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목"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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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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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초상화_인물_허목_01_초상.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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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이명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OriginImage?mid=e8f166a7-ccb5-499c-9768-6fd989f61fb6 허목 초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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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허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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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許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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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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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양천(陽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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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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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문정(文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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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수(眉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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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문보(文甫)·화보(和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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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5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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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168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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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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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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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저서= 『[[기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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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직함=우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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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허교|허교(許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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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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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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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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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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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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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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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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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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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시기 부터 [[조선 숙종|숙종]]시기까지 활약했던  조선 후기의 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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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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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NAME}}의 가계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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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문보(文甫)·화보(和甫), 호는 미수(眉叟)이다. 찬성 [[허자|허자(許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별제 [[허강|허강(許橿)]]이고, 아버지는 현감 [[허교|허교(許喬)]]이며, 어머니는 정랑 [[허목의 어머니|임제(林悌)의 딸]]이다. 부인은 영의정 [[허목의 부인|원익(李元翼)의 손녀]]이다.<ref>송찬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049 허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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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시기 {{PAGENAME}}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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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5년(광해군 7) [[정언눌|정언눌(鄭彦訥)]]에게 글을 배우고, 1617년 거창현감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가서 문위(文緯)를 사사하였다. 또한 그의 소개로 [[정구|정구(鄭逑)]]를 찾아가 스승으로 섬겼다. 1626년(인조 4) [[조선 인조|인조]]의 생모 계운궁 구씨(啓運宮具氏)의 복상(服喪)문제와 관련해 유신(儒臣) [[박지계|박지계(朴知誡)]]가 [[원종]]의 추숭론(追崇論)을 제창하자, 동학의 재임(齋任)으로서 임금의 뜻에 영합해 예를 혼란시킨다고 유벌(儒罰)을 가하였다. 이에 [[조선 인조|인조]]는 그에게 정거(停擧: 일정 기간 동안 과거를 못 보게 하던 벌)를 명하였다. 뒤에 벌이 풀렸는데도 과거를 보지 않고 자봉산에 은거해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을 당해 영동(嶺東)으로 피난했다가 이듬해 강릉·원주를 거쳐 상주에 이르렀으며, 1638년에는 의령의 모의촌(慕義村)에서 살다가 1641년 다시 사천으로 옮겼다. 그 뒤 창원·칠원(漆原) 등지로 전전하다가 1646년 마침내 경기도 연천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음 해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상중에 『[[경례유찬|경례유찬(經禮類纂)]]』을 편찬하기 시작해 3년 뒤에는 『[[상례편|상례편(喪禮篇)]]』을 완성하였다. <ref>송찬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049 허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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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효종|효종]]시기 관직에 나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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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0년([[조선 효종|효종]] 1) 정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1개월 만에 사임하였다. 이듬해 내시교관이 된 뒤 조지서별좌(造紙署別坐)·공조좌랑 등을 거쳐 용궁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57년 공조정랑에 이어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조선 효종|효종]]을 만나 소를 올려 군덕(君德)과 정폐(政弊)를 논하고 사임을 청하였다. 그 뒤 사복시주부로 옮겼으나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659년 장령이 되어 군덕을 논하는 소를 올렸으며, 또한 당시 [[송시열|송시열(宋時烈)]]·[[송준길|송준길(宋浚吉)]] 등이 주도하는 [[북벌청책]]에 신중할 것을 [[조선 효종|효종]]에게 간하는 [[옥궤명|옥궤명(玉几銘)]]을 지어 바쳤다. 이어 둔전의 폐단을 논하였다. 그 해 [[조선 효종|효종]]이 죽자 소를 올려 상례를 논했고,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ref>송찬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049 허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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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예송논쟁]]과 {{PAGE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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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0년(현종 1) 경연(經筵)에 출입했고, 다시 장령이 되었다. 그 때 [[조선 효종|효종]]에 대한 [[인조의 계비|조대비(趙大妃: 인조의 繼妃)]]의 복상기간이 잘못되었으므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상소해 정계에 큰 파문을 던졌다. 이를 기해복제라 한다. 당시 [[송시열]] 등 [[서인]](西人)은 『[[경국대전]]』에 의거해 맏아들과 중자(衆子)의 구별 없이 조대비는 [[기년복|기년복(朞年服: 1年喪)]]을 입어야 한다고 건의해 그대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실은 의례(儀禮) 주소(註疏: 경서 등에 해석을 덧붙인 것)에 의거해 [[조선 효종|효종]]이 [[체이부정|체이부정(體而不正)]], 즉 아들이기는 하지만 맏아들이 아닌 "서자" 에 해당된다고 해석해 [[기년복]]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조선 효종|효종]]이 왕위를 계승했고 또 종묘의 제사를 주재해 사실상 맏아들 노릇을 했으니 어머니의 맏아들에 대한 복으로서 "[[자최삼년|자최삼년(齊衰三年)]]"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복제논쟁의 시비로 정계가 소란해지자 왕은 그를 삼척부사로 임명하였다. 여기서 그는 향약을 만들어 교화에 힘썼으며, 『[[척주지|척주지(陟州誌)]]』를 편찬하는 한편, 『[[정체전중설|정체전중설(正體傳重說)]]』을 지어 삼년설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였다.<ref>송찬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049 허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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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예송논쟁]]과 {{PAGENAME}} 권력의 정점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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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4년 [[조선 효종|효종]] 비 [[인선왕후|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조대비의 복제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다. 조정에서는 [[대공복|대공복(大功服)]]으로 9개월을 정했으나 대구 유생 도신징(都愼徵)의 상소로 다시 기해복제가 거론되었다.『[[경국대전]]』에 따르면 맏아들·중자의 구별 없이 부모는 아들을 위해 [[기년복]]을 입는다고 규정했으나, 며느리의 경우 맏며느리는 기년, 중자처는 대공으로 구별해 규정하였다. 그런데 인선왕후에게 [[대공복]](大功服)을 적용함은 [[중자처|중자처(衆子妻)]]로 대우함이고, 따라서 [[조선 효종|효종]]을 중자로 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근거는 『[[경국대전]]』이 아니라 "[[고례|고례(古禮)]]의 체이부정설"이었다. 이는 "[[조선 효종|효종]]의 복제와 모순되는 것"으로서 새로 즉위한 [[조선 숙종|숙종]]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이러한 일로 [[송시열]] 등 [[서인]]은 몰리게 되고 그의 견해가 받아들여져 [[대공복]]을 [[기년복]]으로 고치게 되었다. 이로써 [[서인]]은 실각하고 [[남인]]의 집권과 더불어 그는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사직소를 올렸고, 병이 나자 [[조선 숙종|숙종]]은 어의를 보내어 간호하기까지 하였다. 1675년([[조선 숙종|숙종]] 1) 이조참판·비국당상(備局堂上)·귀후서제조(歸厚署提調) 등을 거쳐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진하고, 의정부우참찬 겸 성균관제조로 특진하였다. 