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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31일 (화) 11:56 판
화포와 화약을 제조하는 최무선 | |
작가 | 최대섭 |
---|---|
제작연도 | 1979년 |
규격 | 300호(290.9x197cm) |
유형 | 고려 |
분류 | 유화 |
소장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개요
진주성싸움은 박정희 대통령 재임중인 1979년에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그려진 그림으로, 최대섭 화백의 작품이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민족기록화 전승편 20작품 중 하나로, 임진왜란 중인 1592년 10월 1차 진주성싸움에서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이 3,800명의 관군과 2만여명의 백성들을 지휘하여 진주성을 공격하던 왜군을 격파하여 곡창지대인 호남 진출을 막아낸 장면을 담았다.
내용
작품 속 인물은 고려 후기 왜구를 토벌한 무신인 최무선으로, 그는 14세기 중엽 왜구가 창궐하자 화약의 필요성을 절감하였고, 수입에 의존하던 화약 제조와 총기 제작의 국산화를 결심했다.
그러나 화약 재료 가운데 하나인 염초는 여러 공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구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만드는 방법이나 재료에 따라 성능에도 차이가 많았다. 최무선은 염초 제작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가 이원(李元)으로부터 염초를 흙에서 추출하는 방법을 배워 드디어 화약을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화약을 이용하여 화전(火箭)과 같은 간단한 무기를 실험해 본 결과 자신감을 얻은 최무선은 화약과 화약무기를 연구하고 제조할 화통도감(火筒都監) 설치를 조정에 건의하였다. 이에 1377년(우왕 3) 10월 화통도감이 설치되어 화약과 화약무기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으며 최무선은 화통도감에서 총포류·발사류·로켓병기 등 모두 18종의 화약무기를 개발하였다.
뿐만 아니라 1380년 왜구가 500여척의 선박을 이끌고 금강 하구의 진포로 쳐들어온 진포대첩때 원수 나세(羅世), 심덕부(沈德符)와 함께 각종 화기로 무장한 선박을 이끌고 나가 싸워 큰 공을 세웠다.
관련 민족기록화
고려시대 배경 작품
추출정보
작품정보 연결망
관련항목
노드 | 관계 | 노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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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섭-화포와 화약을 제조하는 최무선 | ~에 의해 그려지다 | 최대섭 |
최대섭-화포와 화약을 제조하는 최무선 | ~에 소장되어 있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
최대섭-화포와 화약을 제조하는 최무선 | ~을 소재로 삼다 | 최무선 |
최대섭-화포와 화약을 제조하는 최무선 | ~을 소재로 삼다 | 화통도감 |
시간정보
중심 | 시간정보명 | 시간값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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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섭-화포와 화약을 제조하는 최무선 | 제작연도 | 1979년 |
공간정보
중심 | 연결정보 | 공간정보이름 | 경도 | 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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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섭-화포와 화약을 제조하는 최무선 | 소장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37.3915557 | 127.0547403 |
참고문헌
-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한민족 전투)
- 박혜성, 「1960-1970년대 민족기록화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논문, 200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