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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우는 가지사로 옮긴 때에 공민왕에게 신돈을 가까이 하지 말라고 상소하기도 하였다. 3년 후 66세가 되던 겨울에 신돈의 일로 인장을 보내고 왕사를 사임하였다. 이후 68세가 되던 1368년 여름 신돈에 의해 속리사에 금고되었다가 69세 3월에 소설산으로 돌아왔다. | ||
{{Blockquote|병오년(丙午年) 10월에 또 왕사직(王師職)의 사임서를 인장(印章)과 함께 보내면서 깊은 산중에서 임성양진(任性養眞)하도록 허락을 간청하였다. 현릉(玄陵)이 윤허하였으니 이는 간특한 신돈(辛旽)이 권세를 마음대로 부렸기 때문이었다. '''...(중략)...''' 신돈은 보우가 마치 눈엣가시와 같아 그를 사지(死地)로 몰아 넣으려고 백계(百計)를 꾸몄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스님이 강절(江浙) 지방인 해외로 가서 유학코자 하니, 신돈이 현릉(玄陵)에게 고하기를 “태고(太古)는 폐하(陛下)의 총은(寵恩)을 입음이 지극하옵니다. 앞으로 편안하고 조용하게 노기(老期)를 보내는 것이 그가 해야할 도리입니다. 이제 멀리 해외로 유학(遊學)하려 함은 반드시 다른 의도(意圖)가 있어서이니 청하옵건대 폐하(陛下)께서는 통찰하여 주십시오” 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위급하게 느껴져서 현릉(玄陵)은 하는 수 없이 따랐다. 그리하여 신돈(辛旽)은 그 일을 형조에 내려 추문(推問)하여 신문토록 하여 스님의 좌우(左右)에 있는 이들을 무복(誣服)케 하고는 스님을 속리사(俗離寺)에 금고(禁錮)시켰다.기유년(己酉年) 3월에 이르러 현릉(玄陵)이 스님을 금고(禁錮)한 것을 후회하고 소설암(小雪庵)으로 돌아오도록 청하였다 | {{Blockquote|병오년(丙午年) 10월에 또 왕사직(王師職)의 사임서를 인장(印章)과 함께 보내면서 깊은 산중에서 임성양진(任性養眞)하도록 허락을 간청하였다. 현릉(玄陵)이 윤허하였으니 이는 간특한 신돈(辛旽)이 권세를 마음대로 부렸기 때문이었다. '''...(중략)...''' 신돈은 보우가 마치 눈엣가시와 같아 그를 사지(死地)로 몰아 넣으려고 백계(百計)를 꾸몄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스님이 강절(江浙) 지방인 해외로 가서 유학코자 하니, 신돈이 현릉(玄陵)에게 고하기를 “태고(太古)는 폐하(陛下)의 총은(寵恩)을 입음이 지극하옵니다. 앞으로 편안하고 조용하게 노기(老期)를 보내는 것이 그가 해야할 도리입니다. 이제 멀리 해외로 유학(遊學)하려 함은 반드시 다른 의도(意圖)가 있어서이니 청하옵건대 폐하(陛下)께서는 통찰하여 주십시오” 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위급하게 느껴져서 현릉(玄陵)은 하는 수 없이 따랐다. 그리하여 신돈(辛旽)은 그 일을 형조에 내려 추문(推問)하여 신문토록 하여 스님의 좌우(左右)에 있는 이들을 무복(誣服)케 하고는 스님을 속리사(俗離寺)에 금고(禁錮)시켰다.기유년(己酉年) 3월에 이르러 현릉(玄陵)이 스님을 금고(禁錮)한 것을 후회하고 소설암(小雪庵)으로 돌아오도록 청하였다 | ||
|출처=이지관, "양주 태고사 원증국사 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0, 460-462쪽.}} | |출처=이지관, "양주 태고사 원증국사 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0, 460-462쪽.}} |
2017년 8월 11일 (금) 21:34 판
보우(普愚) | |
대표명칭 | 보우 |
---|---|
한자 | 普愚 |
생몰년 | 1301(충렬왕 27)-1382(우왕 8) |
시호 | 원증(圓證) |
호 | 태고(太古) |
휘 | 보우(普愚) |
탑호 | 보월승공(寶月昇空) |
성씨 | 홍씨(洪氏) |
본관 | 홍주(洪州) |
출신지 | 홍주(洪州: 현재 충청남도 홍성) |
승탑 | 고양 태고사 원증국사탑 |
승탑비 | 고양 태고사 원증국사탑비 |
목차
정의
고려시대의 승려
생애
가계와 탄생
태고 보우는 1301년(충렬왕 27년)에 충청남도 홍주(洪州, 현재의 충청남도 홍성) 태어났다. 본관은 홍주(洪州). 속성은 홍씨(洪氏). 첫 법명은 보허(普虛), 호는 태고(太古). 법명은 보우(普愚). 홍주(洪州: 현재 충청남도 홍성) 출신. 아버지는 홍연(洪延)이며, 어머니는 정씨(鄭氏)이다. [1]
국사의 휘는 보우(普愚)요 호는 태고(太古)이며 속성은 홍씨(洪氏)이니 충남 홍주(洪州) 출신이다. 아버지의 휘는 연(延)이니,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해설 1] 상주국(上柱國) 문하시중(門下侍中) 판리병부사(判吏兵部事) 홍양공(洪陽公)에 추증(追贈)되었다. 어머니는 정씨(鄭氏)이니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추증되었다. 부인이 어느 날 밤 태양이 가슴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임신하여 대덕(大德) 5년 신축(辛丑) 9월 21일에 스님을 낳았다. 스님은 성동(成童)의 나이에도 영오(穎悟)함이 남달리 뛰어났다. | ||
