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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3년(경종 3) 생원이 되었고 참봉을 지내다가, 1736년(영조 12)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이 되었다. 집의, 승지 예조참판 등을 거쳐 1740년(영조 16)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다음해 병조참판이 되었다. 1743년(영조 19) 한성 우윤, 강화 유수, 대사헌, 대사간을 역임했고 다음해 이조참판으로 재직중 동지사 겸 사은사의 부사로 청에 다녀왔다. 사행 중 국위를 손상시켰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1746년(영조 22) 병조참판으로 기용되었다. 대사간, 대사헌, 우참찬을 거쳐 1754년(영조 30) 예조판서가 되었다. 그 뒤에 우빈객, 판의금부사, 공조판서, 지돈녕부사, 판돈녕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773년(영조 49) [[기로소|기로소(耆老所)]]<ref>기로소(耆老所) : 조선시대 연로한 관원들을 예우하기 위하여 설치한 관서로, 본래 이름은 전함재추소(前銜宰樞所)였다가 치사기로소(致仕耆老所)로 변경되었고 약칭으로 기로소라 불렸다. 문과 출신 정 2품의 문관으로 70세 이상인 사람이 들어갔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1260&cid=46622&categoryId=4662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기로소]</ref> 당상으로 [[영조]]가 베푼 양로연에 참여하였다. | 1723년(경종 3) 생원이 되었고 참봉을 지내다가, 1736년(영조 12)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이 되었다. 집의, 승지 예조참판 등을 거쳐 1740년(영조 16)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다음해 병조참판이 되었다. 1743년(영조 19) 한성 우윤, 강화 유수, 대사헌, 대사간을 역임했고 다음해 이조참판으로 재직중 동지사 겸 사은사의 부사로 청에 다녀왔다. 사행 중 국위를 손상시켰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1746년(영조 22) 병조참판으로 기용되었다. 대사간, 대사헌, 우참찬을 거쳐 1754년(영조 30) 예조판서가 되었다. 그 뒤에 우빈객, 판의금부사, 공조판서, 지돈녕부사, 판돈녕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773년(영조 49) [[기로소|기로소(耆老所)]]<ref>기로소(耆老所) : 조선시대 연로한 관원들을 예우하기 위하여 설치한 관서로, 본래 이름은 전함재추소(前銜宰樞所)였다가 치사기로소(致仕耆老所)로 변경되었고 약칭으로 기로소라 불렸다. 문과 출신 정 2품의 문관으로 70세 이상인 사람이 들어갔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1260&cid=46622&categoryId=4662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기로소]</ref> 당상으로 [[영조]]가 베푼 양로연에 참여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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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마포구 상암동에 묘가 있으며, 2002년 월드컵 개최를 위해 경기장과 아파트 신축 공사를 하던 부지에서 복식이 발견되어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에서 발굴하여 보관하고 있다. 1792년(정조 16) ‘정간(靖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서울특별시 마포구 상암동에 묘가 있으며, 2002년 월드컵 개최를 위해 경기장과 아파트 신축 공사를 하던 부지에서 복식이 발견되어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에서 발굴하여 보관하고 있다. 1792년(정조 16) ‘정간(靖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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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실록』 | * 『영조실록』 |
2017년 8월 6일 (일) 23:35 판
이익정(李益炡) | |
대표명칭 | 이익정 |
---|---|
한자표기 | 李益炡 |
생몰년 | 1699년-1782년 |
본관 | 전주(全州) |
시호 | 정간(靖簡) |
자 | 명숙(明叔) |
시대 | 조선 |
대표직함 | 공조판서, 지돈녕부사, 판돈녕부사, 판의금부사 |
배우자 | 안상태의 딸 죽산 안씨 |
부 | 밀창군 이직 |
모 | 오시적의 딸 동복 오씨 |
자녀 | 참찬 이성규, 이우규 |
능묘 | 서울특별시 마포구 상암동 |
성격 | 인물 |
유형 | 백관 |
목차
정의
조선 후기의 백관 중 문관으로 판돈녕부사, 지돈녕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예조판서로 『풍양구궐유지비석수립의궤』의 책임을 맡았고, 공조참판으로 『목릉휘릉혜릉표석영건청의궤』를 편찬할 때 연건청 당상으로 책임을 맡았다. 1743년 영조가 주관한 활쏘기 의례인 대사례에 백관 중 문관 10인에 선발되어, 종친인 아버지 이직(李樴)(1677~1746)과 함께 참여했다.
내용
관직
1723년(경종 3) 생원이 되었고 참봉을 지내다가, 1736년(영조 12)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이 되었다. 집의, 승지 예조참판 등을 거쳐 1740년(영조 16)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다음해 병조참판이 되었다. 1743년(영조 19) 한성 우윤, 강화 유수, 대사헌, 대사간을 역임했고 다음해 이조참판으로 재직중 동지사 겸 사은사의 부사로 청에 다녀왔다. 사행 중 국위를 손상시켰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1746년(영조 22) 병조참판으로 기용되었다. 대사간, 대사헌, 우참찬을 거쳐 1754년(영조 30) 예조판서가 되었다. 그 뒤에 우빈객, 판의금부사, 공조판서, 지돈녕부사, 판돈녕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773년(영조 49) 기로소(耆老所)[1] 당상으로 영조가 베푼 양로연에 참여하였다.
사후
서울특별시 마포구 상암동에 묘가 있으며, 2002년 월드컵 개최를 위해 경기장과 아파트 신축 공사를 하던 부지에서 복식이 발견되어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에서 발굴하여 보관하고 있다. 1792년(정조 16) ‘정간(靖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이익정 | 대사례 | A는 B에 참여했다 | |
이익정의 복식 |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 |
이직 | 이익정 | A는 B의 아버지이다 | |
오시적 | 이익정 | A는 B의 외조부이다 | |
동복 오씨 | 이익정 | A는 B의 어머니이다 | |
안상태 | 이익정 | A는 B의 장인이다 | |
죽산 안씨 | 이익정 | A는 B의 아내이다 | |
이성규 | 이익정 | A는 B의 장남이다 | |
이우규 | 이익정 | A는 B의 차남이다 |
시간정보
공간정보
시각자료
갤러리
이익정 묘 출토 단령.[2]
영상
주석
- ↑ 기로소(耆老所) : 조선시대 연로한 관원들을 예우하기 위하여 설치한 관서로, 본래 이름은 전함재추소(前銜宰樞所)였다가 치사기로소(致仕耆老所)로 변경되었고 약칭으로 기로소라 불렸다. 문과 출신 정 2품의 문관으로 70세 이상인 사람이 들어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기로소
- ↑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명선 중』, 단국대학교출판부, 97쪽.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영조실록』
- 『정조실록』
- 『한국계행보』
-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명선 중』, 단국대학교출판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두산백과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1260&cid=46622&categoryId=46622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