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비로사 진공대사 보법탑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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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 형태는 [[귀부|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산(山)모양의 머릿돌을 얹은 모습인데, 비몸이 갈라져 일부가 파손되었다. 거북받침은 새겨진 조각이 얕아 둔해 보이며 등 중앙에 비를 꽂는 네모난 홈을 마련해 두었다. [[이수|머릿돌]]은 구름과 용무늬를 새겨 놓았는데, 화려하긴 하나 깊이 새긴 것은 아니다. | 비의 형태는 [[귀부|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산(山)모양의 머릿돌을 얹은 모습인데, 비몸이 갈라져 일부가 파손되었다. 거북받침은 새겨진 조각이 얕아 둔해 보이며 등 중앙에 비를 꽂는 네모난 홈을 마련해 두었다. [[이수|머릿돌]]은 구름과 용무늬를 새겨 놓았는데, 화려하긴 하나 깊이 새긴 것은 아니다. | ||
− | 939년([[고려 태조|태조]] 22)에 세운 비로, 비문은 [[최언위|최인연(崔仁渷)]]이 짓고, [[이환추|이환추(李桓樞)]]가 글씨를 썼다.<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21,00040000,37 비로사진공대사보법탑비]", 문화재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정보』<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ref> | + | 939년([[고려 태조|태조]] 22)에 세운 비로, 비문은 [[최언위|최인연(崔仁渷)]]이 짓고, 글씨는 자경 2㎝의 구양순체(歐陽詢體) [[해서]]로 [[이환추|이환추(李桓樞)]]가 글씨를 썼다.<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21,00040000,37 비로사진공대사보법탑비]", 문화재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정보』<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ref> |
− | + | 비의 뒷면에는 [[진공]]의 유계를 새겼는데 역시 구양순체의 해서이다. 이수(螭首) 가운데의 ‘故眞空大師碑(고진공대사비)’라는 전액도 이환추가 썼다. | |
− | + | 그런데 비문 가운데 보이는 ‘청구(靑丘)’라는 구절은 조선의 별칭으로서, 이 비에서 가장 먼저 나타나고 있음이 주목된다. 귀부(龜趺)는 조각수법이 둔중하고 새김이 얕으며 등에는 낮은 비좌(碑座)가 있고, 이수는 산모양으로 도식화된 운룡문(雲龍文)이 얕게 새겨져 있다.[민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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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의 내용은 대사의 탄생과 출가 그리고 순례행과 태조를 만난 인연 등을 중심으로 기술하였다. 특이하게 음기를 대사의 유계(遺誡)를 상세하게 기술하여 후학들의 경계로 삼은 데서 고려초 선사들의 의식과 사제관계 및 교단의 면모를 살필 수 있다.[금석문] | 비문의 내용은 대사의 탄생과 출가 그리고 순례행과 태조를 만난 인연 등을 중심으로 기술하였다. 특이하게 음기를 대사의 유계(遺誡)를 상세하게 기술하여 후학들의 경계로 삼은 데서 고려초 선사들의 의식과 사제관계 및 교단의 면모를 살필 수 있다.[금석문] |
2017년 8월 22일 (화) 00:56 판
영주 비로사 진공대사 보법탑비 (榮州 毘盧寺 眞空大師 普法塔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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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영주 비로사 진공대사 보법탑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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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榮州 毘盧寺 眞空大師 普法塔碑 |
주소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삼가리 391 |
문화재 지정번호 | 경상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4호 |
문화재 지정일 | 1972년 12월 29일 |
찬자 | 최인연(崔仁渷) |
서자 | 이환추(李桓樞) |
각자 | 최환규(崔煥規) |
서체 | 해서(楷書) |
건립연대 | 93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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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비로사(毘盧寺)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진공대사(眞空大師, 855-937)의 탑비.
내용
개요
이 비는 높이 173㎝, 너비 102㎝, 두께 22㎝이며,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호로 비로사(毘盧寺) 안에 있는 진공대사(眞空大師)의 탑비이다. 진공대사는 가야산 선융(善融)의 제자가 되어 소백산에 절을 짓고 주지로 있다가, 937년(태조 20)에 입적하였다. 태조는 시호를 ‘진공대사(眞空大師)’라 하고, ‘보법(普法)’이라는 탑이름을 내리었다.
비의 형태는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산(山)모양의 머릿돌을 얹은 모습인데, 비몸이 갈라져 일부가 파손되었다. 거북받침은 새겨진 조각이 얕아 둔해 보이며 등 중앙에 비를 꽂는 네모난 홈을 마련해 두었다. 머릿돌은 구름과 용무늬를 새겨 놓았는데, 화려하긴 하나 깊이 새긴 것은 아니다.
939년(태조 22)에 세운 비로, 비문은 최인연(崔仁渷)이 짓고, 글씨는 자경 2㎝의 구양순체(歐陽詢體) 해서로 이환추(李桓樞)가 글씨를 썼다.[1]
비의 뒷면에는 진공의 유계를 새겼는데 역시 구양순체의 해서이다. 이수(螭首) 가운데의 ‘故眞空大師碑(고진공대사비)’라는 전액도 이환추가 썼다.
그런데 비문 가운데 보이는 ‘청구(靑丘)’라는 구절은 조선의 별칭으로서, 이 비에서 가장 먼저 나타나고 있음이 주목된다. 귀부(龜趺)는 조각수법이 둔중하고 새김이 얕으며 등에는 낮은 비좌(碑座)가 있고, 이수는 산모양으로 도식화된 운룡문(雲龍文)이 얕게 새겨져 있다.[민백]
비문
비문의 내용은 대사의 탄생과 출가 그리고 순례행과 태조를 만난 인연 등을 중심으로 기술하였다. 특이하게 음기를 대사의 유계(遺誡)를 상세하게 기술하여 후학들의 경계로 삼은 데서 고려초 선사들의 의식과 사제관계 및 교단의 면모를 살필 수 있다.[금석문]
해체·보수
비문 보러가기 |
• 임세권, 『한국금석문집성 18: 고려2 비문2』, 한국국학진흥원, 2014.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8: 고려2 비문2", |
• "비로사진공대사보법탑비", 금석문세부정보, |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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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비로사 진공대사 보법탑비 | 보령 성주사지 | A는 B에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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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 ↑ "비로사진공대사보법탑비",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