이어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승진되어 과거를 보지 않고도 유일(遺逸)로서 삼공(三公)에 올랐다. <ref>송찬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049 허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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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을 향한 정치적 복수와 당파가 갈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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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덕원(德源)에 유배중이던 [[송시열]]에 대한 처벌문제를 놓고 영의정 [[허적|허적(許積)]]의 의견에 맞서 가혹하게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로 인해 [[남인]]은 [[송시열]]의 처벌에 온건론을 주장하던 [[탁남|탁남(濁南)]]과 [[청남|청남(淸南)]]으로 갈라졌고, 그는 [[청남]]의 영수가 되었다. 그 뒤 [[지덕사|지덕사(至德祠)]]의 창건을 건의하고, [[체부|체부(體府)]]·[[오가작통법|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지패법|지패법(紙牌法)]]·[[축성|축성(築城)]] 등을 반대했으며, 그 해 왕으로부터 궤장(几杖)이 하사되었다. 이듬해 차자(箚子)를 올려 치병사(治兵事)·조병거(造兵車) 등 시폐(時弊)를 논하였다.<ref>송찬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049 허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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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환국]]으로 권력을 잃고 낙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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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7년 [[비변사]]를 폐지하고 북벌준비를 위해 [[체부]]를 설치할 것과 재정보전책으로 [[호포법|호포법(戶布法)]] 실시를 주장하는 [[윤휴|윤휴(尹鑴)]]에 맞서 그 폐(弊)를 논하고 반대하였다. 이듬해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해, 나라에서 집을 지어주자 [[은거당|은거당(恩居堂)]]이라 명명하였다. 1679년 강화도에서 투서(投書)의 역변(逆變)이 일어나자 상경해 영의정 [[허적]]의 전횡을 맹렬히 비난하는 소를 올렸다. 이듬해 [[경신환국|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자 관작을 삭탈당하고 고향에서 저술과 후진양성에 전심하였다.<ref>송찬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049 허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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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근기남인]] 중심의 새로운 학풍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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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전반 조선 학자들의 학문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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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조선의 학자들은 [[임진왜란|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와해된 사회질서를 재건하고, 상처 받은 자부심을 회복함으로써 도덕국가를 건설한다는 방향 설정 아래 일로 매진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제압하고 중원의 주인이 된 [[청나라|여진족인 청]]에 대한 복수를 해야 한다는 [[북벌론|북벌론(北伐論)]]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또한 전쟁으로 실추된 국가와 개인의 도덕심을 고양하기 위한 예치가,  대외, 대내 정책의 기본 방향이 되었다.<ref>이정민,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104 허목 (許穆)]",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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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후반 일어난 [[예송논쟁]]과 [[남인]]과 [[서인]]의 학풍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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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후반 [[조선 현종|현종]]과 [[조선 숙종|숙종]]에 이르러서 예의 구체적인 실현이 정치 문제로까지 발전되어 두 차례 예송(禮訟) 논쟁이 일어났다. 이는 예송을 주도한 두 세력인 [[남인]]과 [[서인]]의 다른 학풍에서 기인한 것으로, [[서인]]은 [[주희]]의 『 [[주자가례|주자가례(朱子家禮)]]』를 원형으로 17세기 전반기에 쏟아져 나온 『 [[가례집람|가례집람(家禮輯覽)]]』 등의 예서를 중요시하고, 국가 의례인 『 [[국조오례|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등을 근거로 내세웠다. 그러나 [[남인]]은 [[고례]] 즉 『 [[예기|예기(禮記)]]』 『[[주례|주례(周禮)]]』 『[[의례|의례(儀禮)]]』에 이론적 근거를 두고 있었다. 이러한 차별성은 [[서인]] 계열이 [[주자성리학]]을 신봉하고, [[남인]] 계열이 [[고례]]인 [[육경]]을 근거로 하는 [[고학|고학풍]]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고학|고학풍]]은 이미 17세기 초 서울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발생한 새로운 학풍의 형성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이 시기 서울에서는 [[성리학]] 본래의 정신을 살리기 위해서 이단적 조류들을 절충하여 새로운 학풍을 형성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수광|이수광(李睟光)]], [[최명길|최명길(崔鳴吉)]], [[장유|장유(張維)]], [[유몽인|유몽인(柳夢寅)]], [[허균|허균(許筠)]], [[신흠|신흠(申欽)]], [[이식|이식(李植)]], [[이정구|이정구(李廷龜)]], [[한백겸|한백겸(韓百謙)]] 등이 그러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문학에서 [[당나라]] 시와 [[진한의 고문]]에 능하였고, [[경학]]에서는 6경을 중시하면서 [[제자백가]]와 [[도가]], [[양명학]], [[선불교]] 등에 대해서도 포용적 태도를 취하였다.<ref>이정민,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104 허목 (許穆)]",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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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조선의 학풍을 [[서인]]이 주도하는 상황에서 나타난 [[근기남인]] 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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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초반 [[고학|고학풍]]을 위시한 비성리학풍은 [[인조반정]]과 [[호란]] 이후 서울 중심의 새로운 학풍은 냉각되고, 오히려 [[주자성리학]]이 강화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남송]]의 이민족에 대한 반감을 배경으로 성립된 [[주자학]]의 명분론이 북벌주의를 내세우며 자강을 도모하던 [[서인]]층에 호소력을 주었으며 [[호란]]으로 상처받은 정서를 통합하는데 기여하였다. 