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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광해군|광해군]] 시대 북방은 일촉즉발의 긴장이 지속되는 곳이었다. 1608년 9월 21일 장만은 비변사에 북방오랑캐가 가을에 쳐들어올 수 있으니 오랑캐의 정황을 조사하고 방비를 엄격하게 해야 함을 보고하였고, 훗날 청나라 초대황제가 되는 누르하치가 명나라와 틈이 생겨 반드시 침략할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1610년 11월에는 여진족 지역의 산천을 그린 지도를 바치기도 했다. 적의 형세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광해군은 ‘이 지도를 옆에 놔두고 유념해 보도록 하겠다.’면서 현장지휘관 장만의 건의에 화답했다. 1611년 장만은 평안 병사가 되었다. 그는 함경도, 평안도 등 국방의 요충지에서 일선 지휘관으로 계속 활동하였다. 1618년 6월 28일 비변사에서 명나라가 파병요청을 보고하자 광해군은 체찰부사 장만과 도원수 강홍립(姜弘立, 1560~1627)이 군대를 이끌게 하였다. 강홍립은 광해군의 측근에서 통역을 한 인물이었고, 장만은 북방 지역의 근무 경험이 풍부하고 누르하치와 가까운 곳의 지리와 형세를 지도로 작성한 적이 있었으므로 두 명을 적임자라고 판단한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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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만은 광해군 정권 내내 요직을 지냈다. 그러나 광해군이 말년에 궁궐을 조성하기 위해 토목공사를 추진하자 이를 적극 비판하였다. 광해군의 노여움을 받자 장만은 미련 없이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인 통진으로 돌아갔다. 최명길이 쓴 행장(行狀)에서도 “중년에 조강(祖江)의 상류에 집을 짓고서 스스로 ‘이호주인(梨湖主人)’이라고 하였다. 매양 관직에서 물러나면 곧 거기에 나아가 살았다. 비록 임금의 은혜로운 대우에 감격하여 감히 떨치고 돌아가지는 못했지만, 매년 춘추로 휴가를 얻으면, 언제나 배에 노래하는 기생을 싣고서 안개 낀 물결 위를 오르내리며 즐겼다.”고 하여 광해군 정권 말기, 장만이 고향 인근인 조강 쪽으로 들어와 여유로운 생활을 즐겼음을 알 수 있게 한다.<ref>신병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4737&cid=59015&categoryId=59015 장만]", 네이버캐스트,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발행일: 2012년 7월 16일.</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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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23일 (수) 12:27 판
장만(張晩) | |
대표명칭 | 장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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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張晩 |
영문명칭 | Jang Man |
생몰년 | 1566년-1629년 |
본관 | 인동(仁同) |
시호 | 충정(忠定) |
호 | 낙서(洛西) |
자 | 호고(好古) |
시대 | 조선시대 |
국적 | 조선 |
대표저서 | 낙서집(洛西集) |
대표직함 |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 |
부 | 장기정(張麒禎) |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내용
개요
장만의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호고(好古), 호는 낙서(洛西)이다.[1]
이조판서(吏曹判書) 장철견(張哲堅)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인(舍人) 장계문(張季文)이고, 아버지는 군수 장기정(張麒禎)이며, 어머니는 백천 조씨(白川 趙氏)로 조광침(趙光琛)의 딸이다.[2]
업적
국방을 책임지다
1608년 2월 선조가 승하한 후, 광해군이 즉위하였고 정인홍, 이이첨 중심의 북인 정권이 수립되었다. 북인 정권의 수립은 기존에 권력을 잡았던 서인들과 남인들의 정치적 소외를 가져오게 하였지만, 실무관료의 능력, 특히 국방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던 장만의 능력은 광해군 정권에서도 계속 되었다. 장만은 광해군 재위 15년 동안 함경도 관찰사와 체찰부사, 병조판서 등 국방 방어와 관련된 요직을 두루 맡았다. 당시 북방의 여진족이 강성하여 조선 국경에 현실적인 위협이 되고 있어서 능력을 갖춘 국방 전문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광해군 시대 북방은 일촉즉발의 긴장이 지속되는 곳이었다. 1608년 9월 21일 장만은 비변사에 북방오랑캐가 가을에 쳐들어올 수 있으니 오랑캐의 정황을 조사하고 방비를 엄격하게 해야 함을 보고하였고, 훗날 청나라 초대황제가 되는 누르하치가 명나라와 틈이 생겨 반드시 침략할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1610년 11월에는 여진족 지역의 산천을 그린 지도를 바치기도 했다. 적의 형세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광해군은 ‘이 지도를 옆에 놔두고 유념해 보도록 하겠다.’면서 현장지휘관 장만의 건의에 화답했다. 1611년 장만은 평안 병사가 되었다. 그는 함경도, 평안도 등 국방의 요충지에서 일선 지휘관으로 계속 활동하였다. 1618년 6월 28일 비변사에서 명나라가 파병요청을 보고하자 광해군은 체찰부사 장만과 도원수 강홍립(姜弘立, 1560~1627)이 군대를 이끌게 하였다. 강홍립은 광해군의 측근에서 통역을 한 인물이었고, 장만은 북방 지역의 근무 경험이 풍부하고 누르하치와 가까운 곳의 지리와 형세를 지도로 작성한 적이 있었으므로 두 명을 적임자라고 판단한 것이다.
장만은 광해군 정권 내내 요직을 지냈다. 그러나 광해군이 말년에 궁궐을 조성하기 위해 토목공사를 추진하자 이를 적극 비판하였다. 광해군의 노여움을 받자 장만은 미련 없이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인 통진으로 돌아갔다. 최명길이 쓴 행장(行狀)에서도 “중년에 조강(祖江)의 상류에 집을 짓고서 스스로 ‘이호주인(梨湖主人)’이라고 하였다. 매양 관직에서 물러나면 곧 거기에 나아가 살았다. 비록 임금의 은혜로운 대우에 감격하여 감히 떨치고 돌아가지는 못했지만, 매년 춘추로 휴가를 얻으면, 언제나 배에 노래하는 기생을 싣고서 안개 낀 물결 위를 오르내리며 즐겼다.”고 하여 광해군 정권 말기, 장만이 고향 인근인 조강 쪽으로 들어와 여유로운 생활을 즐겼음을 알 수 있게 한다.[3]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장기정 | 장만 | A는 B의 어버이이다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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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 ↑ 이장희, "장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장희, "장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신병주, "장만", 네이버캐스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발행일: 2012년 7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