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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77년(충렬왕 3)부터 1281년까지 청도 운문사(雲門寺)에서 살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다. 이 때 | + | 1277년([[고려 충렬왕|충렬왕]] 3)부터 1281년까지 [[청도 운문사|운문사(雲門寺)]]에서 살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다. 이 때 『[[삼국유사|삼국유사]]』를 집필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1281년 경주에 행차한 [[고려 충렬왕|충렬왕]]에게로 가서, 불교계의 타락상과 몽고의 병화로 불타 버린 [[경주 황룡사|황룡사]]의 모습을 목격하였다. 1282년 [[고려 충렬왕|충렬왕]]에게 선(禪)을 설하고 개경의 [[개경 광명사|광명사(廣明寺)]]에 머물렀다. 다음 해, 국존(國尊)으로 책봉되어 원경충조(圓經冲照)라는 호를 받았으며, 왕의 거처인 대내(大內)에서 문무백관을 거느린 왕의 구의례(摳衣禮:옷의 뒷자락을 걷어 올리고 절하는 예)를 받았다.<ref>김상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7280 일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1년 12월 21일.</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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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81년 경주에 행차한 | + | |왕이 즉위한지 4년 정축(丁丑)에 왕명을 내려 운문사(雲門寺)에 머무르게 하니 현풍(玄風)을 크게 천양(闡揚)하였다. 왕이 날로 깊이 마음을 기울이더니 시를 부쳐 이르기를, "비밀리에 전함에 어찌 반드시 구의(摳衣)를 고치리오. 금지(金地)에 만나 부름이 또한 기이하도다. 그대를 |
+ | 대궐 아래에 맞아 들이고자 하는데 대사는 어찌 백운(白雲)의 가지에 길이 애태우는가?"라고 | ||
+ | 하였다. 신사년(辛巳年) 여름에 일본 정벌로 말미암아 경주로 행차하여 명을 내려 대사를 행재소(行在所)에 오게 하였다. 대사가 이르자 자리에 오르기를 청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배로 생겼다. 이로 말미암아 대사의 불일결사문(佛日結社文)을 취하여 운을 찍고 제압(題押)하여 불일사에 보관하도록 하였다. 다음해 가을 장작윤 김군(金頵)을 근시장(近侍將)으로 삼아 조서(詔書)를 보내어 맞으니 대궐에 이르렀다. 대전(大殿)으로 청하여 선(禪)을 설법하니 기쁨이 용안(龍顔)에 넘쳤으며, 유사(有司)에 칙명을 내려 광명사(廣明寺)에 머물게 하였다. 원(院)에 들어가던 날 밤에 어떤 사람이 방장(方丈) 밖에 서서 "잘 오셨습니다"라고 세 번 말하였는데 살펴보니 아무도 없었다. 겨울 12월에 왕이 몸소 찾아와 법요(法要)를 자문하였다. 다음해 봄에 | ||
+ | 왕이 군신(群臣)에게 이르기를 "우리 선왕께서 모두 불교의 덕이 높은 이를 왕사로 삼으셨고 | ||
+ | 덕이 더욱 큰 이를 국사로 삼으셨는데, 과인만이 유독 없으면 옳겠는가? 지금 운문화상(雲門和尙)은 도가 높고 덕이 커서 사람들이 모두 추앙하니, 어찌 과인만이 홀로 인자한 은택을 입는 것이 옳겠는가? 마땅히 한 나라와 함께 누려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우승지(右承旨) 염승익(廉承益)을 보내어 왕명을 받들어 합국존사(闔國尊師)의 예를 행하기를 청하였으나 | ||
+ | 대사는 표문을 올려 굳게 사양하였다. 왕이 다시 사신을 보내어 세 번이나 간청하였다. 상장군(上將軍) 나유(羅裕) 등을 보내어 국존(國尊)으로 책봉하고, 호를 원경충조(圓徑冲照)라 하였다. 4월 신묘일(辛卯日)에 궁궐로 맞아들여 왕이 몸소 백관을 거느리고 구의(摳衣)의 예를 행하였다. 국사를 고쳐 국존이라 한 거은 원의 국사라는 칭호를 피하기 위한 것이다. | ||
