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환국"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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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출처=이정민,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09 기사환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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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환국]]의 정치적 배경=== | ||
+ | [[인조반정|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붕당간의 견제를 유지하며 왕권을 안정시켜왔던 [[서인]]과 [[남인]]은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붕당정치 운영과정에서 첨예한 대립을 보여 왔다. 대표적인 경우가 [[예송논쟁|예송(禮訟)]]이다. [[조선 현종|현종]] 즉위 초의 1659년(현종 1) 1차 [[예송논쟁]]은 [[조선 효종|효종]]의 사망 이후 [[조선 효종|효종]]에 대한 [[장렬왕후|장렬왕후(莊烈王后)]]의 복상문제가 화두가 된 것으로 [[허목|허목(許穆)]], [[윤휴|윤휴(尹鑴)]], [[윤선도|윤선도(尹善道)]] 등 [[남인]]은 3년상을, [[송시열|[[송시열]](宋時烈)]], [[송준길|송준길(宋浚吉)]]의 [[서인]]은 1년상을 주장함으로써 서로간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조선 현종|현종]]은 [[서인]]의 주장을 채택함으로써 [[남인]]은 실각하여 [[허적|허적(許積)]]을 비롯한 소수의 [[남인]]만이 참여하는 속에서 [[서인]]의 우세가 지속되었다. 1674년(현종 15)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인선왕후(仁宣王后)]]의 사망을 계기로 [[예송논쟁]]이 다시 일어났는데, [[송시열]] 등 [[서인]]은 [[조선 효종|효종]]의 어머니인 [[자의대비]]가 입어야 할 상복을 9개월로 주장했고, [[허목]] 등 [[남인]]은 1년 상복을 주장했다. 이 [[예송논쟁]]에서는 [[조선 현종|현종]]이 [[남인]]의 주장을 채택함으로써 [[남인]]이 정계에 대거 진출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예송논쟁]]에서 드러나듯이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표면화되자, [[조선 숙종|숙종(肅宗)]]은 강력한 왕권을 추구의 의지를 보였다. [[조선 숙종|숙종]]은 자신의 왕권 안정을 위해 지금까지의 당파연립 방식을 버리고, 붕당을 자주 교체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를 ‘환국’이라 하는데, 환국정치의 운영은 말하자면 군주가 내각을 자주 교체하여 신하들의 충성심을 경쟁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 방법이었다. [[조선 숙종|숙종]] 초반은 2차 [[예송논쟁]]의 승리로 [[남인]]이 주도권을 잡던 시기였는데, 이에 대해 [[서인]]은 [[남인]]의 정적으로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조선 숙종|숙종]] 역시 [[남인]]의 집권이 계속되는 것에 대해서 경계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환국의 형태로 드러났는데, [[경신환국|경신환국(庚申換局)]], [[기사환국]], [[갑술환국|갑술환국(甲戌換局)]]이 그것이며, 그 주도 세력 역시 [[서인]]-[[남인]]-[[서인]]으로 변화되었다.<ref>이정민,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09 기사환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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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환국]]의 전주곡, [[경신환국]]과 [[남인]]의 축출=== | ||
