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양요"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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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 | + | {{사건정보 |
+ | |사진=한글팀_신미양요_01_신미양요_척화비.jpg | ||
+ | |사진출처=김원모,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961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배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 | |대표명칭=신미양요 | ||
+ | |한자표기=辛未洋擾 | ||
+ | |영문명칭= | ||
+ | |이칭= | ||
+ | |유형=사건 | ||
+ | |시대=조선시대 | ||
+ | |날짜=1871년 | ||
+ | |관련인물=[[흥선대원군]] | ||
+ | |관련단체= | ||
+ | |관련장소=강화도 | ||
+ | |관련물품= | ||
+ | |관련유물유적=[[척화비]] | ||
+ | }} | ||
+ | |||
+ | =='''정의'''== | ||
+ | 1871년(고종 8) 미국 아시아함대가 강화도에 쳐들어온 사건. | ||
+ | =='''내용'''== | ||
+ | ===[[신미양요]]가 일어난 배경=== | ||
+ | ====대동강에서 [[제너럴 셔먼호]]의 등장==== | ||
+ | [[제너럴 셔먼호]]는 미국인 [[프레스톤]] 소유의 유람선으로 선주의 요양을 위한 여행 도중 텐진항에 기항했다. 텐진항에 기항한 [[제너럴 셔먼호]]는 선주인 [[프레스톤]]이 텐진 주재 영국 무역회사와 계약을 맺어 무역선으로 변신하였다. 이후 이들은 중무장을 갖추고 1866년 7월 29일 텐진항에서 조선으로 향하였다. [[제너럴 셔먼호]]는 청국 상선의 안내를 받아 1866년 8월 16일 평안도 용강현 다미면 부근에 도착하였다. 조선 측에서는 이들의 동태를 탐지하고 그 행동을 예의 주시한 뒤 [[제너럴 셔먼호]] 측에 회선을 요구하였다.평안병사 [[이용강]]은 [[제너럴 셔먼호]]와의 접촉하여 이들과 대화를 시도하였다. [[제너럴 셔먼호]]측은 자신들이 평양성에 있다는 보물을 찾기 위해 왔음을 밝히고 자신들이 가져온 무기들을 조선인들 앞에서 과시하였다. [[제너럴 셔먼호]]는 조선측의 회선 요청을 무시하고 지속적으로 대동강 상류로 올라갔고 [[박규수]]는 이를 조정에 보고하고 대응 방안을 모색했다. [[제너럴 셔먼호]]측은 8월 21일 오후 6시 경에 대동강 상류로 지출하여 어두워질 때까지 수심을 측정하는 등 탐사 작업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제너럴 셔먼호|셔먼호]]의 [[토마스]] 목사는 대동강 북안에 상륙하여 [[제너럴 셔먼호]]를 구경하러 온 평양 주민들에게 포교활동을 하기도 했다. 조선 측에서는 [[제너럴 셔먼호]]에 거듭 회선을 요구하였으나 이들은 절대로 돌아갈 수 없음을 고집하였다. 급기야 27일 [[제너럴 셔먼호]]는 순영 중군 [[이현익|이현익(李玄翼)]] 일행을 나포하고 억류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어서 [[제너럴 셔먼호]]는 [[이현익]] 일행에 대한 석방의 조건으로 쌀 1,000석과 금·은·인삼을 요구하였다.<ref>김민수,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0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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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너럴 셔먼호]]의 남치행위에 화가난 평양 군민의 무력 충돌==== | ||
+ | 이러한 상황은 평양인들에게 [[제너럴 셔먼호]]에 대한 강한 경각심과 적개감을 불러일으켰다. 평양 주민들은 투석전을 전개하면서 [[제너럴 셔먼호]]에 항의하였고 군민합동의 대규모 무력 시위로 전개되었다. 이후 조선 측과 [[제너럴 셔먼호]]의 교전이 발생하였다. [[제너럴 셔먼호]]와의 교전 과정. 포격에도 불구하고 [[제너럴 셔먼호]]가 단단하여 쉽게 무너지지 않아 공략에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박규수]]가 화공 작전을 주도하여 은밀하게 소형 선박을 [[제너럴 셔먼호]]에 접근시켰다. [[제너럴 셔먼호]]는 이를 피하는 와중에 모래톱에 좌초되어 기동이 불가능해졌다. 이후 조선 군민들의 최후의 공격에 [[제너럴 셔먼호]] 선원들은 전원 사망하였다. [[제너럴 셔먼호]]가 모래톱에 걸려서 기동이 불가능해지지자 평양 군민들이 공격하여 이들을 모두 살해하였다. [[제너럴 셔먼호]] 선원들이 강물로 뛰어드는 등 달아나려고 했으나 평양 군민들이 이들을 모조리 살해하였다.<ref>김민수,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0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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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너럴 셔먼호 사건]] 이후 조선 조정의 대응==== | ||
+ | [[제너럴 셔먼호 사건]] 이후 조선 조정에서는 지금까지 바다에만 나타났던 이양선들이 처음으로 강으로 침투해 들어온 것에 놀라움을 느끼고 이들을 어떻게 물리칠지 논의하였다. [[조선 고종|국왕]]과 대신들은 한편으로 조선인들 사이에서 저들과 호응하는 자들이 있는 여부를 의심하였고 동시에 성리학을 바로 하여 저들에 대항하는 힘으로 삼자고 논의했다. [[박규수]]가 [[제너럴 셔먼호]]를 화공으로 격퇴시킨 상황을 보고하고 조선 조정은 과거 기자 조선의 전설이 전해지는 평양을 침략한 흉악한 서양 오랑캐들을 토벌한 [[박규수]]의 공을 치하하고 공로가 있는 [[백낙연]],[[ 신태정| 신태정(申泰鼎)]] 등에게 가자하였다. 의정부는 서양인들의 총격에 죽은 평양민들을 위무하는 차원에서 은전을 베풀기로 하였다. 또한 [[의정부]]에서 서양인들을 물리친 것을 청국에 알리기 위해 공문서를 작성하여 청국의 예부에 미리 통보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청측에 대동강에서 이루어진 교전의 양상 등을 알렸다. 조선 조정은 [[척사 사상]]을 강화하고 서양인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하는 한편 기존의 성리학 존숭과 [[천주교]] 금지를 강화하고자 했다. 조선 조정은 거듭된 이양선의 출몰을 접하면서 대내적인 이념통제의 강화를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조정은 교서를 통해 [[천주학]]을 믿으면 안된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면서, 과거 [[천주학]]이 전파된 유래와 이것이 끼치는 해악을 밝히고 공맹의 도를 존숭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ref>김민수,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0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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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에 전해진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대응=== | ||
+ | ====미국에 전해진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조사과정==== | ||