그리하여 17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도 [[서인]]과 노론이 집권하던 [[주자성리학]]이 주도적인 시기였다. 그러므로 [[서인]]과의 정쟁에서 밀려나 서울 부근 100리 권의 농촌에서 생활하던 [[근기남인]]들은 17세기 초반 새롭게 등장한 학풍을 꾸준히 계승 발전시키면서 [[서인]] 주류와 다른 야당의 학풍을 형성하였다. 그들은 [[사화]]와 [[당쟁]]을 겪으며 향촌에 은거한 지식인들 사이에서, 심신의 연마를 위한 [[수련도교]]가 유행하였다. [[수련도교]]의 유행은 당시 성리학주류 사회에서도 [[도교]]에 대한 관심을 가진 학자들을 배출시키기도 하였다. [[경학]]에 있어서 이들은 고문운동을 한 단계 발전시켜서 6경 중심의 [[고학]]을 성립시켰다. 문학에서도 인간의 자연스러운 마음인 [[천기|천기(天機)]]를 중요시하는 [[당나라]]의 시와 [[진한 고문]]이 유행하였다. [[근기남인]]은 [[인조반정]]으로 [[조선 광해군|광해군]]의 [[북인]]이 몰락한 후 [[남인]]에 편입된 세력으로, {{PAGENAME}}은 바로 [[근기남인]]의 대표적 인물이었다.<ref>이정민,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104 허목 (許穆)]",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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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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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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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NAME}}||[[허교]]||A는 B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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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NAME}}||[[조선 인조|인조]]||A는 B는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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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조|인조]]||[[병자호란]]||A는 B와 관련이 있다||163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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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NAME}}||[[상례편]]||A는 B를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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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NAME}}||[[조선 효종|효종]]||A는 B와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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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벌정책]]||{{PAGENAME}}||A는 B와 관련이 있다||165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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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벌정책]]||[[송시열]]||A는 B와 관련이 있다||165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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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벌정책]]||[[송준길]]||A는 B와 관련이 있다||165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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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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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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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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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초상화_인물_허목_01_초상.JPG| 허목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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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초상화_인물_허목_02_허목_필적.JPG| 허목의 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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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초상화_인물_허목_03_미수_허목의_묘.JPG| 미수 허목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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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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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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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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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읽을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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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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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걸, 「미수 許穆과 嶺南學脈」, 『退溪學과 韓國文化』, Vol 33, 2003, 33-64쪽.
 +
**이재호, 「미수(眉壽) 허목(許穆)의 성리학적(性理學的) 수양론(修養論) 이해」, 『退溪學報』, Vol 131, 2012, 83-122쪽. 
 +
 +
===유용한 정보===
 +
*송찬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049 허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정민,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104 허목 (許穆)]",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
 
