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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유는 13세에 상주 삼랑사(三郞寺) 융제(融諦)에게 출가하고, 융제의 지시에 따라 여주 혜목산(慧目山) [[여주 고달사|고달사(高達寺)]]에 가서 [[심희|심희(審希)]]를 스승으로 모셨다.<ref>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04924&cid=50763&categoryId=50784 찬유]", 용어해설,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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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유는 13세에 상주 삼랑사(三郞寺) 융제(融諦)에게 출가하고, 융제의 지시에 따라 여주 혜목산(慧目山) [[여주 고달사|고달사(高達寺)]]에 가서 [[심희|심희(審希)]]를 스승으로 모셨다.<ref>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04924&cid=50763&categoryId=50784 찬유]", 용어해설,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890년([[신라 진성여왕|진성여왕]] 4) 24세에는 삼각산 장의사(莊義寺)에서 [[구족계|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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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살 때 아버님께 여쭙기를, “비록 혜가(惠柯)를 결핍하였으나 다만 각수(覺樹)를 기약하려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 때 아버지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비록 섭동자(葉瞳者)이긴 하나 일찍 너의 선근(善根)을 보았으니, 너는 마땅히 부지런히 배전(培前)의 용맹심으로 승과(勝果)를 닦으라.”하고 당부하였다.
 
|13살 때 아버님께 여쭙기를, “비록 혜가(惠柯)를 결핍하였으나 다만 각수(覺樹)를 기약하려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 때 아버지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비록 섭동자(葉瞳者)이긴 하나 일찍 너의 선근(善根)을 보았으니, 너는 마땅히 부지런히 배전(培前)의 용맹심으로 승과(勝果)를 닦으라.”하고 당부하였다.
대사께서 소원(所願)을 허락받아 삭발하고 출가하여 상주(尙州) 공산(公山) 삼랑사(三郞寺)의 융체선사(融諦禪師)를 스승으로 복승(伏承)하면서 “현현(玄玄)한 도(道)를 논하며 혁혁(赫赫)하게 중생을 교화하고자 하오니, 원컨대 제자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간청하였다. 이때 선사가 이르기를, “너를 대하여 오늘 너의 모습을 보니 후일에 크게 중생을 이익케 할 것 같다. 우리 선종(禪宗)에 ‘심희(審希)’라는 법호를 가진 큰스님이 계시니 참으로 진불(眞佛)이 출세하여 동국(東國)을 교화할 주인이시다. 현재 혜목산(慧目山)에 있으니 너는 마땅히 그곳에 가서 그를 스승으로 섬기면서 불법을 배우도록 하라.”고 이르시니, “나의 소원에 적합(適合)함이여! 그곳에 가서 깨달음을 얻은 후 남을 이롭게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떠나리라.” 하고 문득 혜목산(慧目山)으로 찾아가서 스님으로부터 복응(服膺)을 허락받고 학도(學道)할 마음을 증장(增長)하고 습선(習禪)의 뜻을 배려(倍勵)하였다. 그로부터 얼마되지 않아 묘리(妙理)를 연구하고 깊이 현기(玄機)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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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께서 소원(所願)을 허락받아 삭발하고 출가하여 상주(尙州) 공산(公山) 삼랑사(三郞寺)의 융체선사(融諦禪師)를 스승으로 복승(伏承)하면서 “현현(玄玄)한 도(道)를 논하며 혁혁(赫赫)하게 중생을 교화하고자 하오니, 원컨대 제자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간청하였다. 이때 선사가 이르기를, “너를 대하여 오늘 너의 모습을 보니 후일에 크게 중생을 이익케 할 것 같다. 우리 선종(禪宗)에 ‘심희(審希)’라는 법호를 가진 큰스님이 계시니 참으로 진불(眞佛)이 출세하여 동국(東國)을 교화할 주인이시다. 현재 혜목산(慧目山)에 있으니 너는 마땅히 그곳에 가서 그를 스승으로 섬기면서 불법을 배우도록 하라.”고 이르시니, “나의 소원에 적합(適合)함이여! 그곳에 가서 깨달음을 얻은 후 남을 이롭게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떠나리라.” 하고 문득 혜목산(慧目山)으로 찾아가서 스님으로부터 복응(服膺)을 허락받고 학도(學道)할 마음을 증장(增長)하고 습선(習禪)의 뜻을 배려(倍勵)하였다. 그로부터 얼마되지 않아 묘리(妙理)를 연구하고 깊이 현기(玄機)를 깨달았다. 각로(覺路)를 수행하여 비록 진리를 통달하더라도 마땅히 먼저 율의(律儀)를 의지하여야 가능하다고 생각하여 22세 되던 해에 양주(楊州) 삼각산(三角山) 장의사(莊義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출처=이지관, "여주 고달원 원종대사 혜진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2,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5, 32-33쪽.
 
|출처=이지관, "여주 고달원 원종대사 혜진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2,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5, 32-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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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23일 (수) 17:29 판

찬유(璨幽)
BHST Monk1.png
대표명칭 찬유
한자 璨幽
생몰년 869년(경문왕 9)-958년(광종 9)
시호 원종(元宗)
탑호 혜진(慧眞)
도광(道光)
성씨 김씨(金氏)
출신지 경상남도 하동
승탑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
승탑비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



정의

신라 말 고려 초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원종대사 찬유(元宗大師 璨幽)는 869년(경문왕 9) 계림(鷄林) 하남(河南: 현재의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김씨(金氏)이다. 아버지의 휘는 용(容)인데, 장사현(長沙縣: 현재의 전북 고창)의 현령(縣令)을 지냈다고 한다.[1]

