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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고』는 한반도 사방의 물길인 압록강·두만강과 동·서·남해의 연안교통로에 대하여 정리한 글이다. 『산수고』 는 전국의 산과 강을 각각 12산과 12수로 분류하여 이해한 저술로 『산경표(山經表)』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ref>이유진,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49 신경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사연고』는 한반도 사방의 물길인 압록강·두만강과 동·서·남해의 연안교통로에 대하여 정리한 글이다. 『산수고』 는 전국의 산과 강을 각각 12산과 12수로 분류하여 이해한 저술로 『산경표(山經表)』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ref>이유진,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49 신경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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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훈민정음도해』은 송학(宋學)의 시조의 한 사람이라는 소옹(邵雍)의 ≪황극경세성음도 皇極經世聲音圖≫(正聲正音圖라고도 함.)를 본보기로 하여 일종의 운도(韻圖)를 만들려고 전개한 이론인데, 훈민정음 창제 이후 가장 깊이 문자론(文字論)을 전개한 학술적인 업적이었다.<ref>강신항,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629 신경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2017년 8월 21일 (월) 16:05 판
신경준(申景濬) | |
대표명칭 | 신경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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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申景濬 |
생몰년 | 1712-1781 |
본관 | 고령(高靈) |
호 | 여암(旅菴) |
자 | 순민(舜民) |
배우자 | 이광집(李光潗)의 딸 |
부 | 신내(申淶) |
모 | 이의홍(李儀鴻)의 딸 |
자녀 | 신재권(申在權), 신두권(申斗權), 이호연(李浩淵)의 처, 윤치정(尹致鼎)의 처 |
유형 | 문신 |
정의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은 조선의 학자이자 문신이다.
내용
생애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은 1712년 (숙종 38) 4월 15일 전라도 순창의 남산에서 태어났다. 신경준의 가문은 순창의 명문가인 고령 신씨로, 신숙주(申叔舟)의 동생인 신말주(申末舟)가 그의 직계 10대조이다. 아버지는 신뢰(申洡), 어머니는 한산 이씨로 진사 이의홍(李儀鴻)의 딸이다. 신경준은 총 세 번 결혼하여 2남 3녀를 두었다. 첫째 부인은 광주 이씨로 이형만(李亨晩)의 딸이었는데, 그 사이에서는 후사를 보지 못하였다. 두 번째 부인은 강릉 최씨로 최돈오(崔惇五)의 딸이었으며, 둘 사이에 이영갑(李永甲)에게 시집간 딸 하나를 두었다. 세 번째 부인은 평창 이씨로 이광집(李光潗)의 딸이었으며 슬하에 장남 신재권(申在權)과 차남 신두권(申斗權), 그리고 이호연(李浩淵), 윤치정(尹致鼎)에게 시집간 딸 둘을 두었다. 그의 아들이나 사위들이 출사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1]
긴 은거생활
신경준은 45세 전까지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채 고향인 순천, 서울, 경기도 소사, 충청도 직산, 등으로 여러 차례 거처를 옮겼다. 이 기간동안 그가 성취한 학문의 대략이 완성되었던 것으로 평가되며, 그 결과물은 『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나 『강계고(疆界考)』 등의 적극적인 저술활동으로 나타났다. 중년 이후로는 관로도 트이기 시작했다.[2]
관직활동
신경준은 43세가 되던 1754년(영조 30) 지역 향시에 응시하였고, 뒤이어 여름에는 회시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1755년(영조 31) 신경준은 승정원의 대리 임시직인 가주서(假注書)로 벼슬생활을 시작하였고,1759년(영조 35)에는 예조와 병조의 좌랑에 임명되었고, 이어 사간원 정언, 사헌부 장령 등의 직을 맡게 되었다. 이후 우부승지,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 또한 충청도사, 장연현감, 북청부사, 순천부사, 제주목사 등의 외직을 맡기도 하였다. 1781년(정조 5) 70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전까지 20여 년간 조정의 여러 직책을 두루 역임하였다. 또한 영의정 홍봉한의 추천을 받아 영조 대의 대규모 편찬사업에 참여하기도 하였다.[3]
사상과 학문
시대적 배경
조선 후기에는 실사구시와 이용후생의 학문적 바람이 일어났다. 지식인들은 최대한 많은 과거의 기록에 준거하여 어떠한 지식이 옳은 것인지 증명하려 들었고, 또한 실생활에서 편리함을 제공하여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지식들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가운데서 조선인들이 살고 있던 실질적인 삶의 터전인 ‘조선’의 것 자체에 대한 관심도 고조되었다. 그 결과 조선의 역사, 지리, 언문 등에 대한 다양한 저작들이 등장하였으며, 다양한 지도와 지리지가 제작되었다.[4]
신경준의 학문관과 저술
이러한 시대적 배경 하에서 신경준은 다양한 관심사를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였다. 지리와 관련된 저술로는 『 도로고(道路考)』와 『산수고(山水考)』, 『사연고(四沿考)』, 『 가람고(伽藍考)』 언어학에 대한 저술로는 『훈민정음언해』 등을 들 수 있다.[5]
- 『도로고』
『도로고』는 전국 각 지역의 도로에 대하여 알려진 정보가 실제로 정확하지 않아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하여 쓴 저술로, 능행로, 전국의 주요 도로와 각지의 주요 시설까지의 거리는 물론 역로, 해로 등 전국의 도로망을 총망라한 정보를 담고 있다.[6]
- 『사연고』
『사연고』는 한반도 사방의 물길인 압록강·두만강과 동·서·남해의 연안교통로에 대하여 정리한 글이다. 『산수고』 는 전국의 산과 강을 각각 12산과 12수로 분류하여 이해한 저술로 『산경표(山經表)』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7]
『훈민정음도해』은 송학(宋學)의 시조의 한 사람이라는 소옹(邵雍)의 ≪황극경세성음도 皇極經世聲音圖≫(正聲正音圖라고도 함.)를 본보기로 하여 일종의 운도(韻圖)를 만들려고 전개한 이론인데, 훈민정음 창제 이후 가장 깊이 문자론(文字論)을 전개한 학술적인 업적이었다.[8]- ↑ 이유진, "신경준",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이유진, "신경준",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이유진, "신경준",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이유진, "신경준",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이유진, "신경준",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이유진, "신경준",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이유진, "신경준",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강신항, "신경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