[[분류: 한글고문서_인물기사]]
 
[[분류: 한글고문서_인물기사]]
 
[[분류:이창섭]]
 
[[분류:이창섭]]

2017년 8월 11일 (금) 01:05 판

허목(許穆)
파일:초상화 인물 허목 01 초상.JPG
이명기, "허목 초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표명칭 허목
한자표기 許穆
생몰년 1595년-1682년
본관 양천(陽川)
시호 문정(文正)
수(眉叟)
문보(文甫)·화보(和甫)
시대 조선시대
국적 조선
대표저서 기언
대표직함 우의정
허교(許喬))
성격 문신
유형 문인



정의

인조시기 부터 숙종시기까지 활약했던 조선 후기의 문신.

내용

허목의 가계정보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문보(文甫)·화보(和甫), 호는 미수(眉叟)이다. 찬성 허자(許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별제 허강(許橿)이고, 아버지는 현감 허교(許喬)이며, 어머니는 정랑 임제(林悌)의 딸이다. 부인은 영의정 원익(李元翼)의 손녀이다.[1]

인조시기 허목의 생애

1615년(광해군 7) 정언눌(鄭彦訥)에게 글을 배우고, 1617년 거창현감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가서 문위(文緯)를 사사하였다. 또한 그의 소개로 정구(鄭逑)를 찾아가 스승으로 섬겼다. 1626년(인조 4) 인조의 생모 계운궁 구씨(啓運宮具氏)의 복상(服喪)문제와 관련해 유신(儒臣) 박지계(朴知誡)원종의 추숭론(追崇論)을 제창하자, 동학의 재임(齋任)으로서 임금의 뜻에 영합해 예를 혼란시킨다고 유벌(儒罰)을 가하였다. 이에 인조는 그에게 정거(停擧: 일정 기간 동안 과거를 못 보게 하던 벌)를 명하였다. 뒤에 벌이 풀렸는데도 과거를 보지 않고 자봉산에 은거해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을 당해 영동(嶺東)으로 피난했다가 이듬해 강릉·원주를 거쳐 상주에 이르렀으며, 1638년에는 의령의 모의촌(慕義村)에서 살다가 1641년 다시 사천으로 옮겼다. 그 뒤 창원·칠원(漆原) 등지로 전전하다가 1646년 마침내 경기도 연천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음 해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상중에 『경례유찬(經禮類纂)』을 편찬하기 시작해 3년 뒤에는 『상례편(喪禮篇)』을 완성하였다. [2]

효종시기 관직에 나아가다

1650년(효종 1) 정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1개월 만에 사임하였다. 이듬해 내시교관이 된 뒤 조지서별좌(造紙署別坐)·공조좌랑 등을 거쳐 용궁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57년 공조정랑에 이어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효종을 만나 소를 올려 군덕(君德)과 정폐(政弊)를 논하고 사임을 청하였다. 그 뒤 사복시주부로 옮겼으나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659년 장령이 되어 군덕을 논하는 소를 올렸으며, 또한 당시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이 주도하는 북벌청책에 신중할 것을 효종에게 간하는 옥궤명(玉几銘)을 지어 바쳤다. 이어 둔전의 폐단을 논하였다. 그 해 효종이 죽자 소를 올려 상례를 논했고,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3]

1차 예송논쟁과 허목

1660년(현종 1) 경연(經筵)에 출입했고, 다시 장령이 되었다. 그 때 효종에 대한 조대비(趙大妃: 인조의 繼妃)의 복상기간이 잘못되었으므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상소해 정계에 큰 파문을 던졌다. 이를 기해복제라 한다. 당시 송시열서인(西人)은 『경국대전』에 의거해 맏아들과 중자(衆子)의 구별 없이 조대비는 기년복(朞年服: 1年喪)을 입어야 한다고 건의해 그대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실은 의례(儀禮) 주소(註疏: 경서 등에 해석을 덧붙인 것)에 의거해 효종체이부정(體而不正), 즉 아들이기는 하지만 맏아들이 아닌 "서자" 에 해당된다고 해석해 기년복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효종이 왕위를 계승했고 또 종묘의 제사를 주재해 사실상 맏아들 노릇을 했으니 어머니의 맏아들에 대한 복으로서 "자최삼년(齊衰三年)"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복제논쟁의 시비로 정계가 소란해지자 왕은 그를 삼척부사로 임명하였다. 여기서 그는 향약을 만들어 교화에 힘썼으며, 『척주지(陟州誌)』를 편찬하는 한편, 『정체전중설(正體傳重說)』을 지어 삼년설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였다.[4]

2차 예송논쟁과 허목 권력의 정점에 서다

1674년 효종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조대비의 복제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다. 조정에서는 대공복(大功服)으로 9개월을 정했으나 대구 유생 도신징(都愼徵)의 상소로 다시 기해복제가 거론되었다.『경국대전』에 따르면 맏아들·중자의 구별 없이 부모는 아들을 위해 기년복을 입는다고 규정했으나, 며느리의 경우 맏며느리는 기년, 중자처는 대공으로 구별해 규정하였다. 그런데 인선왕후에게 대공복(大功服)을 적용함은 중자처(衆子妻)로 대우함이고, 따라서 효종을 중자로 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근거는 『경국대전』이 아니라 "고례(古禮)의 체이부정설"이었다. 이는 "효종의 복제와 모순되는 것"으로서 새로 즉위한 숙종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이러한 일로 송시열서인은 몰리게 되고 그의 견해가 받아들여져 대공복기년복으로 고치게 되었다. 이로써 서인은 실각하고 남인의 집권과 더불어 그는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사직소를 올렸고, 병이 나자 숙종은 어의를 보내어 간호하기까지 하였다. 1675년(숙종 1) 이조참판·비국당상(備局堂上)·귀후서제조(歸厚署提調) 등을 거쳐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진하고, 의정부우참찬 겸 성균관제조로 특진하였다. 이어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승진되어 과거를 보지 않고도 유일(遺逸)로서 삼공(三公)에 올랐다. [5]