+ | |출처=조명제, "인각사 보각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5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18-19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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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3년(충렬왕 9) [[일연]]은 늙으신 어머니를 봉양해야 한다는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자 왕이 허락하고 근시(近侍) 좌랑(佐郞) 황수명(黃守命)에게 명령을 내려 호위하게 했다. 1284년(충렬왕 10) 어머니가 96세의 나이로 별세하자, 조정에서는 인각사를 일연이 머무를 곳으로 삼게 하고 100여 경(頃)의 토지를 하사했다. 인각사에 머물렀던 5년 동안 일연은 두 번에 걸쳐서 구산선문(九山禪門) 전체 모임을 열었는데, 사찰의 성대함이 근래에 없었던 일이었다 한다.<ref>이종문, "[http://cheongdo.grandculture.net/Contents?local=cheongdo&dataType=99&contents_id=GC05501064 일연]", <html><online style="color:purple">『디지털청도문화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1283년(충렬왕 9) [[일연]]은 늙으신 어머니를 봉양해야 한다는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자 왕이 허락하고 근시(近侍) 좌랑(佐郞) 황수명(黃守命)에게 명령을 내려 호위하게 했다. 1284년(충렬왕 10) 어머니가 96세의 나이로 별세하자, 조정에서는 인각사를 일연이 머무를 곳으로 삼게 하고 100여 경(頃)의 토지를 하사했다. 인각사에 머물렀던 5년 동안 일연은 두 번에 걸쳐서 구산선문(九山禪門) 전체 모임을 열었는데, 사찰의 성대함이 근래에 없었던 일이었다 한다.<ref>이종문, "[http://cheongdo.grandculture.net/Contents?local=cheongdo&dataType=99&contents_id=GC05501064 일연]", <html><online style="color:purple">『디지털청도문화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2017년 7월 15일 (토) 17:21 판
일연(一然) | |
대표명칭 | 일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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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一然 |
생몰년 | 1206년(희종 2)-1289년(충렬왕 15) |
시호 | 보각(普覺) |
호 | 무극(無極), 목암(睦庵) |
법호 | 견명(見明), 일연(一然) |
탑호 | 정조(靜照) |
자 | 회연(晦然), 일연(一然) |
성씨 | 김씨 |
본관 | 경주(慶州) |
출신지 | 경상북도 경산 |
승탑 |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탑 |
승탑비 |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비 |
목차
정의
고려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일연은 1206년(희종 2) 경주의 속현이었던 장산군(章山郡)에서 아버지 김언필(金彦弼)과 어머니 이씨(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1]
출가수행
1214년(고종 1) 해양(海陽)에 있던 무량사(無量寺)에서 학문을 익혔고, 1219년 설악산 진전사(陳田寺)로 출가하여 대웅(大雄)의 제자가 되어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 여러 곳의 선문(禪門)을 방문하면서 수행하였다.[2]
활동
일연은 1227년(고종 14) 승과(僧科)의 선불장(選佛場)에 응시하여 장원에 급제하였다. 그 뒤 비슬산(琵瑟山)의 보당암(寶幢庵)에서 수년 동안 참선에 몰두하였다.[3]
정해년(丁亥年) 겨울 선불장(選佛場)에 나아가 상상과(上上科)로 합격하였다. 그 후 포산(包山) 보당암(寶幢庵)에 주석하면서 마음을 선관(禪觀)에 두었다. | ||
출처: 조명제, "인각사 보각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5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17쪽. |
일연은 1236년(고종 23) 몽고군의 침입을 피해 거처할 곳을 찾다가 무주암(無住庵)에 머물라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의 계시를 받고, 1237년 무주암으로 옮겼다. 거기서 '현상계(現象界)가 줄어들지도 않고 본체계(本體界)가 늘어나지도 않는다(生界不減 佛界不增)'는 말을 화두로 삼아 정진하다가 마침내 도를 깨달았다. 이 해에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었고, 1246년(고종 33)에 선사(禪師)가 되었다.[4]
