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 광명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광명사 우물) |
(→내용) |
||
23번째 줄: | 23번째 줄: | ||
=='''내용'''== | =='''내용'''== | ||
− | 922년([[고려 태조|태조]] 5) [[고려 태조]]가 자기가 살던 옛집을 희사하여 창건하였다. [[담선법회|담선법회(談禪法會: 선의 도리를 추구하는 모임)]]가 개최된 사찰로 | + | 922년([[고려 태조|태조]] 5) [[고려 태조]]가 자기가 살던 옛집을 희사하여 창건하였다. [[담선법회|담선법회(談禪法會: 선의 도리를 추구하는 모임)]]가 개최된 사찰로 유명하며, [[이규보|이규보(李奎報)]]가 쓴 「광명사선회설재청설선문(廣明寺禪會說齋請說禪文)」에 그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ref>김상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5108 광명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고려 충렬왕|충렬왕]]도 몇 차례나 이 절을 찾았고, [[고려 충숙왕|충숙왕]]·[[고려 충정왕|충정왕]] 등도 이 절을 찾아 [[우란분채|우란분재(盂蘭盆齋)]]·[[용화회|용화회(龍華會)]] 등을 여는 등 왕가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고려 공민왕|공민왕]]은 즉위 뒤 2년(1353), 4년, 8년의 3월 24일에 [[고려 충숙왕|충숙왕]]의 기신(忌晨)을 이 곳에서 베풀었으며, 가을 등에도 기재(忌齋)와 법회를 열기도 하였다. 또한 공민왕 때 [[오교양종|양종오교(兩宗五敎)]]의 [[공부선|공부선(功夫選)]]이 치러진 곳이기도 하다.<ref>"[광명사]",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조선시대에는 [[조선 태조|태조]]가 [[양주 회암사|회암사(檜巖寺)]]에 역병이 돌자 [[왕사|왕사(王師)]]인 [[자초|무학자초(無學自超)]]를 광명사에 머물게 하였다. [[조선 정종|정종]] 대에는 [[조선 태조|태조]]가 직접 광명사에서 [[신덕왕후|신덕왕후 강씨]]의 기일재를 베풀기도 했다. [[조선 태종|태종]] 대에는 모후인 [[신의왕후|신의왕후 한씨]]의 진영을 광명사로 옮겨 봉안하였다. [[조선 세종|세종]] 대 국가에서 공인한 [[삼십육사|36사(寺)]] 가운데 하나로 지정되었으며, 명나라의 사신이 개성에 머물면서 광명사를 구경하였고 [[조선 태조|태조]]의 진영을 모신 목청전(穆淸殿)에 참배하기도 하였다.<ref>김용태, "[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4359 광명사(廣明寺)]",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조선시대에는 [[조선 태조|태조]]가 [[양주 회암사|회암사(檜巖寺)]]에 역병이 돌자 [[왕사|왕사(王師)]]인 [[자초|무학자초(無學自超)]]를 광명사에 머물게 하였다. [[조선 정종|정종]] 대에는 [[조선 태조|태조]]가 직접 광명사에서 [[신덕왕후|신덕왕후 강씨]]의 기일재를 베풀기도 했다. [[조선 태종|태종]] 대에는 모후인 [[신의왕후|신의왕후 한씨]]의 진영을 광명사로 옮겨 봉안하였다. [[조선 세종|세종]] 대 국가에서 공인한 [[삼십육사|36사(寺)]] 가운데 하나로 지정되었으며, 명나라의 사신이 개성에 머물면서 광명사를 구경하였고 [[조선 태조|태조]]의 진영을 모신 목청전(穆淸殿)에 참배하기도 하였다.<ref>김용태, "[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4359 광명사(廣明寺)]",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39번째 줄: | 39번째 줄: | ||
|출처="[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299A_0050_010_0010_2000_001_XML 개성부 상(開城府 上)]",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권 개성부 상(開城府上),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고전종합DB』<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 | |출처="[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299A_0050_010_0010_2000_001_XML 개성부 상(開城府 上)]",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권 개성부 상(開城府上),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고전종합DB』<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 | ||
}} | }} | ||
− | |||
− | |||
===관련문화유산=== | ===관련문화유산=== |
2017년 7월 26일 (수) 17:14 판
개성 광명사 (開城 廣明寺) |
|
대표명칭 | 개성 광명사 |
---|---|
한자 | 開城 廣明寺 |
이칭 | 개경 광명사 |
건립시기 | 922년 |
정의
경기도 개성시 만월동에 있었던 절.
내용
922년(태조 5) 고려 태조가 자기가 살던 옛집을 희사하여 창건하였다. 담선법회(談禪法會: 선의 도리를 추구하는 모임)가 개최된 사찰로 유명하며, 이규보(李奎報)가 쓴 「광명사선회설재청설선문(廣明寺禪會說齋請說禪文)」에 그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1] 충렬왕도 몇 차례나 이 절을 찾았고, 충숙왕·충정왕 등도 이 절을 찾아 우란분재(盂蘭盆齋)·용화회(龍華會) 등을 여는 등 왕가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공민왕은 즉위 뒤 2년(1353), 4년, 8년의 3월 24일에 충숙왕의 기신(忌晨)을 이 곳에서 베풀었으며, 가을 등에도 기재(忌齋)와 법회를 열기도 하였다. 또한 공민왕 때 양종오교(兩宗五敎)의 공부선(功夫選)이 치러진 곳이기도 하다.[2]
조선시대에는 태조가 회암사(檜巖寺)에 역병이 돌자 왕사(王師)인 무학자초(無學自超)를 광명사에 머물게 하였다. 정종 대에는 태조가 직접 광명사에서 신덕왕후 강씨의 기일재를 베풀기도 했다. 태종 대에는 모후인 신의왕후 한씨의 진영을 광명사로 옮겨 봉안하였다. 세종 대 국가에서 공인한 36사(寺) 가운데 하나로 지정되었으며, 명나라의 사신이 개성에 머물면서 광명사를 구경하였고 태조의 진영을 모신 목청전(穆淸殿)에 참배하기도 하였다.[3]
혜소(慧炤)·탄연(坦然)·지인(之印)·지겸(志謙)·일연(一然)·혜근(惠勤)·보우(普愚) 등이 머물렀다고 한다.[4]
광명사 우물
최충헌(崔忠獻)은 왕이 달애정(炟艾井, 개성 북쪽에 있었던 우물)의 물을 마시면 환관이 권세를 부리게 된다는 속세의 말을 듣고, 달아정을 허물고 광명사의 우물 물을 어수(御水)로 쓰게 하였다고 한다.
달애정(炟艾井)
부 북쪽 5리에 있다. ○ 고려 신종(神宗) 초에 최충헌(崔忠獻)이 아뢰어 내시 민식(閔湜) 등 70여 명을 내쫓았다. 민간에서 전하는 말이, 임금이 달애 우물 물을 마시면 환자(宦者)가 권력을 쥔다고 하므로 달애정을 헐고 광명사(廣明寺) 우물 물을 어수(御水)로 삼았다. 속담에 등리(藤梨)를 달애(炟艾)라고 한다. |
||
출처: "개성부 상(開城府 上)",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권 개성부 상(開城府上), |
관련문화유산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시각자료
주석
- ↑ 김상현, "광명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광명사]",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김용태, "광명사(廣明寺)",
『조선왕조실록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광명사",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