송시열을 향한 정치적 복수와 당파가 갈라지다

그 해 덕원(德源)에 유배중이던 송시열에 대한 처벌문제를 놓고 영의정 허적(許積)의 의견에 맞서 가혹하게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로 인해 남인송시열의 처벌에 온건론을 주장하던 탁남(濁南)청남(淸南)으로 갈라졌고, 그는 청남의 영수가 되었다. 그 뒤 지덕사(至德祠)의 창건을 건의하고, 체부(體府)·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지패법(紙牌法)·축성(築城) 등을 반대했으며, 그 해 왕으로부터 궤장(几杖)이 하사되었다. 이듬해 차자(箚子)를 올려 치병사(治兵事)·조병거(造兵車) 등 시폐(時弊)를 논하였다.[6]

경신환국으로 권력을 잃고 낙향하다

1677년 비변사를 폐지하고 북벌준비를 위해 체부를 설치할 것과 재정보전책으로 호포법(戶布法) 실시를 주장하는 윤휴(尹鑴)에 맞서 그 폐(弊)를 논하고 반대하였다. 이듬해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해, 나라에서 집을 지어주자 은거당(恩居堂)이라 명명하였다. 1679년 강화도에서 투서(投書)의 역변(逆變)이 일어나자 상경해 영의정 허적의 전횡을 맹렬히 비난하는 소를 올렸다. 이듬해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자 관작을 삭탈당하고 고향에서 저술과 후진양성에 전심하였다.[7]

17세기 근기남인 중심의 새로운 학풍 형성

17세기 전반 조선 학자들의 학문적 배경

17세기 조선의 학자들은 임진왜란(壬辰倭亂)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와해된 사회질서를 재건하고, 상처 받은 자부심을 회복함으로써 도덕국가를 건설한다는 방향 설정 아래 일로 매진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제압하고 중원의 주인이 된 여진족인 청에 대한 복수를 해야 한다는 북벌론(北伐論)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또한 전쟁으로 실추된 국가와 개인의 도덕심을 고양하기 위한 예치가, 대외, 대내 정책의 기본 방향이 되었다.[8]

17세기 후반 일어난 예송논쟁남인서인의 학풍 비교

17세기 후반 현종숙종에 이르러서 예의 구체적인 실현이 정치 문제로까지 발전되어 두 차례 예송(禮訟) 논쟁이 일어났다. 이는 예송을 주도한 두 세력인 남인서인의 다른 학풍에서 기인한 것으로, 서인주희의 『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원형으로 17세기 전반기에 쏟아져 나온 『 가례집람(家禮輯覽)』 등의 예서를 중요시하고, 국가 의례인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등을 근거로 내세웠다. 그러나 남인고례 즉 『 예기(禮記)』 『주례(周禮)』 『의례(儀禮)』에 이론적 근거를 두고 있었다. 이러한 차별성은 서인 계열이 주자성리학을 신봉하고, 남인 계열이 고례육경을 근거로 하는 고학풍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고학풍은 이미 17세기 초 서울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발생한 새로운 학풍의 형성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이 시기 서울에서는 성리학 본래의 정신을 살리기 위해서 이단적 조류들을 절충하여 새로운 학풍을 형성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수광(李睟光), 최명길(崔鳴吉), 장유(張維), 유몽인(柳夢寅), 허균(許筠), 신흠(申欽), 이식(李植), 이정구(李廷龜), 한백겸(韓百謙) 등이 그러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문학에서 당나라 시와 진한의 고문에 능하였고, 경학에서는 6경을 중시하면서 제자백가도가, 양명학, 선불교 등에 대해서도 포용적 태도를 취하였다.[9]