+ | * 1866년 9월과 10월 초에 프랑스가 침공했을 시 이들과 동행했던 신부 [[리델]]이 조선인들로부터 서양 선박이 평양에 나타났고 이것이 왕의 아버지, 즉 [[흥선대원군|대원군]]의 명령에 의해 불타버렸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 소식은 프랑스 측에 의해 미국 영사 [[샌포드]]에게 전달되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 이전 조선에 표류한 [[서프라이즈 호]]의 선원들이 어떠한 대우를 받았는지에 대한 조사와 더불어 [[제너럴 셔먼호]] 승무원의 구성과 이들 중 미국인의 숫자, 이들의 생존 여부 등에 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ref>김민수,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0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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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그 해 12월 청국 주재 미국 공사 [[버링게임]]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전말을 보고받고 그 해 12월 15일부로 본국 정부에 정식으로 시말을 보고하였다. 동시에 청국의 총리아문에도 조선에 대하여 적절한 제재조치를 강구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청 측은 이를 거부하였다. 이후 프랑스와 영국에도 공동 출병을 요청하였으나 거부당하자 [[버링게임]] 공사는 이 사건이 미국 단독으로 해결할 수 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미국의 아시아 함대 사령관 [[벨]] 제독에게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진상 조사 및 해결을 요청하였다. [[벨]]제독은 [[버링게임]] 공사의 요청을 받아들여 [[와츄세트 호]]를 즈푸항에서 조선 해역에 급파하여 사건의 경위를 조사하도록 하였다. [[슈펠트]] 함장은 [[제너럴 셔먼호|제너럴 셔먼]] 외에 [[서프라이즈 호]]도 표류했었으며 이들은 조선 측에 의해 청으로 돌려보내졌음을 파악하였다. 한편으로 조선과 접촉했을 경우 어떠한 방식으로 조선 정부에 어떤 방식으로 접근할 지 여부를 검토하였다. [[와츠세츠|와츠세츠(Wachusett)호]] 함장 [[슈펠트|슈펠트(R. W. Shufeldt)]]는 [[벨|벨(Bell)]] 에게 조선으로 가기 전에 [[제너럴 셔먼호]]가 어떠한 경로로 조선에 접근했고 대동강에서 어떠한 경위로 격침되게 되었는지에 대해 보고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보고는 워싱턴으로도 전달되었다.<ref>김민수,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0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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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슈펠트]] 함장은 청국 상인 [[우문태]] 일행을 대동하고 1867년 1월 21일 즈푸항을 떠나 조선으로 향했다. [[슈펠트]]는 조선인들을 만나 정보를 탐색하고 [[제너럴 셔먼호]]의 일부 선원들이 생존해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한편으로 조선 조정은 [[제너럴 셔먼호]]와 자신들의 관련성을 부인하였다. 그러나 [[슈펠트]] 함장은 여러 정황상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에서 침몰한 것이 확실하다고 보았다. [[와츄세트 호]]가 즈푸로 돌아온 이후, 베이징의 미국 공사관과 영국 공사관 측에서는 조선에 억류되어 있는 생존자 가운데 자국인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고 단정하고 청국의 총리 아문에 조선이 그들을 조속히 송환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해 줄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청국측은 조선이 청국의 영향력 하에 있다고 하나 일체의 법령을 스스로 집행하고 있다고 그들의 요구를 완곡히 거절하였다. 이와 더불어 청 측은 조선 측에 미국 측이 생존자를 찾고 있음을 알렸다.<ref>김민수,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0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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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 측에서는 1868년 4월 7일 [[셰난도어호]]를 파견하여 다시 조사를 시도하였다. 조선 쪽에서도 [[셰난도어호]]의 출현을 파악하였다. 조선 측에서는 미국 측에서 요구한 [[제너럴 셔먼호]]의 생존자에 대해 관련자인 [[김자평]]을 심문한 결과 날조임이 드러났음을 밝히고 청 측에 이를 알렸다. [[셰난도어 호]]의 [[페비거]] 함장은 자신의 조선조사 결과를 보고하였다. 자신의 항해 경로 및 조선 측과의 접촉 결과를 보고하였고 [[김자평]]과의 접촉 과정도 밝혔다. 최종적으로 그는 [[제너럴 셔먼호]]의 생존자는 없는 것으로 판단하였다.<ref>김민수,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0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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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 조사후 군사적인 수단을 생각하다.==== | ||
+ | *그러나 미국 영사 [[조지 시워드|시워드]]는 군사적인 수단을 통해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후 미국측은 [[페비거]] 함장의 보고가 맞다고 판단했지만 조선인들이 미국 국기를 모욕한 것은 심각한 일이며 이에 대해 군사적 조치를 동원해서라도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조지 시워드|시워드]] 영사는 자신의 숙부인 [[윌리엄 시워드|시워드]] 국무장관에게 강력한 군사력의 과시를 통해 조선 측에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대해 재차 조사하고 동시에 조약을 체결하여 통상을 개시하고 미국인이 조난당할 시 안전을 보장받게 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이후로도 청과 조선의 상황에 대한 보고 및 조약 체결 건의는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윌리엄 시워드|시워드]]의 후임으로 임명된 [[피셔]] 국무장관은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추진하여 태평양에서 미국의 영향력 확대에 힘을 쏟기 시작하였다. [[피셔]] 장관은 최종적으로 청국에 중재를 요청하여 조선과 조약을 체결한다는 원칙에 동의하고 그에 따른 전권을 청국 주재 [[로우]] 공사에게 위임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1870년 11월 조선에 파견될 미국 외교 사절단의 전권을 부여받은 [[로우]] 공사는 베이징에서 [[로저스]] 제독 및 [[조지 시워드|시워드]] 총영사를 초청하여 대책을 숙의하였다.<ref>김민수,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0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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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우]]는 청과 조선의 관계를 미국에 보고하고 청의 지원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실질적으로 조선이 독립국이어서 청이 문제에 실질적 도움이 될 수 있을 지 의문을 표하였다. 