출처: 이지관, "양주 태고사 원증국사 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0, 458쪽. |
출가수행
태고 보우는 13세 때 양주 회암사의 광지선사(廣智禪師)를 스승으로 하여 득도하였다. 19세 때 가지산 업림에서 만법귀일(萬法歸一)의 설두로 선지를 참구하였으나 대중은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26세 화엄선에 합격하고 경전을 두루 연구하여 그 뜻을 깊이 각인하였다.[2]
13살 때 회암사 광지선사(廣智禪師)를 은사로 하여 스님이 되었다. 19살 적부터 만법귀일(萬法歸一)이언만 일귀하처화(一歸何處話)를 들어 참선하였다. | ||
출처: 이지관, "양주 태고사 원증국사 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0, 458쪽. |
구법유학
태고 보우는 46세떄에 중국에 건너가 약 2년 동안 행류(行遊)하는 가운데 원나라 황제로부터 우대를 받아 두 차례 법회를 주관하였다. 또한 임제선사의 18대손으로 부터 당시 중국에서 으뜸가는 석옥청공선사를 만나 심계를 얻었다. 보우는 연경의 대관사에서 순제의 청으로 반약경을 강의한다. [3] 이때 보우에 대한 명성이 두루 알려져 원나라 태자의 생일을 맞아, 영녕사에서 개당설법하니 원 황실에서는 보우에게 향과 폐백과 슴란가사를 증정하였다. 이때 공민왕이 세자로 연경에 와 있었는데 감탄하여 말하기를 "내가 만약 고려에 돌아가 친정을 도모하게 되면 스님을 나의 스승으로 모시리라" 하였다. 이러한 공민왕과의 만남은 후일 보우가 왕사와 국사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이다.[4]
귀국 및 활동
왕사에 임명됨
1356년 왕의 청으로 봉은사(奉恩寺)에서 설법하였고, 그 해 4월 왕사(王師)로 책봉되어 광명사(廣明寺)에 머물렀다. 1362년 왕은 그를 희양산 봉암사(鳳巖寺)에 있게 하였고, 1363년 가지산 보림사(寶林寺)로 옮기게 하였다.[5]
신돈과의 악연
보우는 가지사로 옮긴 때에 공민왕에게 신돈을 가까이 하지 말라고 상소하기도 하였다. 3년 후 66세가 되던 겨울에 신돈의 일로 인장을 보내고 왕사를 사임하였다. 이후 68세가 되던 1368년 여름 신돈에 의해 속리사에 금고되었다가 69세 3월에 소설산으로 돌아왔다.
입적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고양 태고사 원증국사탑비 | 보우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
고양 태고사 원증국사탑 | 보우 | A는 B의 승탑이다 | |
석옥 | 보우 | A는 B의 스승이다 | |
보우 | 공민왕 | A는 B와 관련있다 | |
보우 | 신돈 | A는 B와 관련있다 | |
보우 | 고양 태고사 | A는 B를 창건하였다 | |
보우 | 장흥 보림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
고양 태고사 원증국사탑비 | 이색 |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 |
고양 태고사 원증국사탑비 | 권주 | A는 B가 비문을 썼다 | |
고양 태고사 원증국사탑비 | 석굉 | A는 B가 비문을 새겼다 | |
보우 | 보은 법주사 | A는 B와 관련있다 |
참고문헌
- 서정문, 「太古普愚의 禪風에 관한 硏究」, 『中央增伽大學論文集』, 중앙승가대학교, 1994, 7-31쪽.
- 송윤주, 『태고 보우대사 연구』, 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2.
- 이지관, "양주 태고사 원증국사 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450-472쪽.
- 최연식, 「신돈(辛旽)의 불교 신앙과 불교 정책」, 『불교학보』 86,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2014, 267-291쪽.
- 한기두, 「太古 普愚 硏究」, 『원광대학교 논문집』, 1973, 83-105쪽.
- 황인규, "36. 태고보우 선사", 불교신문, 2007.10.10.
- 허정철, "⑪ 태고 보우국사-한국불교 대선사의 풍모 '장엄'", 불교신문, 2008.03.19.
주석
용어해설
- ↑ 고려 문산계(文散階). 중국에서는 위(魏)·진(晉) 시대부터 시작된 관계(官階)인데, 우리 나라에서는 995년에 전의대광(典儀大匡)을 개부의동삼사라고 불렀다. 1298년 숭록대부(崇祿大夫)로 개칭. 1356년에 다시 개부의동삼사라 하다가 1362년에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으로 고쳤다. 출처: "양주 태고사 원증국사 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0, 458쪽. 각주 15.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