17세기 조선의 학풍을 서인이 주도하는 상황에서 나타난 근기남인 학파

17세기 초반 고학풍을 위시한 비성리학풍은 인조반정호란 이후 서울 중심의 새로운 학풍은 냉각되고, 오히려 주자성리학이 강화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남송의 이민족에 대한 반감을 배경으로 성립된 주자학의 명분론이 북벌주의를 내세우며 자강을 도모하던 서인층에 호소력을 주었으며 호란으로 상처받은 정서를 통합하는데 기여하였다. 그리하여 17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도 서인과 노론이 집권하던 주자성리학이 주도적인 시기였다. 그러므로 서인과의 정쟁에서 밀려나 서울 부근 100리 권의 농촌에서 생활하던 근기남인들은 17세기 초반 새롭게 등장한 학풍을 꾸준히 계승 발전시키면서 서인 주류와 다른 야당의 학풍을 형성하였다. 그들은 사화당쟁을 겪으며 향촌에 은거한 지식인들 사이에서, 심신의 연마를 위한 수련도교가 유행하였다. 수련도교의 유행은 당시 성리학주류 사회에서도 도교에 대한 관심을 가진 학자들을 배출시키기도 하였다. 경학에 있어서 이들은 고문운동을 한 단계 발전시켜서 6경 중심의 고학을 성립시켰다. 문학에서도 인간의 자연스러운 마음인 천기(天機)를 중요시하는 당나라의 시와 진한 고문이 유행하였다. 근기남인인조반정으로 광해군북인이 몰락한 후 남인에 편입된 세력으로, 허목은 바로 근기남인의 대표적 인물이었다.[10]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허목 허교 A는 B의 아들이다
정언눌 허목 A는 B의 스승이다
정구 허목 A는 B의 스승이다
허목 인조 A는 B는 관련이 있다
인조 병자호란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36년
허목 경례유찬 A는 B를 저술하였다
허목 상례편 A는 B를 저술하였다
허목 효종 A는 B와 관련이 있다
북벌정책 허목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59년
북벌정책 효종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59년
북벌정책 송시열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59년
북벌정책 송준길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59년
옥궤명 효종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59년
1차 예송논쟁 인조의 계비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59년
1차 예송논쟁 허목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59년
1차 예송논쟁 송시열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59년
1차 예송논쟁 서인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59년
1차 예송논쟁 남인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59년
허목 척주지 A는 B를 저술하였다
허목 정체전중설 A는 B를 저술하였다
1차 예송논쟁 정체전중설 A는 B와 관련이 있다
2차 예송논쟁 숙종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74년
2차 예송논쟁 허목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74년
2차 예송논쟁 송시열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74년
2차 예송논쟁 인선왕후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74년
2차 예송논쟁 서인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74년
2차 예송논쟁 남인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74년
청남 허목 A는 B를 포함한다 1675년
탁남 허적 A는 B를 포함한다 1675년
남인 청남 A는 B를 포함한다 1675년
남인 탁남 A는 B를 포함한다 1675년
경신환국 허적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80년
경신환국 숙종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80년
경신환국 남인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80년
광해군 북인 A는 B와 관련이 있다
북인 근기남인 A는 B를 포함한다
남인 근기남인 A는 B를 포함한다
근기남인 허목 A는 B를 포함한다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659년 허목은 1차 예송논쟁 과 관련이 있다
1674년 허목은 2차 예송논쟁 과 관련이 있다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송찬식, "허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송찬식, "허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송찬식, "허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송찬식, "허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송찬식, "허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송찬식, "허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7. 송찬식, "허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8. 이정민, "허목 (許穆)",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9. 이정민, "허목 (許穆)",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10. 이정민, "허목 (許穆)",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더 읽을 거리

  • 논문
    • 안병걸, 「미수 許穆과 嶺南學脈」, 『退溪學과 韓國文化』, Vol 33, 2003, 33-64쪽.
    • 이재호, 「미수(眉壽) 허목(許穆)의 성리학적(性理學的) 수양론(修養論) 이해」, 『退溪學報』, Vol 131, 2012, 83-122쪽.

유용한 정보

  • 송찬식, "허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정민, "허목 (許穆)",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