이후 [[로우]]는 조선 원정군은 상하이 또는 즈푸에서 출발할 예정이며 출항은 다음해 5월 1일에서 15일 사이에 이루어질 예정이며 조선에 대한 정보를 북경에 출입 중인 조선 사신을 통해 접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편으로 미국 측은 청을 통하여 조선에 자문을 보내어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대한 항의의 뜻을 표시하였고 이에 조선 측에서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스스로 자초한 것이며 조선은 외국 측과 굳이 통상할 뜻이 없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 무렵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 등은 기함 콜로라도 호 등 5척의 군함에 병력 1,230명을 이끌고 나가사키 항에서 집결하였다. 5월 12일 나가사키 항에 도착한 [[로우]] 공사는 미국 정부에 서신을 보내어 자신의 상황과 입장을 밝혔다. 그는 출항 시기 및 조선 도착 예정 시기를 전달하고 조선에 관한 정보가 매우 부족함을 토로하고, 충돌이 발생할 경우 강력한 군사적 대응을 할 방침이라고 밝혔다.<ref>김민수,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0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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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 아시아 함대 조선에 도달하여 [[신미양요]] 시작되다=== | ||
+ | ====미국 아시아 함대 조선으로 출항하다.==== | ||
+ | 그러다가 1871년, 미국은 전통적인 포함 외교에 의해 조선을 개항하기 위해 마침내 조선 원정을 결정하였다. 주청미국공사 [[로우|로우(Low, F. F.)]]에게 전권을 위임하면서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로저스(Rodgers, J.)]]에게 해군함대를 동원, 조선 원정을 명하였다. [[로저스]]는 기함 [[콜로라도호|콜로라도호(Colorado號)]]를 비롯하여 군함 5척에, 수해병 1,230명, 함재대포 85문을 적재하였다. 5월 초순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함대를 집결, 약 보름 동안 해상기동훈련을 실시하고 5월 16일 조선원정 길에 올랐다. | ||
+ | [[로저스]]는 조선측이 평화적 협상을 거부할 경우에는 무력시위 및 군사작전으로 강제적으로 입약(立約)을 성취시키겠다는 포함 책략을 수립하고 인천 앞바다에 내침하였다. [[로저스]]는 서울로 가기 위한 수로를 탐색하기 위해 강화해협을 탐측하겠다고 조선 대표에게 일방적으로 통고하였다. <ref>김원모,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961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배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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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 아시아 함대와 [[손돌목 포격사건]]이 일어나다. 그리고 일어난 보복상륙작전==== | ||
+ | 6월 1일 강화해협의 탐측 항행을 강행하였다. 함대가 손돌목[孫乭項]에 이르자 연안 강화포대로부터 기습공격을 받아 조·미간에 최초로 군사적 충돌사건이 벌어졌다. 이를 ‘[[손돌목 포격사건]]’이라 한다. 미국 대표는 조선측에게 평화적으로 탐측활동을 벌이고 있는 미군 함대에 대한 포격은 비인도적 야만행위라고 비난하였다. 그러면서 조선 대표를 파견해서 협상할 것, 포격사건에 대한 사죄 및 손해배상을 해줄 것 등을 요구하였다. 만약 이 같은 요구 조건을 거부하면 10일 후에 보복상륙작전을 벌이겠다고 위협하였다. 조선측은 강화해협은 국방 안보상 가장 중요한 수로이기 때문에 미군 함대가 조선당국의 정식 허락없이 항행한 것은 주권침해요, 영토침략행위라고 규탄하면서 협상 및 사죄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평화적 협상이 결렬되자, 미국은 6월 10일 [[초지진|초지진(草芝鎭)]] 상륙작전을 단행하였다. 상륙 군 부대를 10개 중대로 편성하고, 포병대·공병대·의무대, 그리고 사진촬영반 등이 동원되었다. 수륙 양면공격을 개시하여, 역사상 최초로 조·미전쟁(朝美戰爭)이 발생하였다. 미군은 함상 함포사격으로 [[초지진]]을 완전 초토화시키고 점거하였다. 미군은 6월 11일에는 [[덕진진|덕진진(德津鎭)]]을 무혈 점거하였다. 마지막으로 [[광성보|광성보(廣城堡)]] 작전을 수행하였다. [[광성보]]에는 진무중군 [[어재연|어재연(魚在淵)]]이 이끄는 조선 수비병 600여 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미군은 수륙 양면포격을 한 시간 벌인 끝에 [[광성보]]를 함락하였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전사자 3명, 부상자 10명이었고, 조선군은 전사자 350명, 부상자 20명이었다. 미군은 [[광성보]]를 점거하고 수자기(帥字旗)를 탈환하고 성조기를 게양, 전승을 자축하였다.<ref>김원모,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961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배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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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미양요]]의 성격=== | ||
+ | ====실패한 미국의 [[포함외교]]와 조선의 강력한 쇄국 의지==== | ||
+ | 미군의 강화도 내침은 분명한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처음부터 군사적으로 조선을 정복, 지배하여 영토 분할이나 식민지화하기 위한 침략전쟁을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포함책략에 의해 조선을 무력적으로 굴복시켜 조선 개항을 실현시키려는 일시적 침략전쟁이었다는 점에서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전쟁과는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중국·일본·동남아시아 등 여러 나라에는 미국의 [[포함외교]]가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1871년의 [[대한포함외교정책]]은 완전 실패로 끝났다. 미국은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양이정책|쇄국양이정책(鎖國壤夷政策)]]에 부닥쳐 조선 개항을 단념하고 7월 3일 함대를 철수하였다. 조선측은 조·미전쟁에서 완전 패전하였지만, 미군 함대의 철수를 곧 패퇴로 간주하였다.<ref>김원모,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961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배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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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의 [[포함외교]] 실패의 원인==== | ||
