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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문동은 인왕산 자락이 내려와 운종가와 만나는 지역으로 산을 등지고 평지를 안고 있어 주거지로 적합한 지역이다. 이곳에 광해군의 이복동생이자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定遠君, 元宗으로 추존)의 집이 있었는데, 정원군과 그 셋째 아들 능창군(綾昌君)은 인망을 얻는 다는 이유로 광해군에게 주목을 받다가 능찬군은 1615년에 광해군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 집은 관에 몰수되었다. 광해군은 그 지역에 궁궐을 지어야 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여 궁궐을 짓고 이름을 [[경덕궁|경덕궁(慶德宮)]]이라 했으니 오늘의 [[경희궁]]이다.<ref>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1999, 215쪽.</ref> <br /> | 새문동은 인왕산 자락이 내려와 운종가와 만나는 지역으로 산을 등지고 평지를 안고 있어 주거지로 적합한 지역이다. 이곳에 광해군의 이복동생이자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定遠君, 元宗으로 추존)의 집이 있었는데, 정원군과 그 셋째 아들 능창군(綾昌君)은 인망을 얻는 다는 이유로 광해군에게 주목을 받다가 능찬군은 1615년에 광해군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 집은 관에 몰수되었다. 광해군은 그 지역에 궁궐을 지어야 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여 궁궐을 짓고 이름을 [[경덕궁|경덕궁(慶德宮)]]이라 했으니 오늘의 [[경희궁]]이다.<ref>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1999, 215쪽.</ref> <br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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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8일 (화) 15:22 판
목차
정의
서울에 있는 궁궐의 하나로, 1617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1623년에 완공됐다. 인조 이후에는 법궁 동궐인 창덕궁에 버금가는 이궁 서궐이었으나, 현재 크게 파손되어 원형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내용
역사
광해군(光海君)(1575~1641, 재위 1608∼1623)이 즉위하면서 궁궐 중건 사업이 활발히 추진되어 창덕궁과 창경궁이 국왕이 임어(臨御)하는 궁궐이 되었다. 1616년 이궁(離宮)으로서 궁궐을 짓자는 논의가 다시 시작되어 인경궁(仁慶宮) 영건 공사가 시작되던 1617년 새문동(塞門洞)에 왕기가 있으니 그 지역에 새 궁궐을 지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건립되었다.[1]
새문동은 인왕산 자락이 내려와 운종가와 만나는 지역으로 산을 등지고 평지를 안고 있어 주거지로 적합한 지역이다. 이곳에 광해군의 이복동생이자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定遠君, 元宗으로 추존)의 집이 있었는데, 정원군과 그 셋째 아들 능창군(綾昌君)은 인망을 얻는 다는 이유로 광해군에게 주목을 받다가 능찬군은 1615년에 광해군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 집은 관에 몰수되었다. 광해군은 그 지역에 궁궐을 지어야 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여 궁궐을 짓고 이름을 경덕궁(慶德宮)이라 했으니 오늘의 경희궁이다.[2]
인조가 즉위한지 1년이 못돼 1624년 이괄(李适, 1587~1624)이 반정을 일으켜 창덕궁과 창경궁이 크게 불타 인조는 경희궁에서 9년을 거주하면서 이궁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1760년 인조의 아버지 원종의 시호 ‘경덕(慶德)’과 음이 같다는 이유로 경희궁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하여 ‘동궐(東闕)’이라 하고, 경덕궁을 ‘서궐(西闕)’이라 부르게 되었다.[3]
고종 초에 경복궁을 중건하고 법궁으로 삼아 임어하면서 경희궁은 더 이상 왕이 임어하지 않는 빈 궁궐이 되어 창고나 다른 용도로 쓰이는 정도였지만 궁궐로 존중해 궁궐로서의 외양은 유지하게 했다. 그러나 고종이 강제 퇴위를 당하고 순종이 왕이 되는 융희연간에 들어서 급속도로 훼손되고 파괴되어 경복궁과 경희궁은 그 대지와 건물이 총독부 소유로 넘어가게 되었다. 총독부충학교 설립을 위해 경희궁을 침범해 기존의 건물들을 대부분 헐어 없앴고, 높은 곳은 깎는 등 지형도 변형시켜 경희궁은 궁궐로서의 면모를 거의 잃어버렸다. 일본은 그 후에도 경희궁 동편에 전매국 관사를 짓고, 도로를 만들었으며, 조계사에 매각시키고, 기숙사로도 사용하게 하면서 1920년대를 지나 경희궁의 건물은 거의 소멸되었다.[4]
현재
경희궁은 옛 건물이 하나도 없는 상태로, 현재 경희궁 터에는 현대건설, 서울시립박물관 등이 자리하고 있다.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은 경희궁의 동남쪽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어야하는데, 그곳에 구세군 빌딩이 들어서 서쪽으로 자리를 바꿔 남쪽을 바로보고 위치하게 했다. 경희궁의 법전인 숭정전은 1926년 일본에 의해 조계사로 팔렸던 자리에 다시 동국대학교가 들어서면서, 정각원(正覺院)이라는 건물이 되고 정작 경희궁에는 새 건물을 지어 숭정전이라고 한다.[5]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인조 | 경희궁 | A는 B에 머물렀다 | |
선의왕후 | 경희궁 | A는 B에 승하했다 | |
순조 | 경희궁 | A는 B에 승하했다 |
시간정보
시간 | 내용 |
---|---|
1730년 | 선의왕후가 경덕궁의 어조당에서 승하하였다 |
1760년 | 경덕궁에서 경희궁으로 이름을 변경했다 |
1834년 | 순조가 경희궁의 회상전에서 승하하였다 |
1834년 | 순조는 경희궁의 장락전에 빈전을 차렸다 |
공간정보
시각자료
갤러리
완전히 없어지기 전 경희궁의 모습[6]
영상
주석
- ↑ 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1999, 214쪽.
- ↑ 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1999, 215쪽.
- ↑ 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1999, 216쪽.
- ↑ 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1999, 216~219쪽.
- ↑ 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1999, 220~223쪽.
- ↑ 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1999, 220쪽.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이강근, 『한국의 궁궐』, 대원사, 1991.
- 이태호, 『그림으로 본 옛 서울』, 서울학연구소, 1995.
- 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