+ | [[경신환국]]은 탁남의 대표인 [[허적]]을 중심으로 한 [[남인]]이 권력을 주도하는 것에 대해 위기감을 느낀 [[서인]]계열이 [[남인]]을 축출하기 위해 역모사건의 주동자로 [[허적]]의 아들인 [[허견|허견(許堅)]]을 지목하였다. 급기야 1680년 (숙종 5) [[김석주|김석주(金錫胄)]]의 밀객인 [[정원로|정원로(鄭元老)]]는 [[허견]]과 [[복선군|복선군(福善君)]]을 역모사건으로 고변하였다. 국문 결과 복선군과 [[허견]]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였고, 이어 사건의 전모가 밝혀졌다. [[조선 숙종|숙종]]은 [[허견]]은 [[군기시|군기시(軍器寺)]] 앞길에서 능지처사(凌遲處死)하고 [[복선군]]은 종실의 예우를 갖추어 교수형(絞首刑)에 처한다고 발표하였다. [[허적]]은 역모에 특별히 관련된 흔적은 없었지만 [[허견]]의 부친으로써 아들의 일에 대해 역모를 막지 못한 것에 대한 비판은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예조참의 [[유창|유창(兪瑒)]]은 [[허적]]이 [[허견]]의 역모에 연관성이 있다는 뜻을 피력하였고 결국 [[조선 숙종|숙종]]은 [[허적]]의 사사를 명하였다. [[남인]]의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윤휴|윤휴(尹鑴)]] 역시 처형을 당하였으며 이 옥사가 완전히 마무리되는 5월까지 종친 세력과 연결된 100여 명이 넘는 [[남인]]은 갖가지 죄목으로 처벌되었다. 왕권 강화의 의지를 지니고 있던 [[조선 숙종|숙종]]의 결단으로 [[남인]]에서 [[서인]]으로 다시 정국이 뒤바뀌는 환국이 진행된 셈이었다. [[서인]]정국으로의 변화와 함께 [[조선 숙종|숙종]]은 [[서인]]계열 [[김석주]]를 원훈으로 삼아 공신 책봉을 단행하였다. 1681년(숙종 7)에는 50여년에 걸친 [[서인]]의 숙원사업인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이 사건으로 [[남인]]은 상당수 축출되었지만, [[희빈 장씨|장희빈(張禧嬪)]]의 존재가 서서히 부각되고 실세한 [[남인]]이 왕실과 연계를 맺게 되면서부터 변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였다.<ref>이정민,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09 기사환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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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환국]]의 단행, [[서인]]의 몰락과 [[남인]]의 재등장=== | ||
+ | ====[[희빈 장씨]] 숙원에 책봉되다==== | ||
+ | [[조선 숙종|숙종]]은 즉위한 뒤 [[김만기|김만기(金萬基)]]의 딸인 [[인경왕후|인경왕후(仁敬王后)]]를 왕비로 맞았지만, 1680년(숙종 7) 10월에 사망하자, 1681년(숙종 8) [[민유중|민유중(閔維重)]]의 딸인 [[인현왕후|인현왕후(仁顯王后)]]와 혼례를 치르고, 계비로 삼았다. 그러나 이 무렵 즈음 [[조선 숙종|숙종]]은 궁중 나인이었던 [[희빈 장씨|장씨]]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이를 눈치 챈 대비 [[명성왕후|명성왕후(明聖王后)]]는 [[희빈 장씨|장씨]]를 궁 밖으로 쫒아냈지만 [[명성왕후]]가 사망한 뒤, 다시 궁중으로 돌아왔으며 [[조선 숙종|숙종]]의 총애를 바탕으로 교만하고 방자하게 굴었다. 급기야 1686년([[조선 숙종|숙종]] 12)에는 [[희빈 장씨|장씨]]를 숙원(淑媛)으로 책봉하였다.<ref>이정민,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09 기사환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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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희빈 장씨]]의 출신배경과 [[조선 숙종|숙종]]의 총애==== | ||
+ | [[조선 숙종|숙종]]의 비인 [[인경왕후]], [[인현왕후]]는 모두 [[서인]] 노론계열 출신이었다. 그에 반해 [[희빈 장씨|장희빈]]의 가계는 [[남인]]과 연루되어있었다. [[희빈 장씨|장씨]]의 종숙부인 [[장현|장현(張炫)]]은 역관 출신으로 당대 재력가였다. 그는 [[경신환국]] 당시 [[복창군|복창군(福昌君)]]과 [[복선군]] 옥사에 연루되었던 혐의를 받고 유배를 간 경력이 있었다. 이처럼 [[희빈 장씨|장희빈]]은 [[남인]] 계열과 관련이 있었고, 이러한 [[희빈 장씨|장희빈]]의 존재는 [[서인]]계열에게는 위기로 다가왔다. 그러던 중 5년이 넘도록 후사를 보지 못하였던 [[인현왕후]] 대신 1688년(숙종 14) 10월 27일 [[희빈 장씨|장씨]]가 왕자를 낳았다.