+ | 미국이 남북전쟁 이래 최대 규모의 해군병력을 동원하여 조선 원정을 단행한 지상목표는 조선 개항이었다. 그러나 조·미전쟁 결과 조선 개항은 무위로 끝났다. 실패 요인은 여러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미국은 조선 당국과의 입약 교섭에서 화해적 교섭을 지양하고 시종일관 포함책략으로 대처했다는 것이다. 물리적 힘으로 조선을 굴복시켜 개항하고자 하였다. 둘째, 문화적 배경의 차이에 대한 상호 이해가 부족하였다는 것이다. 셋째, 조선이 철두철미하게도 미국과의 불교섭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양이에 대한 불신감과 배외감정이 강한 조선은 미군을 오랑캐로 간주하였다. 반면 미군은 백인우월감을 가지고 조선을 호전적 야만국으로 간주하였다. 여기에서 양국간의 화해적 교섭은 불가능하였다. 넷째, 미국은 조선원정을 단행할 때 처음부터 조선과 전쟁을 각오하고 [[강화도]]에 내침하였다는 것이다. 강화해협은 역사적으로 외국배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군사적 제한지역이었다. 그러기에 해협 입구에는 외국배의 항행을 금지하는 이른바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 비가 서 있었다. 이처럼 국방 안보상 중요한 수로에 정식허가 없이 미군 함대가 들어온 것은 엄연한 주권침해이고 영토침략행위였다. 그러기에 조선 측은 이를 틈입(闖入: 느닷없이 불쑥 침입함.) 또는 내범(內犯)으로 단죄하고 있다. 다섯째, 1871년 조선은 아직도 개항 여건이 조성되지 못한 가운데 미군 함대를 맞이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1854년의 일본개항 성공을 역사적 교훈으로 삼고, 1871년에도 동일한 결과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조·일양국의 개항 여건은 정반대였다.<ref>김원모,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961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배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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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의 [[포함외교]]가 조선과 일본에 다르게 나타난 원인==== | ||
+ | 일본은 이미 1641년 [[나가사키]]에 네덜란드상관[和蘭商館]을 설치, 유럽 열강과 교역하면서, 유럽 선진문물을 수용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일본은 1854년 [[페리|페리(Perry, M. C.)]]의 미군 함대가 내침하였을 때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도 평화리에 [[미일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나가사키와 같은 교역 항구도 없었고, 양반지도층은 여전히 서구문물에 어두웠기 때문에 개항은 곧 망국인 양 쇄국정책을 고수하였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조선 개항의 관건을 쥐고 있는 청나라가 조선 개항을 반대하였다는 점이다. 청나라는 조선이 개항하면 [[대한종주권|대한종주권(對韓宗主權)]]이 상실될까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청나라는 조선이 계속 [[쇄국정책]]을 고수하여 조·청간의 전통적인 [[조공관계]]를 유지하기를 희망하였다. 결국 [[위정척사사상]]에 젖어 있는 [[흥선대원군]]은 조·미전쟁 직후 쇄국양이정책을 더욱 강화하여 전국 각지에 [[척화비|척화비(斥和碑)]]를 세워, 양이와의 화친은 매국이요 망국행위라고 경계하였다.<ref>김원모,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961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배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 | |||
+ | ===[[신미양요]]이후 끼친 조선사회의 영향=== | ||
+ | 조선인들은 두 차례의 양요를 거치면서 자신들이 프랑스와 미국을 물리쳤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입지의 강화로 이어졌다. 또한 군사 제도의 정비가 이루어져 삼군부(三軍府)의 강화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군사비의 확충과 중앙군·지방군의 전력 강화가 이루어졌다.<ref>김민수,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0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 | |||
+ | =='''지식 관계망'''== | ||
+ | ===관계정보=== | ||
+ | {|class="wikitable sortable" | ||
+ | !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 | |- | ||
+ | |[[신미양요]]||[[제너럴 셔먼호 사건]]||A는 B와 관련이 있다||1871년 | ||
+ | |- | ||
+ | |[[신미양요]]||[[박규수]]||A는 B와 관련이 있다||1871년 | ||
+ | |- | ||
+ | |[[신미양요]]||[[흥선대원군]]||A는 B와 관련이 있다||1871년 | ||
+ | |- | ||
+ | |[[신미양요]]||[[천주교]]||A는 B와 관련이 있다||1871년 | ||
+ | |- | ||
+ | |[[신미양요]]||[[척사 사상]]||A는 B와 관련이 있다||1871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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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일:한글팀_신미양요_07_신미양요_강화_광성보_용두돈대_.jpg | 광성보 용두돈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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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주석'''== | ||
+ | <references/> | ||
+ | |||
+ | =='''참고문헌'''== | ||
+ | ===더 읽을거리=== | ||
+ | *논문 | ||
+ | **신효승, 「1871년 미군의 강화도 침공과 전황 분석」, 『역사와 경계』, Vol 93, 2014, 31-64쪽. | ||
+ | **심기재, 「明治 4(1871)年, 辛未洋擾와 明治政策의 대응」, 『한국정책과학학회보』, Vol 3, 1999, 17-26쪽. | ||
+ | ===유용한 정보=== | ||
+ | *김민수,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0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 ||
+ | *김원모,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961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배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 | |||
+ | [[분류:한글고문서]] | ||
+ | [[분류:사건]] | ||
[[분류:이창섭]] | [[분류:이창섭]] |
2017년 8월 27일 (일) 01:03 판
신미양요(辛未洋擾) | |
대표명칭 | 신미양요 |
---|---|
한자표기 | 辛未洋擾 |
유형 | 사건 |
시대 | 조선시대 |
날짜 | 1871년 |
관련인물 | 흥선대원군 |
관련장소 | 강화도 |
관련유물유적 | 척화비 |
목차
정의
1871년(고종 8) 미국 아시아함대가 강화도에 쳐들어온 사건.
