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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세에 출가하여 귀신사(鬼神寺)에서 『화엄경』을 공부하였으나, 원돈(圓頓)을 가르치는 화엄이 심인(心印)을 전하는 선(禪)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여 당나라로 유학을 결심했다.<ref> | + | 18세에 출가하여 귀신사(鬼神寺)에서 『화엄경』을 공부하였으나, 원돈(圓頓)을 가르치는 화엄이 심인(心印)을 전하는 선(禪)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여 당나라로 유학을 결심했다.<ref>김위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5802 도윤]",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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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에 출가하여 귀신사(鬼神寺)에서 화엄을 배웠지만 "원돈(圓頓)의 가르침이 어찌 심인의 묘용만 하겠는가?" 하고 선법을 수학하게 되었다고 한다. | 18세에 출가하여 귀신사(鬼神寺)에서 화엄을 배웠지만 "원돈(圓頓)의 가르침이 어찌 심인의 묘용만 하겠는가?" 하고 선법을 수학하게 되었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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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윤이 유학을 떠난 것은 28세가 되던 825년이다. 그는 중국으로 가는 사신의 배를 이용하여 구법의 길에 올랐다. 그가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찾은 이는 [[보원|남전 보원(南泉普願)]]이다. [[보원|남전]]은 [[도일|마조 도일(馬祖道一)]]의 제자로서 당시에 널리 알려진 선승이었다. 도윤이 큰 그릇임을 알아본 스승은 기쁘면서도 아쉬워 한다.<ref>이일야, 『아홉 개의 산문이 열리다』, 조계종출판사, 2016, 183쪽.</ref> 그 이유는 그의 법인(法印)이 신라로 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ref> | + | 도윤이 유학을 떠난 것은 28세가 되던 825년이다. 그는 중국으로 가는 사신의 배를 이용하여 구법의 길에 올랐다. 그가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찾은 이는 [[보원|남전 보원(南泉普願)]]이다. [[보원|남전]]은 [[도일|마조 도일(馬祖道一)]]의 제자로서 당시에 널리 알려진 선승이었다. 도윤이 큰 그릇임을 알아본 스승은 기쁘면서도 아쉬워 한다.<ref>이일야, 『아홉 개의 산문이 열리다』, 조계종출판사, 2016, 183쪽.</ref> 그 이유는 그의 법인(法印)이 신라로 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ref>김위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5802 도윤]",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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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5년(헌덕왕 17) 사신들을 따라 당나라에 들어가 남전보원(南泉普願)을 찾아가 예를 드리니 첫눈에 법기(法器)임을 알고 "오종(吾宗)의 법인(法印)이 동국으로 돌아가는구나!"라고 찬탄했다고 한다. | 825년(헌덕왕 17) 사신들을 따라 당나라에 들어가 남전보원(南泉普願)을 찾아가 예를 드리니 첫눈에 법기(法器)임을 알고 "오종(吾宗)의 법인(法印)이 동국으로 돌아가는구나!"라고 찬탄했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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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68년 4월 18일 문인들을 모아 법을 널리 펼 것을 당부하고 나이 71세, 법랍 44세로 [[화순 쌍봉사]]에서 입적하였다. 시호는 철감선사(澈鑒禪師)이며, 탑호(塔號)는 징소(澄昭)이다. 죽을 때 오색과명이 입에서 나와 공중에 상서로운 상이 퍼져나갔다하여 서기만천철감국사(瑞氣滿天澈鑒國師)라고도 한다.<ref> | + | 868년 4월 18일 문인들을 모아 법을 널리 펼 것을 당부하고 나이 71세, 법랍 44세로 [[화순 쌍봉사]]에서 입적하였다. 시호는 철감선사(澈鑒禪師)이며, 탑호(塔號)는 징소(澄昭)이다. 죽을 때 오색과명이 입에서 나와 공중에 상서로운 상이 퍼져나갔다하여 서기만천철감국사(瑞氣滿天澈鑒國師)라고도 한다.<ref>김위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5802 도윤]",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
=='''지식관계망'''== | =='''지식관계망'''== |
2017년 8월 19일 (토) 02:41 판
도윤(道允) | |
대표명칭 | 도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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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道允 |
생몰년 | 798년(소성왕 원년)-868년(경문왕 8) |
시호 | 철감(澈鑒) |
호 | 쌍봉(雙峰) |
휘 | 도윤(道允) |
탑호 | 징소(澄昭) |
성씨 | 박씨(朴氏) |
출신지 | 황해도 봉산 |
승탑 |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 |
승탑비 |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비 |
목차
정의
신라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도윤의 속성은 박씨(朴氏)이고, 오늘날 황해도 봉산에 해당되는 휴암현(鵂巖縣) 사람이다. 여러 대에 걸쳐 호족으로 지냈으며, 조부의 벼슬이 군보에 자세히 기록될 정도로 영향력 있는 집안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찬란한 광채가 방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16개월 만에 그를 낳았다고 한다.[1]