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던 [[서인]]계의 불안은 [[조선 숙종|숙종]]의 뒤이은 조치로 더욱 증폭되었다. 왕자가 출생한지 채 석달도 되지 않은 시점에 왕자를 원자로 정하고자 한 것이 그것이었다. [[조선 숙종|숙종]]의 뜻밖의 발언에 대해 신료들은 [[인현왕후|중궁]]에게서 별 소식이 없다면 국본이 자연스럽게 정해질 것이니 서두르지 말고 몇 년을 기다릴 것을 청하였지만, [[조선 숙종|숙종]]은 세자가 정해지지 않으면 민심이 안정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대신들의 논의를 일축하였다. 그리고 5일 만에 왕자의 정호를 종묘사직에 고하고 [[희빈 장씨|장씨]]를 ‘희빈(禧嬪)’으로 승격하였다.<ref>이정민,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09 기사환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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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시열]]의 상소와 [[서인]]의 몰락==== | ||
+ | 그해 2월 1일 [[송시열]]이 국왕에게 올린 소는 정계에 큰 파란을 일으키게 된다. [[송시열]]은 후궁에게 왕자의 경사가 생긴 것은 매우 기쁜 일이지만, 원자로 정하는 것이 너무 이르다는 견해도 무시할 수 없다는 뜻을 피력하였다. [[송시열]]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송나라 때의 일화를 언급하였다. 그가 주장하기를 [[철종|철종(哲宗)]]은 10살인데도, 번왕(藩王)의 지위에 있다가 [[신종|신종(神宗)]]이 병이 들자 비로소 책봉하여 태자(太子)로 삼았다고 언급하면서 왕자의 원자 칭호를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뜻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조선 숙종|숙종]]은 대명 황제는 황자를 낳은 지 4달 만에 봉호한 일이 있음을 언급하면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있다면 명나라의 예를 들어 국본을 일찍이 세우기를 청했어야 하는데, [[송시열]]의 소장은 불만이 가득하다고 분노하였다.[[조선 숙종|숙종]]은 승지 [[이현기|이현기(李玄紀)]] [[윤빈|윤빈(尹彬)]], 교리 [[남치훈|남치훈(南致熏)]], [[이익수|이익수(李益壽)]] 등과 의논하여 [[송시열]]의 관작을 삭탈하여 외지로 출송시켰다. 이어 [[조선 숙종|숙종]]과 [[남인]]들은 영의정 [[김수흥]]을 파직시켰고, [[권대운|권대운(權大運)]] [[목내선|목내선(睦來善)]], [[김덕원|김덕원(金德遠)]] 등 [[남인]]계 인사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윤휴]]를 비롯하여 [[경신환국]]에서 화를 당한 많은 사람들이 신원되었다. [[희빈 장씨|장희빈]]의 증조, 조부, 부친 모두 의정(議政)을 부여 받았으며, [[희빈 장씨|장희빈]]의 부친인 [[장형]]에게는 1689년(숙종 15)에 옥산부원군(玉山府院君)의 칭호가 주어졌다.<ref>이정민,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09 기사환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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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속되는 [[서인]]의 시련==== | ||
+ | [[조선 숙종|숙종]]은 이 외에도 [[서인]]에 대해 가혹한 응징의 조처를 단행하였다. 그 첫 번째는 [[이이]]와 [[성혼]]의 문묘 출향이었다. [[조선 숙종|숙종]]은 두 신하를 종향하자는 논의는 50년간 지속되었지만 [[조선 현종|선왕]]도 윤허하지 않았고, 선비의 국론이 정하여지지 않아 무고가 많고, 모욕하며 투기하고 이간하는 계책이 많아 국가가 혼란스러운데, 단지 한때의 숭상하는 것만을 쫒아서 하였던 것은 진정한 덕이 아니니, 출향하겠다는 뜻을 보였다. 