내용
신미양요가 일어난 배경
대동강에서 제너럴 셔먼호의 등장
제너럴 셔먼호는 미국인 프레스톤 소유의 유람선으로 선주의 요양을 위한 여행 도중 텐진항에 기항했다. 텐진항에 기항한 제너럴 셔먼호는 선주인 프레스톤이 텐진 주재 영국 무역회사와 계약을 맺어 무역선으로 변신하였다. 이후 이들은 중무장을 갖추고 1866년 7월 29일 텐진항에서 조선으로 향하였다. 제너럴 셔먼호는 청국 상선의 안내를 받아 1866년 8월 16일 평안도 용강현 다미면 부근에 도착하였다. 조선 측에서는 이들의 동태를 탐지하고 그 행동을 예의 주시한 뒤 제너럴 셔먼호 측에 회선을 요구하였다.평안병사 이용강은 제너럴 셔먼호와의 접촉하여 이들과 대화를 시도하였다. 제너럴 셔먼호측은 자신들이 평양성에 있다는 보물을 찾기 위해 왔음을 밝히고 자신들이 가져온 무기들을 조선인들 앞에서 과시하였다. 제너럴 셔먼호는 조선측의 회선 요청을 무시하고 지속적으로 대동강 상류로 올라갔고 박규수는 이를 조정에 보고하고 대응 방안을 모색했다. 제너럴 셔먼호측은 8월 21일 오후 6시 경에 대동강 상류로 지출하여 어두워질 때까지 수심을 측정하는 등 탐사 작업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셔먼호의 토마스 목사는 대동강 북안에 상륙하여 제너럴 셔먼호를 구경하러 온 평양 주민들에게 포교활동을 하기도 했다. 조선 측에서는 제너럴 셔먼호에 거듭 회선을 요구하였으나 이들은 절대로 돌아갈 수 없음을 고집하였다. 급기야 27일 제너럴 셔먼호는 순영 중군 이현익(李玄翼) 일행을 나포하고 억류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어서 제너럴 셔먼호는 이현익 일행에 대한 석방의 조건으로 쌀 1,000석과 금·은·인삼을 요구하였다.[1]
제너럴 셔먼호의 남치행위에 화가난 평양 군민의 무력 충돌
이러한 상황은 평양인들에게 제너럴 셔먼호에 대한 강한 경각심과 적개감을 불러일으켰다. 평양 주민들은 투석전을 전개하면서 제너럴 셔먼호에 항의하였고 군민합동의 대규모 무력 시위로 전개되었다. 이후 조선 측과 제너럴 셔먼호의 교전이 발생하였다. 제너럴 셔먼호와의 교전 과정. 포격에도 불구하고 제너럴 셔먼호가 단단하여 쉽게 무너지지 않아 공략에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박규수가 화공 작전을 주도하여 은밀하게 소형 선박을 제너럴 셔먼호에 접근시켰다. 제너럴 셔먼호는 이를 피하는 와중에 모래톱에 좌초되어 기동이 불가능해졌다. 이후 조선 군민들의 최후의 공격에 제너럴 셔먼호 선원들은 전원 사망하였다. 제너럴 셔먼호가 모래톱에 걸려서 기동이 불가능해지지자 평양 군민들이 공격하여 이들을 모두 살해하였다. 제너럴 셔먼호 선원들이 강물로 뛰어드는 등 달아나려고 했으나 평양 군민들이 이들을 모조리 살해하였다.[2]
제너럴 셔먼호 사건 이후 조선 조정의 대응
제너럴 셔먼호 사건 이후 조선 조정에서는 지금까지 바다에만 나타났던 이양선들이 처음으로 강으로 침투해 들어온 것에 놀라움을 느끼고 이들을 어떻게 물리칠지 논의하였다. 국왕과 대신들은 한편으로 조선인들 사이에서 저들과 호응하는 자들이 있는 여부를 의심하였고 동시에 성리학을 바로 하여 저들에 대항하는 힘으로 삼자고 논의했다. 박규수가 제너럴 셔먼호를 화공으로 격퇴시킨 상황을 보고하고 조선 조정은 과거 기자 조선의 전설이 전해지는 평양을 침략한 흉악한 서양 오랑캐들을 토벌한 박규수의 공을 치하하고 공로가 있는 백낙연, 신태정(申泰鼎) 등에게 가자하였다. 의정부는 서양인들의 총격에 죽은 평양민들을 위무하는 차원에서 은전을 베풀기로 하였다. 또한 의정부에서 서양인들을 물리친 것을 청국에 알리기 위해 공문서를 작성하여 청국의 예부에 미리 통보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청측에 대동강에서 이루어진 교전의 양상 등을 알렸다. 조선 조정은 척사 사상을 강화하고 서양인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하는 한편 기존의 성리학 존숭과 천주교 금지를 강화하고자 했다. 조선 조정은 거듭된 이양선의 출몰을 접하면서 대내적인 이념통제의 강화를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조정은 교서를 통해 천주학을 믿으면 안된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면서, 과거 천주학이 전파된 유래와 이것이 끼치는 해악을 밝히고 공맹의 도를 존숭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3]
미국에 전해진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대응
미국에 전해진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조사과정
- 1866년 9월과 10월 초에 프랑스가 침공했을 시 이들과 동행했던 신부 리델이 조선인들로부터 서양 선박이 평양에 나타났고 이것이 왕의 아버지, 즉 대원군의 명령에 의해 불타버렸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 소식은 프랑스 측에 의해 미국 영사 샌포드에게 전달되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 이전 조선에 표류한 서프라이즈 호의 선원들이 어떠한 대우를 받았는지에 대한 조사와 더불어 제너럴 셔먼호 승무원의 구성과 이들 중 미국인의 숫자, 이들의 생존 여부 등에 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4]
