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두 판 사이의 차이
(→설명) |
(→생애 및 업적) |
||
41번째 줄: | 41번째 줄: | ||
405-406년 후연(後燕)의 모용희의 침입을 2번 받았으나 요동성(遼東城)과 목저성(木底城)에서 모두 격퇴하였다. 407년 고구려 왕족 출신인 고운(高雲)이 모용희를 죽이고 자립하자 수교를 맺기도 하였다.<br/> | 405-406년 후연(後燕)의 모용희의 침입을 2번 받았으나 요동성(遼東城)과 목저성(木底城)에서 모두 격퇴하였다. 407년 고구려 왕족 출신인 고운(高雲)이 모용희를 죽이고 자립하자 수교를 맺기도 하였다.<br/> | ||
410년에는 동부여(東夫餘)를 정벌하여 64성을 함락하고 동부여를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에 두게 되었다. 또한 남으로는 한강까지 진출하였으며 서쪽으로는 후연을 격파하고 요동지역을 확보함으로써 만주를 장악하였다. | 410년에는 동부여(東夫餘)를 정벌하여 64성을 함락하고 동부여를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에 두게 되었다. 또한 남으로는 한강까지 진출하였으며 서쪽으로는 후연을 격파하고 요동지역을 확보함으로써 만주를 장악하였다. | ||
+ | ===사후=== | ||
+ | 『[[삼국사기]]』에 의하면 413년 39세라는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414년 능(陵)에 옮겨 묻고 생전의 훈적을 기록한 능비(陵碑)를 건립하였다. 능과 능비는 지금도 중국 길림성 집안현(集安縣)에 남아 있는데, 능에 대해서는 장군총(將軍塚)설과 태왕릉(太王陵)설이 갈라져 있다. 또한 능비의 이른바 신묘년 기사는 한국·중국·일본 3국 학계에서 소위 '임나일본부설'의 원천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5057 광개토대왕]",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해당 부분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 ||
+ | {{Blockquote|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 |출처="[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70127021007&wlog_tag3=naver 20여년의 발품 ‘진실’이라 믿고 책으로 펴냈다]",『서울신문』, 작성일:2017년 1월 26일.}} | ||
=='''지식 관계망'''== | =='''지식 관계망'''== |
2017년 8월 7일 (월) 18:17 판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 |
대표명칭 | 광개토대왕 |
---|---|
한자표기 | 廣開土大王 |
생몰년 | 374년-412년(413년) |
이칭 | 영락대왕(永樂大王), 호태왕(好太王) |
시호 |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
시대 | 삼국 |
국적 | 고구려 |
전임자 | 고국양왕 |
후임자 | 장수왕 |
유형 | 왕 |
목차
정의
고구려 19대 왕(재위391-412)으로 한국 역대 왕조 최초로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동예를 복속하고 동부여를 정벌하는 등 만주 일대를 장악하고 한강 이북 땅을 통합하여 고구려 전성 시대를 이루었다.
설명
생애 및 업적
휘는 담덕(談德) 또는 안(安). 18대 고국양왕의 아들로, 386년(고국양왕3년) 태자가 되고 391년 즉위하였다.
백제와는 즉위초부터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여 석현성(개품군 복면 청석동), 관미성(예성강 하류설, 강화 교동도설)등을 함락시키고 396년(재위 6년)에는 수근을 이끌고 친정에 나서 백제를 정벌하여 58성 700촌락을 차지하였으며 백제의 아신왕으로부터 항복 문서를 받고 그 아우와 대신들을 인질로 잡아 오는 큰 전과를 올렸다.
세력만회를 꾀하는 백제가 왜(倭)를 끌여들여 399년 신라를 침공하자 신라 내물왕의 요청으로 기병과 보병 5만을 원군으로 보내어 왜를 가야지역가지 추격하여 궤멸시켰다.
400년 후연왕 모용성(慕容盛)이 소자하(蘇子河) 유역에 위치한 고구려의 남소성(南蘇城)과 신성(新城)을 침공해 오자, 402년 요하를 건너 평주(平州)의 중심지인 숙군성(宿軍城)을 공격하여 평주자사 모용귀를 도망치게 하였고 신성(新城)·남소(南蘇)의 2성 등 700여 리의 땅을 탈취하였다.
405-406년 후연(後燕)의 모용희의 침입을 2번 받았으나 요동성(遼東城)과 목저성(木底城)에서 모두 격퇴하였다. 407년 고구려 왕족 출신인 고운(高雲)이 모용희를 죽이고 자립하자 수교를 맺기도 하였다.
410년에는 동부여(東夫餘)를 정벌하여 64성을 함락하고 동부여를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에 두게 되었다. 또한 남으로는 한강까지 진출하였으며 서쪽으로는 후연을 격파하고 요동지역을 확보함으로써 만주를 장악하였다.
사후
『삼국사기』에 의하면 413년 39세라는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414년 능(陵)에 옮겨 묻고 생전의 훈적을 기록한 능비(陵碑)를 건립하였다. 능과 능비는 지금도 중국 길림성 집안현(集安縣)에 남아 있는데, 능에 대해서는 장군총(將軍塚)설과 태왕릉(太王陵)설이 갈라져 있다. 또한 능비의 이른바 신묘년 기사는 한국·중국·일본 3국 학계에서 소위 '임나일본부설'의 원천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1] 해당 부분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 | ||
출처: "20여년의 발품 ‘진실’이라 믿고 책으로 펴냈다",『서울신문』, 작성일:2017년 1월 26일. |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고구려 광개토대왕 | 고구려 고국양왕 | A는 B의 아들이다 | |
고구려 광개토대왕 | 고구려 장수왕 | A는 B의 아버지이다 | |
고구려 광개토대왕 | 후연 | A는 B을 공격하였다 | |
고구려 광개토대왕 | 광개토대왕비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고구려 광개토대왕 | 장군총 | A는 B과 관련이 있다 | |
고구려 광개토대왕 | 광개토대왕명호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고구려 광개토대왕 | 이종상-광개토대왕의 영토 확장 | A는 B의 소재이다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391년 |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즉위하였다 |
392년 |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공격하였다 |
393년 |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평양에 9사(寺) 창건하였다 |
396년 |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아신왕을 항복시켰다 |
397년 |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요동성을 점령하였다 |
398년 |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숙신을 정벌하였다 |
400년 |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백제·왜연합군을 격파하였다 |
402년 |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숙군성을 공격하였다 |
410년 |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동부여를 통합하였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41.145080 | 126.214245 | 광개토대왕비는 중국 지린성 지안현 퉁거우에 있다 |
35.829701 | 129.227830 | 경주박물관이 광개토대왕명호우를 소장하고 있다 |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 초상화 광개토대왕 표준영정.png
영상
- 고구려-광개토대왕,장수왕(
『EBS클립뱅크』online , EBS.)
주석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단행본
- 대한민국국회의원동우회, 『민족기록화 전승편』, 한국도서출판공사, 1981.
- 웹자원
더 읽을거리
- 단행본
- 배경석, 『광개토대왕비』, 서예문인화, 2012.
- 학술논문
- 윤명철, 「광개토대왕의 대외정책과 동아지중해의 질서재편」,『고구려발해연구』제2권, 고구려발해학회, 1996, 659-680쪽.
- 김영하, 「광개토대왕의 정복기사해석 : 신묘년기사의 재검토와 관련하여」, 『한국고대사연구』제66권, 한국고대사학회, 2012, 209-25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