두 번째는 [[기사환국]]이 단행된 지 4개월 만에 [[서인]]계 왕비인 [[인현왕후|인현왕후 민씨]]를 서인으로 폐출한 것이었다. [[조선 숙종|숙종]]은 성종대 [[폐비 윤씨]]의 투기가 드러나자 [[조선 성종|성종]]이 종사를 위해 폐출을 단행하였던 사례를 들며 [[인현왕후|민씨]]는 [[폐비 윤씨|윤씨]]보다 더하므로 폐서인 시키고, 부모의 봉작을 빼앗는 일 등을 즉시 거행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대해 [[서인]] 노론측은 [[오두인|오두인(吳斗寅)]] 등 86인의 이름으로 이를 저지하고자 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오두인]]을 비롯하여 [[박태보|박태보(朴泰輔)]]· [[이세화|이세화(李世華)]] 등은 국문당하여 위리안치 되거나 귀양을 갔으며 [[오두인]]과 [[박태보]]는 국문 끝에 사망하기도 하였다. 결국 [[조선 숙종|숙종]]은 폐비 문제를 주관대로 처리하였고, 1690년(숙종 16) 10월 22일 원자가 세자가 되면서 [[희빈 장씨|장씨]]는 희빈에서 왕비로 승격시켰다. 세 번째 [[송시열]]의 사형이었다. 당시 예조판서 [[민암]], [[권대운]] 등 [[남인]]은 [[송시열]]을 문외 출송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그의 사형을 적극적으로 촉구하였다. 그 결과 [[조선 숙종|숙종]]은 같은 해 6월 [[조선 숙종|숙종]]은 [[송시열]]에게 사사의 명령을 내렸다. [[송시열]]은 제주에서 돌아오는데, [[인현왕후|중전]]을 폐한 것과 [[오두인]]과 [[박태보]]가 간하다가 죽은 것을 듣고는 먹지 않고, 정읍현(井邑縣)에 이르러 사사(賜死)의 명을 받았다. <ref>이정민,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09 기사환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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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갑술환국]]과 [[남인]]의 몰락 [[서인]] 다시 재집권하다=== | ||
+ | [[조선 숙종|숙종]]은 기사환국 이후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고자 노력하였으며, [[남인]]들 역시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집권함은 물론 [[서인]]에게 보복하는 기회로 삼았다. [[조선 숙종|숙종]]은 원자정호 등의 일시적 의도는 실현하였지만 이런 과정에서 한 당파인 [[남인]]의 전권을 독점시켰기 때문에, 이를 조정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조처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5년 뒤 [[갑술환국]]이 일어나 [[남인]]은 몰락하고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된다.<ref>이정민,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09 기사환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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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참고문헌'''== | ||
+ | ===더 읽을 거리=== | ||
+ | *논문 | ||
+ | **박광용, 「숙종대 기사환국에 대한 검토<당론서 기록에 대한 비교 분석을 중심으로>」, 『東洋學』, Vol 17, 1999, 137-158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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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용한 정보=== | ||
+ | 이정민,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09 기사환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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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사건]] | ||
+ | [[분류:이창섭]] |
2017년 8월 21일 (월) 02:50 판
기사환국(己巳換局) | |
대표명칭 | 기사환국 |
---|---|
한자표기 | 己巳換局 |
유형 | 사건 |
시대 | 조선시대 |
날짜 | 1689년 |
관련인물 | 후궁장씨(장희빈) 인현왕후 |
관련단체 | 서인, 남인 |
목차
정의
1689년(숙종 15) 후궁 소의장씨(昭儀張氏) 소생을 원자로 정호(定號)하는 문제를 계기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장악한 정국(政局).