- 그 해 12월 청국 주재 미국 공사 버링게임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전말을 보고받고 그 해 12월 15일부로 본국 정부에 정식으로 시말을 보고하였다. 동시에 청국의 총리아문에도 조선에 대하여 적절한 제재조치를 강구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청 측은 이를 거부하였다. 이후 프랑스와 영국에도 공동 출병을 요청하였으나 거부당하자 버링게임 공사는 이 사건이 미국 단독으로 해결할 수 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미국의 아시아 함대 사령관 벨 제독에게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진상 조사 및 해결을 요청하였다. 벨제독은 버링게임 공사의 요청을 받아들여 와츄세트 호를 즈푸항에서 조선 해역에 급파하여 사건의 경위를 조사하도록 하였다. 슈펠트 함장은 제너럴 셔먼 외에 서프라이즈 호도 표류했었으며 이들은 조선 측에 의해 청으로 돌려보내졌음을 파악하였다. 한편으로 조선과 접촉했을 경우 어떠한 방식으로 조선 정부에 어떤 방식으로 접근할 지 여부를 검토하였다. 와츠세츠(Wachusett)호 함장 슈펠트(R. W. Shufeldt)는 벨(Bell) 에게 조선으로 가기 전에 제너럴 셔먼호가 어떠한 경로로 조선에 접근했고 대동강에서 어떠한 경위로 격침되게 되었는지에 대해 보고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보고는 워싱턴으로도 전달되었다.[5]
- 슈펠트 함장은 청국 상인 우문태 일행을 대동하고 1867년 1월 21일 즈푸항을 떠나 조선으로 향했다. 슈펠트는 조선인들을 만나 정보를 탐색하고 제너럴 셔먼호의 일부 선원들이 생존해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한편으로 조선 조정은 제너럴 셔먼호와 자신들의 관련성을 부인하였다. 그러나 슈펠트 함장은 여러 정황상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에서 침몰한 것이 확실하다고 보았다. 와츄세트 호가 즈푸로 돌아온 이후, 베이징의 미국 공사관과 영국 공사관 측에서는 조선에 억류되어 있는 생존자 가운데 자국인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고 단정하고 청국의 총리 아문에 조선이 그들을 조속히 송환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해 줄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청국측은 조선이 청국의 영향력 하에 있다고 하나 일체의 법령을 스스로 집행하고 있다고 그들의 요구를 완곡히 거절하였다. 이와 더불어 청 측은 조선 측에 미국 측이 생존자를 찾고 있음을 알렸다.[6]
- 미국 측에서는 1868년 4월 7일 셰난도어호를 파견하여 다시 조사를 시도하였다. 조선 쪽에서도 셰난도어호의 출현을 파악하였다. 조선 측에서는 미국 측에서 요구한 제너럴 셔먼호의 생존자에 대해 관련자인 김자평을 심문한 결과 날조임이 드러났음을 밝히고 청 측에 이를 알렸다. 셰난도어 호의 페비거 함장은 자신의 조선조사 결과를 보고하였다. 자신의 항해 경로 및 조선 측과의 접촉 결과를 보고하였고 김자평과의 접촉 과정도 밝혔다. 최종적으로 그는 제너럴 셔먼호의 생존자는 없는 것으로 판단하였다.[7]
미국 조사후 군사적인 수단을 생각하다.
- 그러나 미국 영사 시워드는 군사적인 수단을 통해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후 미국측은 페비거 함장의 보고가 맞다고 판단했지만 조선인들이 미국 국기를 모욕한 것은 심각한 일이며 이에 대해 군사적 조치를 동원해서라도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시워드 영사는 자신의 숙부인 시워드 국무장관에게 강력한 군사력의 과시를 통해 조선 측에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대해 재차 조사하고 동시에 조약을 체결하여 통상을 개시하고 미국인이 조난당할 시 안전을 보장받게 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이후로도 청과 조선의 상황에 대한 보고 및 조약 체결 건의는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시워드의 후임으로 임명된 피셔 국무장관은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추진하여 태평양에서 미국의 영향력 확대에 힘을 쏟기 시작하였다. 피셔 장관은 최종적으로 청국에 중재를 요청하여 조선과 조약을 체결한다는 원칙에 동의하고 그에 따른 전권을 청국 주재 로우 공사에게 위임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1870년 11월 조선에 파견될 미국 외교 사절단의 전권을 부여받은 로우 공사는 베이징에서 로저스 제독 및 시워드 총영사를 초청하여 대책을 숙의하였다.[8]
- 로우는 청과 조선의 관계를 미국에 보고하고 청의 지원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실질적으로 조선이 독립국이어서 청이 문제에 실질적 도움이 될 수 있을 지 의문을 표하였다. 이후 로우는 조선 원정군은 상하이 또는 즈푸에서 출발할 예정이며 출항은 다음해 5월 1일에서 15일 사이에 이루어질 예정이며 조선에 대한 정보를 북경에 출입 중인 조선 사신을 통해 접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편으로 미국 측은 청을 통하여 조선에 자문을 보내어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대한 항의의 뜻을 표시하였고 이에 조선 측에서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스스로 자초한 것이며 조선은 외국 측과 굳이 통상할 뜻이 없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 무렵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 등은 기함 콜로라도 호 등 5척의 군함에 병력 1,230명을 이끌고 나가사키 항에서 집결하였다. 5월 12일 나가사키 항에 도착한 로우 공사는 미국 정부에 서신을 보내어 자신의 상황과 입장을 밝혔다. 그는 출항 시기 및 조선 도착 예정 시기를 전달하고 조선에 관한 정보가 매우 부족함을 토로하고, 충돌이 발생할 경우 강력한 군사적 대응을 할 방침이라고 밝혔다.[9]
미국 아시아 함대 조선에 도달하여 신미양요 시작되다
미국 아시아 함대 조선으로 출항하다.
