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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19일 (토) 20:25 판
김만중(金萬重) | |
대표명칭 | 김만중 |
---|---|
한자표기 | 金萬重 |
생몰년 | 1637년-1692년 |
본관 | 광산 |
시호 | 문효(文孝) |
호 | 서포(西浦) |
자 | 중숙(重叔) |
시대 | 조선 |
대표직함 | 암행어사, 동부승지, 예조참의, 공조판서, 대사헌, 홍문관대제학, 지경연사 |
부 | 김익겸 |
모 | 김익겸 처 해평윤씨 |
성격 | 문신, 소설가 |
유형 | 인물 |
정의
1637년(인조 15)∼1692년(숙종 18). 조선 후기의 문신·소설가.
내용
가족관계
조선조 예학(禮學)의 대가인 김장생(金長生)의 증손이며, 충렬공(忠烈公)김익겸(金益謙)의 유복자이다. 또한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김만기(金萬基)의 아우로 숙종의 초비(初妃)인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숙부가 된다. 그의 어머니는 해남부원군(海南府院君) 윤두수(尹斗壽)의 4대손으로, 영의정을 지낸 문익공(文翼公)윤방(尹昉)의 증손녀이고, 이조참판윤지(尹墀)의 딸인 해평 윤씨이다. [1]
생애
본관은 광산(光山), 1665년(현종 6)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 정언(正言)·지평(持平)·수찬(修撰)·교리(校理)를 지냈다. 정치적으로는 전형적인 서인에 속했다. 1671년(현종 12)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어 경기·삼남(三南)의 진정(賑政)을 조사하였다. 이듬해 겸문학(兼文學)·헌납(獻納)을 역임하고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으나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작고하여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서인(西人)이 패하자,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2]
그후 서인이 정권을 잡자 다시 등용되어 1679년(숙종 5) 예조참의, 1683년(숙종 9) 공조판서, 이어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으나 조지겸(趙持謙) 등의 탄핵으로 전직되었다. 1685년 홍문관대제학, 이듬해 지경연사(知經筵事)로 있으면서 김수항(金壽恒)이 아들 창협(昌協)의 비위(非違)까지 도맡아 처벌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상소했다가 선천(宣川)에 유배되었으나 1688년 방환(放還)되었다. 이듬해 박진규(朴鎭圭)·이윤수(李允修) 등의 탄핵으로 다시 남해(南海) 노도(櫓島)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3]
저술활동
『구운몽』은 종전까지는 남해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쓴 것으로 알려졌으나, 근래에 발견된 『서포연보(西浦年譜)』에 따르면 선천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것이라고 한다. 이 작품은 김만중이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쓴 것으로 전문을 한글로 집필하여 숙종 때 소설문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4]
한편, 한글로 쓴 문학이라야 진정한 국문학이라는 국문학관을 피력하였다. 1698년(숙종 24) 관직이 복구되고 1706년(숙종 32) 효행에 대해 정표(旌表)가 내려졌다. 저서에 『구운몽』,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서포만필(西浦漫筆)』, 『서포집(西浦集)』, 『고시선(古詩選)』 등이 있다. [5]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김장생 | 김만중 | A는 B의 선조이다 | |
김만중 | 김익겸 | A는 아버지 B가 있다 | |
김익겸 처 해평윤씨 | 김익겸 | A는 B의 아내이다 | |
김만중 | 김익겸 처 해평윤씨 | A는 어머니 B가 있다 | |
김익겸 처 해평윤씨 | 윤지 | A는 아버지 B가 있다 | |
김익겸 처 해평윤씨 | 윤두수 | A는 B의 후손이다 | |
김만기 | 김만중 | A는 형제 B가 있다 | |
김만기 | 인경왕후 | A는 딸 B를 두었다 | |
인경왕후 | 조선 숙종 | A는 B의 아내이다 | |
김익겸 처 해평윤씨 | 윤방 | A는 B의 후손이다 | |
김만중 | 구운몽 | A는 B를 저술하였다 | |
김만중 | 사씨남정기 | A는 B를 저술하였다 | |
김만중 | 서포만필 | A는 B를 저술하였다 | |
김만중 | 서포집 | A는 B를 저술하였다 | |
김만중 | 고시선 | A는 B를 저술하였다 |
시간정보
시간 | 내용 |
---|---|
1665년 | 김만중이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 정언(正言)·지평(持平)·수찬(修撰)·교리(校理)를 지냈다. |
1671년 | 김만중이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어 경기·삼남(三南)의 진정(賑政)을 조사하였다. |
1674년 | 김만중이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작고하여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서인(西人)이 패하자,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
1679년 | 김만중이 예조참의가 되었다. |
1683년 | 김만중이 공조판서와 대사헌이 되었으나 조지겸에게 탄핵당했다. |
1685년 | 김만중이 선천에 유배당했다. |
1688년 | 김만중이 방환되었다. |
1689년 | 김만중이 박진규(朴鎭圭)·이윤수(李允修) 등의 탄핵으로 다시 남해(南海) 노도(櫓島)에 유배되어 병사하였다. |
공간정보
주석
- ↑ , "김만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 참조:"김만중(金萬重)"『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김만중",
『두산백과』online . 온라인 참조:"김만중(金萬重)"『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김만중",
『두산백과』online . 온라인 참조:"김만중(金萬重)"『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김만중",
『두산백과』online . 온라인 참조:"김만중(金萬重)"『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김만중",
『두산백과』online . 온라인 참조:"김만중(金萬重)"『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참고문헌
더 읽을거리
- 사료
- 서포만필(西浦漫筆)
- 서포문집(西浦文集)
- 단행본
- 김병국 외 번역, 『서포연보』, 서울대학교출판부, 1992.
- 정규복 외, 『김만중문학연구』, 국학자료원, 1992.
- 정규복, 『김만중연구』, 새문사, 1984.
- 정규복,『구운몽연구』, 고려대학교출판부, 1976.
- 송백헌,『서포가문행장』, 형설출판사, 1982.
- 정규복,『구운몽연구』, 고려대학교출판부, 1976.
- 논문
- 윤호진, 「서포의 생애와 한문학에 대한 재조명」,『민족문화』10, 민족문화추진회, 1984.
- 조동일,「김만중」,『한국문학사상사시론』, 지식산업사, 1979.
- 정규복,「김만중론」,『한국문학작가론』, 형설출판사, 1977.
- 김주한,「서포평논연구」,『영남어문학』3, 1976.
- 조종업,「서포한시연구」,『어문연구』9, 1976.
- 김무조,『서포소설연구』, 형설출판사, 1976.
- 김무조,「서포의 한시고」,『우헌정중환박사회갑기념논집』, 1974.
- 김무조,「김만중연구」,『동아논총』5, 동아대학교, 1969.
- 이명구,「김만중」,『한국의 인간상』, 신구문화사, 1967.
- 박성의,「김만중론」,『사조』2, 사조사, 19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