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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8년 어느 날, 당나라로 떠나는 열두 살의 최치원에게 아버지는 말했다. | 868년 어느 날, 당나라로 떠나는 열두 살의 최치원에게 아버지는 말했다. |
2017년 7월 27일 (목) 11:05 판
최치원(崔致遠) | |
대표명칭 | 최치원 |
---|---|
한자표기 | 崔致遠 |
생몰년 | 857년-미상 |
본관 | 경주(慶州) |
자 | 고운(孤雲), 해운(海雲) |
출생지 | 경주(慶州) 사량부(沙梁部, 혹은 本彼部) |
시대 | 통일신라 |
대표저서 | 계원필경(桂苑筆耕), 사산비명(四山碑銘) |
대표직함 | 시독겸한림학사수병부시랑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 |
부 | 최견일(崔肩逸) |
목차
정의
신라 하대의 학자이자 문장가.
내용
개요
자는 고운(孤雲), 해운(海雲) 또는 해부(海夫)이다. 1023년(현종 14년)에 내사령(內史令)으로 추증되었으며, 문묘(文廟)에 배향되며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신라 6부의 하나인 ‘사량부(沙梁部, 지금의 경주)’에서 6두품의 신분으로 태어났으며, 오늘날 경주(慶州) 최씨의 시조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본피부(本彼部)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다.[1]
업적
당나라를 가다
868년 어느 날, 당나라로 떠나는 열두 살의 최치원에게 아버지는 말했다.
“10년 공부하여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라고 하지 말아라. 나 역시 아들이 있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가서 열심히 하거라.”
먼 곳으로 어린 아들을 보내는 아버지의 당부로는 지나치리만큼 매서운 이 말 속에는 대대로 문장과 학문으로 이름을 얻었던 최씨 집안 자손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6두품으로서 느끼는 한과 비애가 숨어 있었다. “네 살 때 글을 배우기 시작해 열 살 때 사서삼경을 읽었다.”라는 기록이 전할 만큼 총명한 아들이었지만 신라에서는 그 재능을 다 펼치기 어렵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아버지였다.
최치원은 신라 6두품 집안 출신이었다. 엄격한 골품제 사회였던 신라에서 6두품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신라 17관등 가운데 6등위에 해당하는 아찬 이상의 벼슬에는 오를 수 없었다. 골품제라는 한계 속에서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했던 6두품들은 당나라 유학의 길을 많이 선택했다. 837년 한 해 동안 당나라에 건너간 신라 유학생이 216명에 이를 정도로 당시 신라에서는 유학 열풍이 불고 있었다.
유학을 떠나는 최치원의 각오도 아버지 못지않았다. 당나라에 간 최치원은 “졸음을 쫓기 위해 상투를 매달고 가시로 살을 찌르며, 남이 백을 하는 동안 나는 천의 노력을 했다.”라는 기록을 남길 만큼 열심히 공부했다. 그 결과 6년 만인 874년, 18세의 나이로 빈공과에 합격했다. 그냥 합격도 아니고 장원이었다. 빈공과는 당나라에서 외국인을 위해 실시한 과거로 이 시험에 합격하면 당나라에서 벼슬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귀국 후 출세길이 보장된 엘리트코스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최치원 [崔致遠] - 유·불·선 통합을 주장했던, 신라 최고의 천재 (인물한국사)
황토소격문을 짓다
과거에 합격한 2년 뒤인 876년 율수현의 현위로 첫 관직에 올랐으나 이듬해 사직했고, 이후 회남 절도사 고변의 추천으로 관역순관이라는 비교적 높은 지위에 올랐다. 이 무렵 ‘황소의 난’이 일어났다. 소금장수였던 황소가 장안을 점령하고 스스로 황제를 칭하자, 고변은 이를 토벌하러 나가면서 최치원을 종사관으로 발탁했다. “황소가 읽다가 너무 놀라서 침상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라는 일화가 전하는 유명한 글 [토황소격문]이쓰인 것은 이때의 일이다.
“무릇 바른 것을 지키고 떳떳함을 행하는 것을 도라 하고, 위험한 때를 당해서 변통하는 것을 권이라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때에 순응해 성공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이치를 거슬러 패하는 법이다.”
이렇게 시작한 글은 “온 천하 사람들이 너를 드러내놓고 죽이려 할 뿐 아니라, 지하의 귀신들까지 너를 죽이려 이미 의논했을 것이다.”라며 겁을 주기도 하고 “나는 한 장의 글을 남겨서 너의 거꾸로 매달린 위급함을 풀어주려는 것이니, 너는 미련한 짓을 하지 말고 일찍 기회를 보아 좋은 방책을 세워 잘못을 고치도록 해라.”라고 회유하기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최치원 [崔致遠] - 유·불·선 통합을 주장했던, 신라 최고의 천재 (인물한국사)
고변은 황소가 장악한 모든 지역에 이 글을 뿌렸다. 당시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황소를 격퇴한 것은 칼이 아니라 최치원의 글이다.”라는 이야기가 떠돌았을 정도로 최치원의 글솜씨는 당나라 전체를 뒤흔들었다. 황소의 난이 진압된 뒤중국 황제는 최치원에게 자금어대를 하사했다. 자금어대는 황제가 정5품 이상에게 하사하는 붉은 주머니로, 이것을 받았다 함은 그 능력을 황제에게 인정받았다는 의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최치원 [崔致遠] - 유·불·선 통합을 주장했던, 신라 최고의 천재 (인물한국사)
유∙불∙선의 통합을 주장
최치원 자신은 신라인으로 남아 은둔 생활로 일생을 마쳤지만, 유교에서 그의 선구적 업적은 최승로로 이어져 신흥 고려의 정치 이념을 확립하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후 최치원은 한국유학사상 최초의 도통으로 모셔지고 있으나, 사실 그의 사상은 유교와 불교, 도교를 통합한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지증∙낭혜∙진감 등 선승들의 탑 비문을 썼고, 노장사상에도 관심이 있었으며, 유∙불∙선의 통합을 주장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최치원 [崔致遠] - 유·불·선 통합을 주장했던, 신라 최고의 천재 (인물한국사)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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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견일 | 최치원 | A는 B의 어버이이다 | |
최치원 | A는 B와 관련있다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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