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종"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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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59년 오월(吳越)에 유학하여 영명사(永明寺)의 연수(延壽) 문하에서 2년 동안 수학하여 연수로부터 심인(心印)을 전해 받았다. 961-968년까지의 7년 동안 국청사(國淸寺)의 정광(淨光)으로부터 『대정혜론(大定慧論)』을 배워 천태교(天台敎)를 전수받았다. 귀국 직전의 2년 동안 전교원(傳敎院)에서 『대정혜론』과 『법화경』 등을 강의하여 명성을 떨쳤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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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느 덧 오월국(吳越國)에 도착하여 먼저 영명사(永明寺) 연수선사(延壽禪師)를 친견하니, 연수선사가 묻기를, “법(法)을 구하러 왔는가, 일을 보러 왔는가?”하고 물었다. 스님께서 대답하기를, “법(法)을 구하러 왔습니다.”하니 연수스님이 말하기를, “법(法)은 본래 둘이 없어서 모래 수와 같이 많은 세계에 두루하거늘 어찌 수고로움을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 여기까지 왔는가?” 스님이 대답하기를, “이미 모래 수와 같이 많은 세계에 가득하다면 여기까지 찾아온들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 하였다. | ||
+ | 이 때 연수스님은 반가워하는 마음으로 눈을 크게 뜨고 마치 황두(黃頭)를 만난 것과 같이 우대하였다. 연수는 계주(髻珠)를 풀어 신인(心印)과 함께 전해 주었다. 친근함을 허락받은 후 부지런히 번뇌를 대치함에 때때로 닦아 제호(醍醐)를 배불리 마신 다음에는 다시 다른 음식은 먹지 않았고, 날마다 오직 담복향(薝蔔香)만 맡을 뿐 다른 잡된 향내는 맡지 아니하였으며, 묵묵히 현동(玄同)한 이치를 알아 그 깊은 진리를 일조(一朝)에 확찰대오(廓徹大悟)하였다. | ||
+ | 준풍(峻豊) 2년에 다음 목적지를 향해 가다가 국청사(國淸寺)에 이르러 지성으로 정광대사(淨光大師)를 친견하였는데, 정광스님 역시 연탑(連榻)에 내려와 반가이 맞이하였다. 정광은 자주 법회를 주도하므로 매우 바쁜 실정이었다. 그리하여 스님으로 하여금 우리나라 불교를 그 곳에 전하고자 건의하는 편지를 왕에게 올리고 허락을 빌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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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보(開寶) 원년 연말에 승통(僧統)이며 내도량(內道場)의 공덕사(功德事)를 맡은 찬영(贊寧) 스님과 천태현재(天台縣宰)인 임식(任埴) 등은 스님의 정미롭게 연마한 지혜의 칼날이 예리하여 족히 용(龍)을 도살할 만하며 민첩하게 현기(玄機)를 발명하여 이미 중곡(中鵠)의 이치를 감당할 수 있음을 알아 모두가 이구동음(異口同音)으로 높은 산처럼 숭앙하여 의적(義寂)이 그의 사가(私家)를 희사하여 절을 만든 전교원(傳敎院)으로 초청하여 대정혜론(大定慧論)과 법화경(法華經)을 강설하게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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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얼마 후 꿈을 꾸었는데, 본국(本國)에 보탑(寶塔)이 공중에 높이 솟아 있어 밧줄에 매달려 당기는 대로 부앙(俯仰)하였다. 또 증진대사(證眞大師)가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너는 능히 소기(所期)의 목적을 성취하였거늘 어찌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움직임에 있어서는 인연을 따라 순리대로 살아가고 부도덕하게 생활하여 냄새나는 오명(惡名)을 남기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도록 하라. 만약 식미(式微)의 경계를 깨달았으면 곧 불계(不係)의 길을 돌이키도록 하라.”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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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 및) 활동=== | ===(귀국 및) 활동=== |
2017년 8월 21일 (월) 16:20 판
지종(智宗) | |
대표명칭 | 지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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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智宗 |
생몰년 | 930년(태조 13)-1018년(현종 9) |
시호 | 원공(圓空) |
호 | 혜월(慧月) |
법호 | 적연(寂然) |
탑호 | 승묘(勝妙) |
자 | 신칙(神則) |
성씨 | 이씨(李氏) |
본관 | 전주(全州) |
승탑 |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 |
승탑비 |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 |
목차
정의
고려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출가수행
937년(태조 20) 개경의 사나사(舍那寺)에 머물고 있던 인도 승려 홍범삼장(弘梵三藏)에게서 머리를 깎았다. 홍범삼장이 그 해에 인도로 돌아가자 광화사(廣化寺)의 경철(景哲)에게 수업하였고, 946년(정종 1)영통사(靈通寺)의 관단(官壇)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953년(광종 4) 희양산(熙陽山)의 형초선사(逈超禪師)를 만나 환대를 받았고, 954년 승과(僧科)에 합격하였으며,
구법유학
959년 오월(吳越)에 유학하여 영명사(永明寺)의 연수(延壽) 문하에서 2년 동안 수학하여 연수로부터 심인(心印)을 전해 받았다. 961-968년까지의 7년 동안 국청사(國淸寺)의 정광(淨光)으로부터 『대정혜론(大定慧論)』을 배워 천태교(天台敎)를 전수받았다. 귀국 직전의 2년 동안 전교원(傳敎院)에서 『대정혜론』과 『법화경』 등을 강의하여 명성을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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