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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8일 (화) 14:43 판
최덕지(崔德之) | |
대표명칭 | 최덕지 |
---|---|
한자표기 | 崔德之 |
생몰년 | 1384년-1455년 |
본관 | 전주(全州) |
호 | 연촌(烟村), 존양(存養) |
자 | 가구(可久), 우수(迂叟) |
시대 | 조선시대 |
국적 | 조선 |
대표직함 |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 |
부 | 최담(崔霮) |
정의
내용
개요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가구(可久). 호는 연촌(烟村)·존양(存養). 최용봉(崔龍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을인(崔乙仁)이고, 아버지는 참의 최담(崔霮)이며, 어머니는 박인부(朴仁夫)의 딸이다.
업적
1405년(태종 5)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한 뒤 추천을 받아 사관이 되었고, 1409년 교서관정자로서 원구단(圜丘壇)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오제제문(五帝祭文)을 준비 못하여 한때 투옥되었다. 뒤에 감찰 등 삼사(三司)의 청요직(淸要職)을 거쳐, 외관으로 김제군수·남원부사 등 여러 주·군을 다스렸다. 남원부사를 사퇴한 뒤 영암의 영보촌(永保村)에 내려가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는데 이때 존양(存養)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문종이 즉위하자 그를 불러 예문관직제학에 임명,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였으나 그는 아직 치사할 나이가 안 되었는데도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당시 풍습으로 볼 때 명예로운 직책을 사임하고 귀향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므로 동료들은 그의 높은 덕과 행동을 칭송하며, 다투어 시부를 지어주고 노자를 마련하여 주었다. 72세에 죽으니 영암의 주민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하고 존양사(存養祠)라 이름지었다. 그는 세종 때 배출된 많은 학자 중 한 사람으로 정치적 격동에 휘말려들지 않고 문신이자 학자로서 명예로운 삶을 마쳤다. 전주의 서산사(西山祠), 남원의 주암서원(舟巖書院), 영암의 녹동서원(鹿洞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1]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최견일 | 최치원 | A는 B의 어버이이다 | |
최치원 | 사산비명 | A는 B를 저술하였다 | |
최치원 | 토황소격문 | A는 B를 저술하였다 | |
최치원 | 계원필경 | A는 B를 저술하였다 | |
최치원 | 시무십여조 | A는 B를 저술하였다 | |
최치원 | 신라 진성여왕 | A는 B와 관련있다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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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8년 | 최치원이 당나라로 유학을 갔다. |
874년 | 당나라에서 빈공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
토황소격문을 저술하였다. | |
886년 | 계원필경을 신라 정강왕에게 바쳤다. |
894년 | 신라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여조를 올렸다. |
사산비명을 저술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