산수련도, 천관
 
녀도, 출전도, 무열왕남천정출전도, 황산혈전도, 사천왕사양국불사도, 매소성당군격멸도
 
등이다. 「화랑의 옛터전 재현 통일전 경주남산 기슭에-새국민교육도장으로」, 『경향신
 
문』, 1977.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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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증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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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영정]]의 평균제작기간이 5-6개월 정도였다면, 사적지 정화 작업과 함께 제작된 영정은 사적지가 건립되는 도중에 제작이 추진되어 사적지 준공일에 맞추어 제작이 완료되어야 했다. 따라서 이들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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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 50-60일 정도의 단기간에 제작되었다. 특히 경주 통일전에 봉안된 무열왕·[[문무왕 표준영정|문무왕 영정]]은 [[김기창]]에 의해 제작되었고, 제작기간은 4개월(1976.9.1.-1976. 12.31)이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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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2개의 영정을 제작해야 했으므로 작품 1점을 기준으로 하면 60일로 그리 길지 않았다.<ref>이영미, 「한국표준영정연구 : 제도의 제정과 변천과정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한국근현대미술사전공 석사학위 논문, 2015, 104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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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사적지 정화작업과 함께 제작된 영정은 고증을 위해 투자할 시간이 부족하였다. 특히 사진이나 초상화가 없는 선현의 경우 고증이 문제가 되었다. 복식 등은 고구려벽화나 출토 유물 혹은 선현이 살았던 시기 초상화를 참고할 수 있었으나 선현의 얼굴은 작가의 창작에 의해 제작되었다. 이로 인해 한명의 작가가 여러 영정을 제작하였으나 얼굴의 표현에서 비슷하게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김기창]]에 의해 제작된 [[조헌 표준영정|조헌 영정]], [[김정호 표준영정|김정호 영정]], 무열왕 표준영정, [[문무왕 표준영정|문무왕 영정]] 등은 콧대와 콧망울이 비슷하게 표현되었다.<ref>이영미, 「한국표준영정연구 : 제도의 제정과 변천과정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한국근현대미술사전공 석사학위 논문, 2015, 132쪽.</ref>
  
이들 영정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다른 표준영정에 비해 제작기간이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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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lery mode=packed caption="조헌, 무열왕, 문무왕, 김정호 표준영정 비교" heights=130px style="float:center" >
는 점을 들 수 있다. 표준영정은 몇 세대 전 선현의 모습을 재현하므로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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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초상화_김정호_표준영정_영정비교.jpg
, 얼굴, 장신구 등 고증이 필요하고, 조선시대 초상화의 전통을 따라 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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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lery>
사실적인 표현이 요구되는 등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다. 그러나 국
 
가시책인 사적지 정화작업과 함께 제작된 영정은 사적지가 건립되는 도중
 
에 제작이 추진되어 사적지 준공일에 맞추어 제작이 완료되어야 했다. 당
 
시 표준으로 지정된 영정의 평균제작기간이 5-6개월 정도였다면, 이들 영
 
정은 50-60일 정도의 단기간에 제작되었다.200) 충북 길상사 김유신 영정은
 
50일(1976.7.1.-1976.8.20), 유관순 영정은 60일(1977.5-1977.6)의 제작기간이
 
걸렸다. 경주 통일전에 봉안된 무열왕·문무왕 영정은 김기창에 의해 영정
 
이 제작되었고, 제작기간은 4개월(1976.9.1.-1976. 12.31)이다. 그러나 작가
 
혼자서 2개의 영정을 제작해야 했으므로 작품 1점을 기준으로 하면 60일로 그리 길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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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증 문제===
 
사적지 정화작업과 함께 제작된 영정은 제작기간이 60일 안팎이어서 고증
 
을 위해 투자할 시간이 부족하였다. 특히 사진이나 초상화가 없는 선현의
 
경우 고증이 문제가 되었다. 복식 등은 고구려벽화나 출토 유물 혹은 선현
 
이 살았던 시기 초상화를 참고할 수 있었으나 선현의 얼굴은 작가의 창작
 
에 의해 제작되었다. 이로 인해 한명의 작가가 여러 영정을 제작하였으나
 
얼굴의 표현에서 비슷하게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김기창에 의해 제작된
 
<조헌 영정>(도 124), <김정호 영정>(도 125), <무열왕 영정>(도 68), <문무
 
왕 영정>(도 69) 등은 콧대와 콧망울이 비슷하게 표현된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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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kculture.or.kr/korean/portrait/portraitView.jsp?sp_seq=13 태종무열왕 표준영정]", 선현의 표준영정,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민족정보마당』<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문화정보원.
  
 
===더 읽을거리===
 
===더 읽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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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체육부, 『표준영정도록-역사를 빛낸 선현』, 문화체육부, 1993.
 