내용
기사환국의 정치적 배경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붕당간의 견제를 유지하며 왕권을 안정시켜왔던 서인과 남인은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붕당정치 운영과정에서 첨예한 대립을 보여 왔다. 대표적인 경우가 예송(禮訟)이다. 현종 즉위 초의 1659년(현종 1) 1차 예송논쟁은 효종의 사망 이후 효종에 대한 장렬왕후(莊烈王后)의 복상문제가 화두가 된 것으로 허목(許穆), 윤휴(尹鑴), 윤선도(尹善道) 등 남인은 3년상을, [[송시열|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의 서인은 1년상을 주장함으로써 서로간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현종은 서인의 주장을 채택함으로써 남인은 실각하여 허적(許積)을 비롯한 소수의 남인만이 참여하는 속에서 서인의 우세가 지속되었다. 1674년(현종 15)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사망을 계기로 예송논쟁이 다시 일어났는데, 송시열 등 서인은 효종의 어머니인 자의대비가 입어야 할 상복을 9개월로 주장했고, 허목 등 남인은 1년 상복을 주장했다. 이 예송논쟁에서는 현종이 남인의 주장을 채택함으로써 남인이 정계에 대거 진출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예송논쟁에서 드러나듯이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표면화되자, 숙종(肅宗)은 강력한 왕권을 추구의 의지를 보였다. 숙종은 자신의 왕권 안정을 위해 지금까지의 당파연립 방식을 버리고, 붕당을 자주 교체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를 ‘환국’이라 하는데, 환국정치의 운영은 말하자면 군주가 내각을 자주 교체하여 신하들의 충성심을 경쟁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 방법이었다. 숙종 초반은 2차 예송논쟁의 승리로 남인이 주도권을 잡던 시기였는데, 이에 대해 서인은 남인의 정적으로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숙종 역시 남인의 집권이 계속되는 것에 대해서 경계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환국의 형태로 드러났는데, 경신환국(庚申換局), 기사환국, 갑술환국(甲戌換局)이 그것이며, 그 주도 세력 역시 서인-남인-서인으로 변화되었다.[1]
기사환국의 전주곡, 경신환국과 남인의 축출
경신환국은 탁남의 대표인 허적을 중심으로 한 남인이 권력을 주도하는 것에 대해 위기감을 느낀 서인계열이 남인을 축출하기 위해 역모사건의 주동자로 허적의 아들인 허견(許堅)을 지목하였다. 급기야 1680년 (숙종 5) 김석주(金錫胄)의 밀객인 정원로(鄭元老)는 허견과 복선군(福善君)을 역모사건으로 고변하였다. 국문 결과 복선군과 허견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였고, 이어 사건의 전모가 밝혀졌다. 숙종은 허견은 군기시(軍器寺) 앞길에서 능지처사(凌遲處死)하고 복선군은 종실의 예우를 갖추어 교수형(絞首刑)에 처한다고 발표하였다. 허적은 역모에 특별히 관련된 흔적은 없었지만 허견의 부친으로써 아들의 일에 대해 역모를 막지 못한 것에 대한 비판은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예조참의 유창(兪瑒)은 허적이 허견의 역모에 연관성이 있다는 뜻을 피력하였고 결국 숙종은 허적의 사사를 명하였다. 남인의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윤휴(尹鑴) 역시 처형을 당하였으며 이 옥사가 완전히 마무리되는 5월까지 종친 세력과 연결된 100여 명이 넘는 남인은 갖가지 죄목으로 처벌되었다. 왕권 강화의 의지를 지니고 있던 숙종의 결단으로 남인에서 서인으로 다시 정국이 뒤바뀌는 환국이 진행된 셈이었다. 서인정국으로의 변화와 함께 숙종은 서인계열 김석주를 원훈으로 삼아 공신 책봉을 단행하였다. 1681년(숙종 7)에는 50여년에 걸친 서인의 숙원사업인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이 사건으로 남인은 상당수 축출되었지만, 장희빈(張禧嬪)의 존재가 서서히 부각되고 실세한 남인이 왕실과 연계를 맺게 되면서부터 변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였다.[2]
기사환국의 단행, 서인의 몰락과 남인의 재등장
희빈 장씨 숙원에 책봉되다