일연은 1249년(고종 36) 정안(鄭晏)이 세운 남해 정림사(定林寺)의 주지로 취임하였는데, 그곳에 머물면서 남해의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 작업에 약 3년 동안 참여하였다. 1256년(고종 43) 윤산(輪山) 길상암(吉祥庵)에서 『중편조동오위(重編曺洞五位)』를 편찬하였고, 1259년(고종 46)에는 대선사(大禪師)가 되었으며, 1260년(원종 1)에는 『중편조동오위』의 서문을 썼다. 1261년(원종 2)에 왕명을 받고 당시 수도였던 강화도의 선월사(禪月社)에 주석하면서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의 법통을 계승하였다.[5][6]
일연은 1264년(원종 5) 경상북도 영일군 운제산(雲梯山)에 있던 오어사(吾魚寺)로 옮겨갔으며, 비슬산 인홍사(仁弘寺)의 주지가 되어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1268년(원종 9)에는 조정에서 베푼 대장경(大藏經) 조조(彫造) 낙성법회(落成法會)를 주관하였다.[7] 1274년(원종 15) 비슬산에 있는 인홍사(仁弘社)를 확대 중건하고 조정에 보고하자, 원종은 절 이름을 인흥사(仁興寺)로 바꾸고 친필 현판을 하사했다. 또한 일연은 비슬산 동쪽 기슭의 용천사(湧泉寺)를 중수하고 불일사(佛日寺)로 이름을 바꾼 뒤, 「불일결사문(佛日結社文)」을 썼다.[8]
1277년(충렬왕 3)부터 1281년까지 운문사(雲門寺)에서 살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다. 이 때 『삼국유사』를 집필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1281년 경주에 행차한 충렬왕에게로 가서, 불교계의 타락상과 몽고의 병화로 불타 버린 황룡사의 모습을 목격하였다. 1282년 충렬왕에게 선(禪)을 설하고 개경의 광명사(廣明寺)에 머물렀다. 다음 해, 국존(國尊)으로 책봉되어 원경충조(圓經冲照)라는 호를 받았으며, 왕의 거처인 대내(大內)에서 문무백관을 거느린 왕의 구의례(摳衣禮:옷의 뒷자락을 걷어 올리고 절하는 예)를 받았다.[9]
1283년(충렬왕 9) 일연은 늙으신 어머니를 봉양해야 한다는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자 왕이 허락하고 근시(近侍) 좌랑(佐郞) 황수명(黃守命)에게 명령을 내려 호위하게 했다. 1284년(충렬왕 10) 어머니가 96세의 나이로 별세하자, 조정에서는 인각사를 일연이 머무를 곳으로 삼게 하고 100여 경(頃)의 토지를 하사했다. 인각사에 머물렀던 5년 동안 일연은 두 번에 걸쳐서 구산선문(九山禪門) 전체 모임을 열었는데, 사찰의 성대함이 근래에 없었던 일이었다 한다.[10]
입적
1289년(충렬왕 15) 7월 제자들과 선문답을 하며 담소를 나누다가 금강인(金剛印)을 맺고 입적하였으며, 향년은 84세, 법랍은 71세였다. 입적하던 해에 인각사 동쪽 언덕에 탑을 세웠으며, 시호는 보각(普覺)이고 탑호(塔號)는 정조(靜照)이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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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1년 12월 21일. - ↑ 이종문, "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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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청도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상현, "일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1년 12월 21일. - ↑ 김상현, "일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1년 12월 21일. - ↑ 이종문, "일연",
『디지털청도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상현, "일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1년 12월 21일. - ↑ 이종문, "일연",
『디지털청도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상현, "일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1년 12월 21일.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