** 문화체육부, 『표준영정도록-역사를 빛낸 선현』, 문화체육부, 1993.
 
** 문화체육부, 『표준영정도록-역사를 빛낸 선현』, 문화체육부, 1999.
 
** 문화체육부, 『표준영정도록-역사를 빛낸 선현』, 문화체육부, 1999.
 
*단행본
 
  
 
*논문
 
*논문
 
**이영미, 「한국표준영정연구 : 제도의 제정과 변천과정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한국근현대미술사전공 석사학위 논문, 2015.
 
**이영미, 「한국표준영정연구 : 제도의 제정과 변천과정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한국근현대미술사전공 석사학위 논문,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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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역사인물]]

2017년 8월 31일 (목) 14:27 판

무열왕 표준영정
한자명칭 武烈王 標準影幀
작가 김기창
제작시기 1976년
지정연도 1977년
소장처 경주 통일전
유형 표준영정
크기(세로×가로) 181×121㎝


정의

신라 제29대 왕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재위 654~661)의 모습을 그린 국가표준영정.

내용

표준영정의 제작

무열왕 표준영정은 1975년 김기창이 문화재관리국의 의뢰를 받아 제작한 영정으로 경주 통일전에 소장되어 있다.[1]

박정희 정권이 1970년대부터 추진한 사적지 정화 작업의 일환으로 아산 현충사(顯忠祠), 금산 칠백의총(七百義塚), 임진왜란 관련 유적, 강화도 유적, 유관순, 윤봉길 의사와 같은 항일독립운동 의사들의 사당 등 호국문화유적의 근본적인 보수 복원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적지 정화 작업 중에는 사당 내에 봉안되는 선현의 초상화가 표준영정으로 제작되었으며, 무열왕 영정도 문무왕 영정과 함께 1977년 그려져 경주 통일전에 봉안되었다.[2]

고증 문제

표준영정의 평균제작기간이 5-6개월 정도였다면, 사적지 정화 작업과 함께 제작된 영정은 사적지가 건립되는 도중에 제작이 추진되어 사적지 준공일에 맞추어 제작이 완료되어야 했다. 따라서 이들 영 정은 50-60일 정도의 단기간에 제작되었다. 특히 경주 통일전에 봉안된 무열왕·문무왕 영정김기창에 의해 제작되었고, 제작기간은 4개월(1976.9.1.-1976. 12.31)이다. 작가 혼자서 2개의 영정을 제작해야 했으므로 작품 1점을 기준으로 하면 60일로 그리 길지 않았다.[3]

따라서 사적지 정화작업과 함께 제작된 영정은 고증을 위해 투자할 시간이 부족하였다. 특히 사진이나 초상화가 없는 선현의 경우 고증이 문제가 되었다. 복식 등은 고구려벽화나 출토 유물 혹은 선현이 살았던 시기 초상화를 참고할 수 있었으나 선현의 얼굴은 작가의 창작에 의해 제작되었다. 이로 인해 한명의 작가가 여러 영정을 제작하였으나 얼굴의 표현에서 비슷하게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김기창에 의해 제작된 조헌 영정, 김정호 영정, 무열왕 표준영정, 문무왕 영정 등은 콧대와 콧망울이 비슷하게 표현되었다.[4]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무열왕 표준영정 표준영정 A는 B에 해당한다
무열왕 표준영정 신라 태종무열왕 A는 B를 묘사하였다
무열왕 표준영정 경주 통일전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무열왕 표준영정 김기창 A는 B에 의해 그려졌다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976년 김기창무열왕 표준영정을 그렸다.
1977년 무열왕 표준영정표준영정으로 지정되었다.
1977년 무열왕 표준영정경주 통일전에 봉안되었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5.798318 129.240159 무열왕 표준영정경주 통일전에 소장되어 있다.

시각자료

주석

  1. "태종무열왕(김춘추) 영정", 문화원형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2. 이영미, 「한국표준영정연구 : 제도의 제정과 변천과정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한국근현대미술사전공 석사학위 논문, 2015, 103쪽.
  3. 이영미, 「한국표준영정연구 : 제도의 제정과 변천과정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한국근현대미술사전공 석사학위 논문, 2015, 104쪽.
  4. 이영미, 「한국표준영정연구 : 제도의 제정과 변천과정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한국근현대미술사전공 석사학위 논문, 2015, 132쪽.

참고문헌

유용한 정보

더 읽을거리

  • 전시도록
    • 문화체육부, 『표준영정도록-역사를 빛낸 선현』, 문화체육부, 1993.
    • 문화체육부, 『표준영정도록-역사를 빛낸 선현』, 문화체육부, 1999.
  • 논문
    • 이영미, 「한국표준영정연구 : 제도의 제정과 변천과정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한국근현대미술사전공 석사학위 논문,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