숙종은 즉위한 뒤 김만기(金萬基)의 딸인 인경왕후(仁敬王后)를 왕비로 맞았지만, 1680년(숙종 7) 10월에 사망하자, 1681년(숙종 8) 민유중(閔維重)의 딸인 인현왕후(仁顯王后)와 혼례를 치르고, 계비로 삼았다. 그러나 이 무렵 즈음 숙종은 궁중 나인이었던 장씨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이를 눈치 챈 대비 명성왕후(明聖王后)는 장씨를 궁 밖으로 쫒아냈지만 명성왕후가 사망한 뒤, 다시 궁중으로 돌아왔으며 숙종의 총애를 바탕으로 교만하고 방자하게 굴었다. 급기야 1686년(숙종 12)에는 장씨를 숙원(淑媛)으로 책봉하였다.[3]
희빈 장씨의 출신배경과 숙종의 총애
숙종의 비인 인경왕후, 인현왕후는 모두 서인 노론계열 출신이었다. 그에 반해 장희빈의 가계는 남인과 연루되어있었다. 장씨의 종숙부인 장현(張炫)은 역관 출신으로 당대 재력가였다. 그는 경신환국 당시 복창군(福昌君)과 복선군 옥사에 연루되었던 혐의를 받고 유배를 간 경력이 있었다. 이처럼 장희빈은 남인 계열과 관련이 있었고, 이러한 장희빈의 존재는 서인계열에게는 위기로 다가왔다. 그러던 중 5년이 넘도록 후사를 보지 못하였던 인현왕후 대신 1688년(숙종 14) 10월 27일 장씨가 왕자를 낳았다.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던 서인계의 불안은 숙종의 뒤이은 조치로 더욱 증폭되었다. 왕자가 출생한지 채 석달도 되지 않은 시점에 왕자를 원자로 정하고자 한 것이 그것이었다. 숙종의 뜻밖의 발언에 대해 신료들은 중궁에게서 별 소식이 없다면 국본이 자연스럽게 정해질 것이니 서두르지 말고 몇 년을 기다릴 것을 청하였지만, 숙종은 세자가 정해지지 않으면 민심이 안정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대신들의 논의를 일축하였다. 그리고 5일 만에 왕자의 정호를 종묘사직에 고하고 장씨를 ‘희빈(禧嬪)’으로 승격하였다.[4]
송시열의 상소와 서인의 몰락
그해 2월 1일 송시열이 국왕에게 올린 소는 정계에 큰 파란을 일으키게 된다. 송시열은 후궁에게 왕자의 경사가 생긴 것은 매우 기쁜 일이지만, 원자로 정하는 것이 너무 이르다는 견해도 무시할 수 없다는 뜻을 피력하였다. 송시열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송나라 때의 일화를 언급하였다. 그가 주장하기를 철종(哲宗)은 10살인데도, 번왕(藩王)의 지위에 있다가 신종(神宗)이 병이 들자 비로소 책봉하여 태자(太子)로 삼았다고 언급하면서 왕자의 원자 칭호를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뜻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숙종은 대명 황제는 황자를 낳은 지 4달 만에 봉호한 일이 있음을 언급하면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있다면 명나라의 예를 들어 국본을 일찍이 세우기를 청했어야 하는데, 송시열의 소장은 불만이 가득하다고 분노하였다.숙종은 승지 이현기(李玄紀) 윤빈(尹彬), 교리 남치훈(南致熏), 이익수(李益壽) 등과 의논하여 송시열의 관작을 삭탈하여 외지로 출송시켰다. 이어 숙종과 남인들은 영의정 김수흥을 파직시켰고, 권대운(權大運) 목내선(睦來善), 김덕원(金德遠) 등 남인계 인사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윤휴를 비롯하여 경신환국에서 화를 당한 많은 사람들이 신원되었다. 장희빈의 증조, 조부, 부친 모두 의정(議政)을 부여 받았으며, 장희빈의 부친인 장형에게는 1689년(숙종 15)에 옥산부원군(玉山府院君)의 칭호가 주어졌다.[5]
계속되는 서인의 시련
숙종은 이 외에도 서인에 대해 가혹한 응징의 조처를 단행하였다. 그 첫 번째는 이이와 성혼의 문묘 출향이었다. 숙종은 두 신하를 종향하자는 논의는 50년간 지속되었지만 선왕도 윤허하지 않았고, 선비의 국론이 정하여지지 않아 무고가 많고, 모욕하며 투기하고 이간하는 계책이 많아 국가가 혼란스러운데, 단지 한때의 숭상하는 것만을 쫒아서 하였던 것은 진정한 덕이 아니니, 출향하겠다는 뜻을 보였다. 두 번째는 기사환국이 단행된 지 4개월 만에 서인계 왕비인 인현왕후 민씨를 서인으로 폐출한 것이었다. 숙종은 성종대 폐비 윤씨의 투기가 드러나자 성종이 종사를 위해 폐출을 단행하였던 사례를 들며 민씨는 윤씨보다 더하므로 폐서인 시키고, 부모의 봉작을 빼앗는 일 등을 즉시 거행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대해 서인 노론측은 오두인(吳斗寅) 등 86인의 이름으로 이를 저지하고자 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오두인을 비롯하여 박태보(朴泰輔)· 이세화(李世華) 등은 국문당하여 위리안치 되거나 귀양을 갔으며 오두인과 박태보는 국문 끝에 사망하기도 하였다. 결국 숙종은 폐비 문제를 주관대로 처리하였고, 1690년(숙종 16) 10월 22일 원자가 세자가 되면서 장씨는 희빈에서 왕비로 승격시켰다. 세 번째 송시열의 사형이었다. 당시 예조판서 민암, 권대운 등 남인은 송시열을 문외 출송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그의 사형을 적극적으로 촉구하였다. 그 결과 숙종은 같은 해 6월 숙종은 송시열에게 사사의 명령을 내렸다. 송시열은 제주에서 돌아오는데, 중전을 폐한 것과 오두인과 박태보가 간하다가 죽은 것을 듣고는 먹지 않고, 정읍현(井邑縣)에 이르러 사사(賜死)의 명을 받았다. [6]