신라인으로 구산선문 가운데 사자산문(獅子山門)의 개조이며, 남전보원(南泉普願)의 법사이다. 성은 박씨이며, 한주 휴암현(鵂巖縣, 오늘날의 황해도 봉산) 사람으로 지방호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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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영식, 『조당집 읽기』, 운주사, 302쪽. |
출가수행
18세에 출가하여 귀신사(鬼神寺)에서 『화엄경』을 공부하였으나, 원돈(圓頓)을 가르치는 화엄이 심인(心印)을 전하는 선(禪)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여 당나라로 유학을 결심했다.[2]
18세에 출가하여 귀신사(鬼神寺)에서 화엄을 배웠지만 "원돈(圓頓)의 가르침이 어찌 심인의 묘용만 하겠는가?" 하고 선법을 수학하게 되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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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영식, 『조당집 읽기』, 운주사, 302쪽. |
구법유학
도윤이 유학을 떠난 것은 28세가 되던 825년이다. 그는 중국으로 가는 사신의 배를 이용하여 구법의 길에 올랐다. 그가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찾은 이는 남전 보원(南泉普願)이다. 남전은 마조 도일(馬祖道一)의 제자로서 당시에 널리 알려진 선승이었다. 도윤이 큰 그릇임을 알아본 스승은 기쁘면서도 아쉬워 한다.[3] 그 이유는 그의 법인(法印)이 신라로 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4]
825년(헌덕왕 17) 사신들을 따라 당나라에 들어가 남전보원(南泉普願)을 찾아가 예를 드리니 첫눈에 법기(法器)임을 알고 "오종(吾宗)의 법인(法印)이 동국으로 돌아가는구나!"라고 찬탄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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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영식, 『조당집 읽기』, 운주사, 302쪽. |
활동
남전(南泉)의 법을 받고 도윤이 귀국한 것은 입당 후 22년이 지난 847년(문성왕 9)이다. 그는 귀국한 후 금강산 장담사(長潭寺)에 머물게 된다. 이곳에서 그의 제자가 되는 절중(折中)을 만나게 된다. 절중은 영주 부석사에서 화엄을 공부하다가 스승을 찾아 금강산으로 와서 도윤을 만난 것이다. 여기에서 도윤은 경문왕(景文王)의 귀의를 받고 화순 쌍봉사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쌍봉사에 주석한 도윤은 입적할 때까지 이곳에서 선법을 펼치게 된다.[5]
849년(문성왕 9) 4월에 다시 신라에 돌아와 풍악에 선법을 펴니 학인이 운집하였다. 이때 경문왕이 소식을 듣고 귀의하였다. 법계는 도윤 → 절중(折中, 826-900)·경유(慶猷, 871-921)로 이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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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영식, 『조당집 읽기』, 운주사, 302쪽. |
입적
868년 4월 18일 문인들을 모아 법을 널리 펼 것을 당부하고 나이 71세, 법랍 44세로 화순 쌍봉사에서 입적하였다. 시호는 철감선사(澈鑒禪師)이며, 탑호(塔號)는 징소(澄昭)이다. 죽을 때 오색과명이 입에서 나와 공중에 상서로운 상이 퍼져나갔다하여 서기만천철감국사(瑞氣滿天澈鑒國師)라고도 한다.[6]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비 | 도윤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비 | 화순 쌍봉사 | A는 B에 있다 | |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 | 도윤 |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 |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 | 화순 쌍봉사 | A는 B에 있다 | |
보원 | 도윤 | A는 B의 스승이다 | |
도윤 | 절중 | A는 B의 스승이다 | |
사자산문 | 도윤 | A는 B가 개창하였다 | |
사자산문 | 절중 | A는 B가 중창하였다 | |
도윤 | 장담사 | A는 B에서 수행하였다 | |
도윤 | 화순 쌍봉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 ↑ 이일야, 『아홉 개의 산문이 열리다』, 조계종출판사, 2016, 182쪽.
- ↑ 김위석, "도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일야, 『아홉 개의 산문이 열리다』, 조계종출판사, 2016, 183쪽.
- ↑ 김위석, "도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일야, 『아홉 개의 산문이 열리다』, 조계종출판사, 2016, 184-186쪽.
- ↑ 김위석, "도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雙峯和尙道允」, 『祖堂集』 卷第十七. 온라인 참조: "雙峯和尙道允", 조당집, 한국고대사료집성 중국편,
『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김위석, "도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일야, "우리의 법인(法印)이 모두 동국으로 돌아가는구나", 법보신문, 2014년 10월 15일.
- 이일야, 『아홉 개의 산문이 열리다』, 조계종출판사, 2016.
- 정영식, 『조당집 읽기』, 운주사, 2016.
- 조범환, 「신라 하대 도윤선사와 사자산문의 개창」, 『신라사학보』 10, 신라사학회, 2007, 223-252쪽.
- 최연식, 「사자산 선문의 성립과정에 대한 재검토」, 『불교학연구』 21, 불교학연구회, 219-25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