그러다가 1871년, 미국은 전통적인 포함 외교에 의해 조선을 개항하기 위해 마침내 조선 원정을 결정하였다. 주청미국공사 로우(Low, F. F.)에게 전권을 위임하면서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Rodgers, J.)에게 해군함대를 동원, 조선 원정을 명하였다. 로저스는 기함 콜로라도호(Colorado號)를 비롯하여 군함 5척에, 수해병 1,230명, 함재대포 85문을 적재하였다. 5월 초순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함대를 집결, 약 보름 동안 해상기동훈련을 실시하고 5월 16일 조선원정 길에 올랐다. 로저스는 조선측이 평화적 협상을 거부할 경우에는 무력시위 및 군사작전으로 강제적으로 입약(立約)을 성취시키겠다는 포함 책략을 수립하고 인천 앞바다에 내침하였다. 로저스는 서울로 가기 위한 수로를 탐색하기 위해 강화해협을 탐측하겠다고 조선 대표에게 일방적으로 통고하였다. [10]
미국 아시아 함대와 손돌목 포격사건이 일어나다. 그리고 일어난 보복상륙작전
6월 1일 강화해협의 탐측 항행을 강행하였다. 함대가 손돌목[孫乭項]에 이르자 연안 강화포대로부터 기습공격을 받아 조·미간에 최초로 군사적 충돌사건이 벌어졌다. 이를 ‘손돌목 포격사건’이라 한다. 미국 대표는 조선측에게 평화적으로 탐측활동을 벌이고 있는 미군 함대에 대한 포격은 비인도적 야만행위라고 비난하였다. 그러면서 조선 대표를 파견해서 협상할 것, 포격사건에 대한 사죄 및 손해배상을 해줄 것 등을 요구하였다. 만약 이 같은 요구 조건을 거부하면 10일 후에 보복상륙작전을 벌이겠다고 위협하였다. 조선측은 강화해협은 국방 안보상 가장 중요한 수로이기 때문에 미군 함대가 조선당국의 정식 허락없이 항행한 것은 주권침해요, 영토침략행위라고 규탄하면서 협상 및 사죄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평화적 협상이 결렬되자, 미국은 6월 10일 초지진(草芝鎭) 상륙작전을 단행하였다. 상륙 군 부대를 10개 중대로 편성하고, 포병대·공병대·의무대, 그리고 사진촬영반 등이 동원되었다. 수륙 양면공격을 개시하여, 역사상 최초로 조·미전쟁(朝美戰爭)이 발생하였다. 미군은 함상 함포사격으로 초지진을 완전 초토화시키고 점거하였다. 미군은 6월 11일에는 덕진진(德津鎭)을 무혈 점거하였다. 마지막으로 광성보(廣城堡) 작전을 수행하였다. 광성보에는 진무중군 어재연(魚在淵)이 이끄는 조선 수비병 600여 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미군은 수륙 양면포격을 한 시간 벌인 끝에 광성보를 함락하였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전사자 3명, 부상자 10명이었고, 조선군은 전사자 350명, 부상자 20명이었다. 미군은 광성보를 점거하고 수자기(帥字旗)를 탈환하고 성조기를 게양, 전승을 자축하였다.[11]
신미양요의 성격
실패한 미국의 포함외교와 조선의 강력한 쇄국 의지
미군의 강화도 내침은 분명한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처음부터 군사적으로 조선을 정복, 지배하여 영토 분할이나 식민지화하기 위한 침략전쟁을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포함책략에 의해 조선을 무력적으로 굴복시켜 조선 개항을 실현시키려는 일시적 침략전쟁이었다는 점에서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전쟁과는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중국·일본·동남아시아 등 여러 나라에는 미국의 포함외교가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1871년의 대한포함외교정책은 완전 실패로 끝났다. 미국은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양이정책(鎖國壤夷政策)에 부닥쳐 조선 개항을 단념하고 7월 3일 함대를 철수하였다. 조선측은 조·미전쟁에서 완전 패전하였지만, 미군 함대의 철수를 곧 패퇴로 간주하였다.[12]
미국의 포함외교 실패의 원인
미국이 남북전쟁 이래 최대 규모의 해군병력을 동원하여 조선 원정을 단행한 지상목표는 조선 개항이었다. 그러나 조·미전쟁 결과 조선 개항은 무위로 끝났다. 실패 요인은 여러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미국은 조선 당국과의 입약 교섭에서 화해적 교섭을 지양하고 시종일관 포함책략으로 대처했다는 것이다. 물리적 힘으로 조선을 굴복시켜 개항하고자 하였다. 둘째, 문화적 배경의 차이에 대한 상호 이해가 부족하였다는 것이다. 셋째, 조선이 철두철미하게도 미국과의 불교섭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양이에 대한 불신감과 배외감정이 강한 조선은 미군을 오랑캐로 간주하였다. 반면 미군은 백인우월감을 가지고 조선을 호전적 야만국으로 간주하였다. 여기에서 양국간의 화해적 교섭은 불가능하였다. 넷째, 미국은 조선원정을 단행할 때 처음부터 조선과 전쟁을 각오하고 강화도에 내침하였다는 것이다. 강화해협은 역사적으로 외국배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군사적 제한지역이었다. 그러기에 해협 입구에는 외국배의 항행을 금지하는 이른바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 비가 서 있었다. 이처럼 국방 안보상 중요한 수로에 정식허가 없이 미군 함대가 들어온 것은 엄연한 주권침해이고 영토침략행위였다. 그러기에 조선 측은 이를 틈입(闖入: 느닷없이 불쑥 침입함.) 또는 내범(內犯)으로 단죄하고 있다. 다섯째, 1871년 조선은 아직도 개항 여건이 조성되지 못한 가운데 미군 함대를 맞이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1854년의 일본개항 성공을 역사적 교훈으로 삼고, 1871년에도 동일한 결과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조·일양국의 개항 여건은 정반대였다.[13]
미국의 포함외교가 조선과 일본에 다르게 나타난 원인
일본은 이미 1641년 나가사키에 네덜란드상관[和蘭商館]을 설치, 유럽 열강과 교역하면서, 유럽 선진문물을 수용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일본은 1854년 페리(Perry, M. C.)의 미군 함대가 내침하였을 때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도 평화리에 미일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나가사키와 같은 교역 항구도 없었고, 양반지도층은 여전히 서구문물에 어두웠기 때문에 개항은 곧 망국인 양 쇄국정책을 고수하였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조선 개항의 관건을 쥐고 있는 청나라가 조선 개항을 반대하였다는 점이다. 청나라는 조선이 개항하면 대한종주권(對韓宗主權)이 상실될까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청나라는 조선이 계속 쇄국정책을 고수하여 조·청간의 전통적인 조공관계를 유지하기를 희망하였다. 결국 위정척사사상에 젖어 있는 흥선대원군은 조·미전쟁 직후 쇄국양이정책을 더욱 강화하여 전국 각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양이와의 화친은 매국이요 망국행위라고 경계하였다.[14]
신미양요이후 끼친 조선사회의 영향
