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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이지관, "충주 정토사 법경대사 자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 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230쪽.}} | |출처=이지관, "충주 정토사 법경대사 자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 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230쪽.}} |
2017년 8월 15일 (화) 01:28 판
현휘(玄暉) | |
대표명칭 | 현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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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Hyeonhwi |
한자 | 玄暉 |
생몰년 | 879(헌강왕 5)-941(태조 24) |
시호 | 법경(法鏡) |
휘 | 현휘(玄暉) |
탑호 | 자등(慈燈) |
성씨 | 이씨(李氏) |
본관 | 남원(南原) |
출신지 | 남원(南原) |
승탑비 |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 |
목차
정의
고려 전기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법경대사 현휘(法鏡大師 玄暉)는 879년(헌강왕 5) 오늘날 전라북도 남원 지역의 육두품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당나라 출신 귀화인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이덕순(李德順), 어머니는 부씨(傅氏)이다.[1]
유년기
현휘는 나면서부터 거룩한 자태가 있었고, 보통 아이들 놀음은 전혀 안하고 모래 위에 돌을 모아 불탑을 쌓아 올리는 놀이를 즐겨하였다.[2]
13개월 동안 모태 중에 있다가 건부(乾符) 6년[3] 1월 1일 오시(午時)에 탄생하였다. 스님은 선천적으로 성자(聖姿)를 지니고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아이들이 하는 장난은 하지 않았다. 불상이나 어른을 보면 합장(合掌)하고, 앉을 때는 가부좌(跏趺坐)를 맺고 앉으며, 땅과 담벽 등에는 불상(佛像)과 탑형(塔形)을 그렸다. 고기에 물을 먹여 살리고 벌레들에게는 먹이를 주어 구제하기도 하였다. | ||
출처: 이지관, "충주 정토사 법경대사 자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 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230쪽. |
출가수행
현휘는 영동군 영각산사(靈覺山寺)의 심광대사에게 출가한 뒤, 무염화상(無染和尙)의 문하에서 선법(禪法)을 공부하였다.[4]
20세가 되던 해인 898년(효공왕 2)에는 해인사(海印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5]
한 번은 현휘가 10여 명과 함께 난리를 피하여 무주(武州)에 갔었는데, 도둑떼의 습격을 받아 함께 간 동행이 차례로 죽었다. 그의 차례가 되었는데도 죽음 앞에서 얼굴빛이 태연하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자, 도둑의 우두머리가 칼을 던지고 엎드려 절하면서 그를 스승으로 섬기기를 자원하였다고 한다.[6]
구법유학
28세 때인 906년(효공왕 10) 현휘는 당나라로 가서 구봉산(九峰山)의 도건(道乾)을 만나고, 입실(入室)[7]을 허락받아 참선을 시작했다.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심요(心要)[8]를 전해 받았다고 한다. 그 뒤 10여 년 동안 중국을 돌면서 성지들을 참배하고 선지식을 찾아보았다.[9][10]
그 후 스님은 “내가 여기에 머물게 되면 앞으로 나아갈 길이 막혀 버리리라”하시고, 천우(天祐) 3년[11] 해안(海岸)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우연히 당(唐)나라로 가는 배를 만나 편승(便乘)을 간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목적지인 피안(彼岸)에 도달하여 이리 저리 서상(西上)하다가, 길을 동양(東陽)으로 돌려 팽택(彭澤)을 지나 드디어 구봉산(九峯山)에 이르러 경건한 마음으로 도건대사[道乾(도건:道虔)大師]를 친견하게 되었다. 마침 대사(大師)가 뜰에 서 있었으니 절을 하고 엎드려 미처 일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대사(大師)가 스님을 보고 “도리(闍梨)는 머리가 희구려”하거늘, 스님이 대답하되 “현휘(玄暉)는 아무리 보아도 저 자신을 알 수 없나이다”하니, 다시 “무엇을 알지 못한다는 말인가”하였다. 대답하되 “저의 머리가 희다고 하신 말씀의 뜻입니다”라고 하였다. 대사는 “추억을 더듬어보니 너와 이별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지금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되었구나”하였다. 기꺼운 바는 승당(昇堂)하여 대사(大師)의 오묘한 경지(境地)를 보고 입실(入室)해서 참선(參禪)토록 하였는데, 겨우 10일이 되자마자 심요(心要)를 전해 받아 묵묵히 서로 계합(契合)하였다. | ||
출처: 이지관, "충주 정토사 법경대사 자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 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235-236쪽. |
귀국 및 활동
고려가 건국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현휘는 당나라로 떠난 지 18년 만인 924년(태조 7)에 귀국하였고, 태조는 사신을 교외에 보내어 영접하고, 곧 궁중으로 맞아들여 국사(國師)의 대우를 하였다.[12]
현휘는 고려 태조의 권유로 충주 정토사(淨土寺)에서 주석하게 되었다. 현휘의 명성은 중앙의 관료들의 경우도 정토사를 방문하지 않은 것을 수치로 여길 정도로 대단히 높았다.[13]
한편, 현휘는 정토사에 상주하면서 광평시중(廣評侍中)을 지낸 유권열(劉權說)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충주 호족 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중부 내륙지역민에 대한 교화에 힘씀으로써 다수의 호족 세력을 태조 왕건의 지지 세력으로 끌어들이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14]
입적
현휘는 941년(태조 24) 11월 26일에 입적하였으며, 태조가 '법경대사(法鏡大師)'라는 시호(謚號)와 '자등(慈燈)'이라는 탑호(塔號)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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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 ↑ 최규성, "법경대사",
『디지털충주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인명사전편찬위원회, 『인명사전』, 민중서관, 2002. 온라인 참조: "현휘", 인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당(唐)의 희종연호(僖宗年號). 신라 제49대 헌강왕 5년(879).
- ↑ 최규성, "법경대사",
『디지털충주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최규성, "법경대사",
『디지털충주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강정만, "현휘",
『디지털남원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① 수행자가 친히 스승의 지도를 받기 위해 그의 방에 들어감. ② 스승이 수행자를 자신의 방으로 불러들여 그의 수행 상태를 점검함. ③ 제자가 스승의 법맥(法脈)을 이어받음.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입실",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마음의 가장 중요한 정수(精髓).
- ↑ 강정만, "현휘",
『디지털남원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상현, "현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당(唐)의 애제연호(哀帝年號). 신라 제52대 효공왕 10년(906).
- ↑ 김상현, "현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정성권, 「고려 태조 왕건을 보는 또 다른 시각 - 미술사와 고고학을 통하여」, 『동양학』 Vol.61,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2015, 167쪽.
- ↑ 최규성, "법경대사",
『디지털충주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강정만, "현휘",
『디지털남원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김두진, 「나말여초의 선종산문과 그 사상의 변화」, 『신라문화』Vol.27, 2006, 111-131쪽.
- 김상현, "현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김혜완, 「나말려초 남한강 주변의 선종사원과 선사들의 활동 - 정치세력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국고대사연구』49, 2008, 257-292쪽.
- 이인재, 「충주 정토사 현휘와 영월 흥녕사 절중 - 고려 혜종대 정변과 관련하여」, 『한국고대사연구』49, 2008, 293-321쪽.
- 이지관, "충주 정토사 법경대사 자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 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210-248쪽.
- 인명사전편찬위원회, 『인명사전』, 민중서관, 2002. 온라인 참조: "현휘", 인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최규성, "법경대사",
『디지털충주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