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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관계망'''== | =='''지식관계망'''== |
2017년 8월 17일 (목) 04:46 판
(李崇仁) | |
한자표기 | 李崇仁 |
---|---|
생몰년 | 1347년(충목왕 3)-1392년(태조 1) |
본관 | 성주(星州) |
호 | 도은(陶隱) |
자 | 자안(子安) |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 |
시대 | 고려 |
대표저서 | 도은집(陶隱集) |
부 | 이원구(李元具) |
모 | 언양김씨(彦陽金氏) |
정의
고려 말의 학자.
내용
이숭인(李崇仁)의 증조는 밀직사사(密直司事)를 지낸 이백년(李百年)이며 조부는 평양윤(平壤尹)을 지낸 이인기(李麟起)이다. 부친은 성산군(星山君) 이원구(李元具)였으며 모친은 언양김씨(彦陽金氏) 김경덕(金敬德)의 딸이다. 이원구는 이숭인과 이숭문(李崇文)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숭인은 남양 홍씨 홍사보(洪師普)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이차약(李次若)·이차점(李次點)·이차건(李次騫)·이차괄(李次适)·이차삼(李次參)을 두었다. 이숭인의 증조 이백년(李百年)은 이인임(李仁任)의 증조인 이조년(李兆年)의 맏형으로,[1] 이인임은 이숭인의 5촌 당숙이다.
이숭인은 공민왕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숙옹부승(肅雍府丞)이 되고, 장흥고사(長興庫使) 겸 진덕박사(進德博士)가 되었으며, 명나라 과거시험에 응시할 문사(文士)를 뽑을 때 수석으로 뽑혔으나 나이 25세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지 못했다.[2] 예의산랑(禮儀散郎)·예문응교(藝文應敎)·문하사인(門下舍人)을 지내고, 공민왕이 성균관을 연 뒤 정몽주(鄭夢周)·김구용(金九容)·박의중(朴宜中) 등과 함께 학관(學官)을 겸하였다.[3]
우왕 때 전리총랑(典理摠郎)으로서 김구용, 정도전(鄭道傳), 전녹생(田祿生) 등과 함께 원나라 사신을 돌려보낼 것을 청하다가 유배를 갔으며, 돌아와 성균사성(成均司成)과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를 역임하며 동료와 함께 상소를 올려 나라의 시급한 대책을 논하였다. 후에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어 정몽주와 함께 실록(實錄)을 편수하고 동지사사(同知司事)가 되었으며, 이인임의 인척으로 곤장형을 받아 통주(通州)에 유배되었다. 이후 첨서밀직사사(僉書密直司事)가 되어 이색(李穡), 김사안(金士安) 등과 하정사(賀正使)로 북경을 갔다 와서 예문제학(藝文提學)이 되었다.[4]
창왕 때 박천상(朴天祥), 하륜(河崙) 등과 함께 영흥군 환(永興君 環)의 진위 여부[5]를 변론하다 무고로 연좌되었고, 이성계의 도움으로 조정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구성우(具成佑), 오사충(吳思忠), 남재(南在), 심인봉(沈仁鳳), 이당(李堂) 등이 상소를 올려 탄핵하여 경산부로 유배되었다. 권근(權近)이 그를 구출하기 위하여 무죄를 상소했으나, 간관이 도리어 권근의 상소가 거짓을 꾸민 것이라 상소하여 우봉현(牛峯縣)으로 유배되었다.[6]
공양왕 때 이초(彛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이색·권근과 함께 투옥되었다가 풀려나 지밀직사사·동지춘추관사가 되었으나, 정몽주의 당이라 하여 다시 삭직당하고 유배되었다. 1392년 정몽주가 살해되자 그 일당으로 몰려 유배되었다가, 조선 건국 후 정도전이 보낸 심복 황거정(黃居正)에 의해 유배지에서 살해되었다. [7]
이숭인은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원과의 복잡한 국제관계에서 외교문서를 도맡아 썼다. 특히 시문으로 이름을 날려 이색은 "이 사람의 문장은 중국에서 구할지라도 많이 얻지 못할 것이다."라고 칭찬하였고, 명나라 태조(太祖)도 일찍이 그가 찬한 표문(表文)을 보고 "표의 문사가 참으로 절실하다."라고 평가했으며, 중국의 사대부들도 그 저술을 보고 모두 탄복하였다.[8][9]
도은(陶隱) 이숭인은 야은(冶隱) 길재(吉再)를 대신하여 포은(圃隱) 정몽주, 목은(牧隱) 이색과 함께 고려의 삼은(三隱)이라 불리기도 한다.
저서
이숭인의 저서로는 태종의 명에 의해 변계량(卞季良)이 편집하고 권근(權近)이 서문을 지어 간행한 『도은선생집(陶隱先生集)』이 전해진다.[10]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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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숭인 초상 | 이숭인 | A는 B의 초상화이다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국역 고려사: 열전』, 경인문화사, 2006. 온라인 참조: "이숭인", 국역 고려사: 열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이숭인",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김영우, 『조선 전기 심성론』,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4. 온라인 참조: "이숭인", 조선 전기 심성론,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전관사, 『한시작가작품사전』, 국학자료원, 2007. 온라인 참조: "이숭인", 한시 작가·작품 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영흥군 환의 진위 여부: 신종(神宗)의 후손인 영흥군(永興君) 왕환(王環)이 무릉도(武陵島)로 유배가 19년 동안 생사를 알지 못하였다. 이후 그의 부인 신씨는 그가 표류하여 일본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가서 찾아 왔으나 사람됨이 전과 같지 않고 과거를 기억하지 못했다. 이에 이숭인 등은 왕환이 아니라 하고 그 부인 신씨는 맞다고 하여 헌부(憲府)에 송사(訟事)를 내었다. 이에 여러 종실(宗室) 등과 대질하게 되니 모두 왕환이라고 주장하므로 이숭인 등은 무고죄를 받았다. 출처: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국역 고려사: 열전』, 경인문화사, 2006. 온라인 참조: "이숭인", 국역 고려사: 열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배종호, "이숭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영우, 『조선 전기 심성론』,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4. 온라인 참조: "이숭인", 조선 전기 심성론,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김영우, 『조선 전기 심성론』,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4. 온라인 참조: "이숭인", 조선 전기 심성론,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배종호, "이숭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도은선생집",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