조선인들은 두 차례의 양요를 거치면서 자신들이 프랑스와 미국을 물리쳤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입지의 강화로 이어졌다. 또한 군사 제도의 정비가 이루어져 삼군부(三軍府)의 강화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군사비의 확충과 중앙군·지방군의 전력 강화가 이루어졌다.[15]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신미양요 | 제너럴 셔먼호 사건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1871년 |
신미양요 | 박규수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1871년 |
신미양요 | 흥선대원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1871년 |
신미양요 | 천주교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1871년 |
신미양요 | 척사 사상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1871년 |
신미양요 | 리델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1871년 |
제너럴 셔먼호 사건 | 리델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1866년 7월-8월 |
제너럴 셔먼호 사건 | 샌포드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1866년 7월-8월 |
제너럴 셔먼호 사건 | 버링게임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1866년 7월-8월 |
제너럴 셔먼호 사건 | 벨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1866년 7월-8월 |
제너럴 셔먼호 사건 | 슈펠트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1866년 7월-8월 |
제너럴 셔먼호 사건 | 조지 시워드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1866년 7월-8월 |
제너럴 셔먼호 사건 | 윌리엄 시워드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1866년 7월-8월 |
신미양요 | 조지 시워드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1871년 |
신미양요 | 조지 시워드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1871년 |
신미양요 | 파셔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1871년 |
신미양요 | 로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1871년 |
신미양요 | 로저스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1871년 |
신미양요 | 강화도 | A는 B에서 일어났다 | 1871년 |
강화도 | 초지진 | A는 B를 포함한다 | |
강화도 | 광성보 | A는 B를 포함한다 | |
흥선대원군 | 쇄국양이정책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미국 | 포함외교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광성보 | 어재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신미양요 | 어제유대소신료급중외민인척사윤음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1871년 |
천주학 | 천주교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조선 | 흥선대원군 | A는 B를 포함한다 | |
조선 | 박규수 | A는 B를 포함한다 | |
조선 | 어재연 | A는 B를 포함한다 | |
신미양요 | 손돌목 포격사건 | A는 B를 포함한다 | 1871년 |
미국 | 샌포드 | A는 B를 포함한다 | |
미국 | 버링게임 | A는 B를 포함한다 | |
미국 | 벨 | A는 B를 포함한다 | |
미국 | 슈펠트 | A는 B를 포함한다 | |
미국 | 조지 시워드 | A는 B를 포함한다 | |
미국 | 윌리엄 시워드 | A는 B를 포함한다 | |
미국 | 파셔 | A는 B를 포함한다 | |
미국 | 로우 | A는 B를 포함한다 | |
미국 | 로저스 | A는 B를 포함한다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866년 7월-8월 |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일어나다 |
1871년 6월 1일 | 미군 함대와 강화포대와 충돌이 벌어져 손돌목 포격사건이 일어나다 |
1871년 6월 10일 | 미국 함대가 초지진을 점령하다 |
1871년 6월 11일 | 미국 함대가 광성보를 점령하다 |
1871년 | 신미양요가 일어나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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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632555 | 126.532528 | 미국 함대가 초지진을 점령하였다 |
37.66496 | 126.530074 | 미국 함대가 광성보를 점령하였다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김민수, "신미양요",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김민수, "신미양요",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김민수, "신미양요",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김민수, "신미양요",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김민수, "신미양요",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김민수, "신미양요",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김민수, "신미양요",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김민수, "신미양요",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김민수, "신미양요",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김원모, "신미양요",
『한국민족문화대배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원모, "신미양요",
『한국민족문화대배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원모, "신미양요",
『한국민족문화대배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원모, "신미양요",
『한국민족문화대배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원모, "신미양요",
『한국민족문화대배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민수, "신미양요",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참고문헌
더 읽을거리
- 논문
- 신효승, 「1871년 미군의 강화도 침공과 전황 분석」, 『역사와 경계』, Vol 93, 2014, 31-64쪽.
- 심기재, 「明治 4(1871)年, 辛未洋擾와 明治政策의 대응」, 『한국정책과학학회보』, Vol 3, 1999, 17-2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