갑술환국과 남인의 몰락 서인 다시 재집권하다
숙종은 기사환국 이후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고자 노력하였으며, 남인들 역시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집권함은 물론 서인에게 보복하는 기회로 삼았다. 숙종은 원자정호 등의 일시적 의도는 실현하였지만 이런 과정에서 한 당파인 남인의 전권을 독점시켰기 때문에, 이를 조정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조처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5년 뒤 갑술환국이 일어나 남인은 몰락하고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된다.[7]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기사환국 | 경신환국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1689년 |
기사환국 | 갑술환국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1689년 |
예송논쟁 | 기사환국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1659년, 1674년 |
기사환국 | 숙종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1689년 |
기사환국 | 인현왕후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1689년 |
기사환국 | 희빈 장씨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1689년 |
기사환국 | 송시열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1689년 |
기사환국 | 서인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1689년 |
기사환국 | 남인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1689년 |
허적 | 허견 | A는 B의 아버지다 | |
남인 | 희빈 장씨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남인 | 복선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남인 | 복창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서인 | 인현왕후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서인 | 송시열 | A는 B를 포함한다 | |
서인 | 김수흥 | A는 B를 포함한다 | |
서인 | 오두인 | A는 B를 포함한다 | |
서인 | 박태보 | A는 B를 포함한다 | |
서인 | 이세화 | A는 B를 포함한다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689년 | 기사환국이 일어났다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이정민, "기사환국",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이정민, "기사환국",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이정민, "기사환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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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이정민, "기사환국",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박광용, 「숙종대 기사환국에 대한 검토<당론서 기록에 대한 비교 분석을 중심으로>」, 『東洋學』, Vol 17, 1999, 137-158쪽.
유용한 정보
이정민, "기사환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