Quote-left.png 대사(大師)의 존칭(尊稱)은 찬유(璨幽)요 자(字)는 도광(道光)이며 속성(俗姓)은 김씨(金氏)이니 계림(鷄林)의 하남(河南) 출신이다. 대대손손(代代孫孫) 명문호족(名門豪族)이었다. 할아버지의 이름은 청규(淸規)이다. 종조(宗祖)를 공경한 효도와 나라에 대한 충성(忠誠) 등 아름다운 행적은 너무 많아서 기록하지 않으니, 특히 불교에 대한 신심(信心)이 돈독하였다. 아버지의 휘(諱)는 용(容)이니 백홍(白虹)의 영기(英氣)와 단혈(丹穴)의 기자(奇姿)를 띠고 태어났다. 노을과 비단처럼 고상(高尙)한 빛을 함유(含有)하였으며, 서리내리는 늦가을 새벽 범종(梵鍾)소리의 아운(雅韻)을 풍겼다. 드디어 출세(出世)하여 창부(倉部)의 낭중(郎中)이 되었다가 얼마 되지 않아서 곧 장사현(長沙縣)의 현령(縣令)이 되어 백리(百里)의 관할 영내(領內)에 행춘(行春)의 덕화(德化)를 베풀었고, 화현(花縣)을 만들어 아름다운 향기(香氣)가 진동하였다. 구중향일(九重向日)하는 일편충심(一片忠心)은 마치 해바라기가 태양을 향해 돌아가는 것과 같았다. 그리하여 조야(朝野)가 모두 그를 기둥처럼 의뢰(依賴)하였고, 지방 향려(鄕閭)에서는 한결같이 우러러 의지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여주 고달원 원종대사 혜진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2,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5, 30-31쪽.


탄생설화

어머니 이씨(李氏)는 꿈에서 신인(神人)을 만나고 대사를 잉태하였다.

Quote-left.png 어머니는 이씨(李氏)이니, 부덕(婦德)을 두루 닦았고 모의(母儀)는 부유(富有)하여 그 우아함이 비길 만한 사람이 없었다. 어느 날 밤 꿈에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고(告)하기를, “원컨대 어머님을 삼아 아들이 되어서 출가(出家)하여 부처님의 제자(弟子)가 되고자 하므로 묘연(妙緣)에 의탁하여 공경히 자비하신 교화(敎化)를 펴려 합니다.”라는 수승한 태몽을 꿈으로 인하여 임신하게 되었다. 삼가 조심함으로써 문왕(文王)과 같은 아들을 출생(出生)하려고 정성껏 태교를 봉행하였다. 부지런히 태교(胎敎)를 닦아 함통(咸通) 10년 용집(龍集) 기축(己丑) 4월 4일에 대사(大師)를 탄생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여주 고달원 원종대사 혜진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2,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5, 31쪽.


출가수행

찬유는 13세에 상주 삼랑사(三郞寺) 융제(融諦)에게 출가하고, 융제의 지시에 따라 여주 혜목산(慧目山) 고달사(高達寺)에 가서 심희(審希)를 스승으로 모셨다.[2] 890년(진성여왕 4) 24세에는 삼각산 장의사(莊義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Quote-left.png 13살 때 아버님께 여쭙기를, “비록 혜가(惠柯)를 결핍하였으나 다만 각수(覺樹)를 기약하려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 때 아버지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비록 섭동자(葉瞳者)이긴 하나 일찍 너의 선근(善根)을 보았으니, 너는 마땅히 부지런히 배전(培前)의 용맹심으로 승과(勝果)를 닦으라.”하고 당부하였다.

대사께서 소원(所願)을 허락받아 삭발하고 출가하여 상주(尙州) 공산(公山) 삼랑사(三郞寺)의 융체선사(融諦禪師)를 스승으로 복승(伏承)하면서 “현현(玄玄)한 도(道)를 논하며 혁혁(赫赫)하게 중생을 교화하고자 하오니, 원컨대 제자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간청하였다. 이때 선사가 이르기를, “너를 대하여 오늘 너의 모습을 보니 후일에 크게 중생을 이익케 할 것 같다. 우리 선종(禪宗)에 ‘심희(審希)’라는 법호를 가진 큰스님이 계시니 참으로 진불(眞佛)이 출세하여 동국(東國)을 교화할 주인이시다. 현재 혜목산(慧目山)에 있으니 너는 마땅히 그곳에 가서 그를 스승으로 섬기면서 불법을 배우도록 하라.”고 이르시니, “나의 소원에 적합(適合)함이여! 그곳에 가서 깨달음을 얻은 후 남을 이롭게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떠나리라.” 하고 문득 혜목산(慧目山)으로 찾아가서 스님으로부터 복응(服膺)을 허락받고 학도(學道)할 마음을 증장(增長)하고 습선(習禪)의 뜻을 배려(倍勵)하였다. 그로부터 얼마되지 않아 묘리(妙理)를 연구하고 깊이 현기(玄機)를 깨달았다. 각로(覺路)를 수행하여 비록 진리를 통달하더라도 마땅히 먼저 율의(律儀)를 의지하여야 가능하다고 생각하여 22세 되던 해에 양주(楊州) 삼각산(三角山) 장의사(莊義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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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여주 고달원 원종대사 혜진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2,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5, 32-33쪽.


구법유학

[3]

활동

입적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임세권, 이우태, "고달원원종대사혜진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한국국학진흥원, 2014, 40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2.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찬유",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3. 김위석, "찬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