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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중국의 천자문이 언제 들어왔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백제의 [[왕인]]이 『천자문』을 가지고 왔다는 일본 『[[고사기 |고사기(古事記)]]』의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시기 한반도에 전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에서 천자문은 크게 한자교육과 서체교육의 두 가지 용도로 사용됐다. 한자교육을 우선한 천자문은 1행에 4자를 배열하고 해서체 한자 아래 하나의 음훈만 제시했다. 서체교육을 우선한 천자문은 1행에 5자에서 7자까지 다양하게 배열하고 한자의 음훈이 달려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훈민정음]] 창제 이전에 어떤 방식으로 음훈이 표기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기록이나 초기의 간본이 전해지지 않는다) 구전이나 한자차용표기로 대신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 천자문은 큰 변화를 얻게 된다. 한자의 음과 훈이 한글로 표기되면서 독학이 가능해진 것이다.<ref>박병철, 「《千字文》編纂의 變貌 樣相에 대한 硏究」, 『어문연구』41, 한국어문교육연구회, 2013, 15-17쪽.</ref> | 우리나라에 중국의 천자문이 언제 들어왔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백제의 [[왕인]]이 『천자문』을 가지고 왔다는 일본 『[[고사기 |고사기(古事記)]]』의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시기 한반도에 전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에서 천자문은 크게 한자교육과 서체교육의 두 가지 용도로 사용됐다. 한자교육을 우선한 천자문은 1행에 4자를 배열하고 해서체 한자 아래 하나의 음훈만 제시했다. 서체교육을 우선한 천자문은 1행에 5자에서 7자까지 다양하게 배열하고 한자의 음훈이 달려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훈민정음]] 창제 이전에 어떤 방식으로 음훈이 표기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기록이나 초기의 간본이 전해지지 않는다) 구전이나 한자차용표기로 대신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 천자문은 큰 변화를 얻게 된다. 한자의 음과 훈이 한글로 표기되면서 독학이 가능해진 것이다.<ref>박병철, 「《千字文》編纂의 變貌 樣相에 대한 硏究」, 『어문연구』41, 한국어문교육연구회, 2013, 15-17쪽.</ref> | ||
===국내 천자문의 계통=== | ===국내 천자문의 계통=== | ||
− | 우리나라의 천자문은 크게 두 가지 계통으로 나뉜다. 1575년판인 『[[광주천자문]]』과 1583년판인 『[[해서천자문]]』(석봉천자문)이다. 『[[해서천자문]]』의 <big>女慕貞烈</big> 구절이 『[[광주천자문]]』에서는 <big>女慕貞潔</big>로 나타나는 것이 가장 큰 차이이다.<ref>이 때문에 해서천자문 계통은 '열자본(烈字本)'으로 광주천자문 계통은 '결자본(潔字本)'으로 불린다</ref> 또한 『[[광주천자문]]』에서는 성조가 표기되어 있지만 『석봉천자문』에는 성조의 표기가 없다. 1583년 [[선조]]의 명으로 [[해서천자문]]이 간행되면서 우리나라의 천자문은 대부분 열자본의 형태를 띄게 되었다. 『[[주해천자문]]』은 1752년 [[홍성원]]이 지은 것으로 [[해서천자문]]과 같은 계통의 책이다. 필요에 따라 2, 3종의 새김과 독음을 달고 구절마다 전체풀이를 한문으로 덧붙인 점에서 기존의 천자문과 구별된다.<ref>안병희, 「천자문의 계통」, 『정신문화연구』1982.4, 한국학중앙연구원, 1982.</ref> | + | 우리나라의 천자문은 크게 두 가지 계통으로 나뉜다. 1575년판인 『[[광주천자문]]』과 1583년판인 『[[석봉천자문|해서천자문]]』(석봉천자문)이다. 『[[석봉천자문|해서천자문]]』의 <big>女慕貞烈</big> 구절이 『[[광주천자문]]』에서는 <big>女慕貞潔</big>로 나타나는 것이 가장 큰 차이이다.<ref>이 때문에 해서천자문 계통은 '열자본(烈字本)'으로 광주천자문 계통은 '결자본(潔字本)'으로 불린다</ref> 또한 『[[광주천자문]]』에서는 성조가 표기되어 있지만 『석봉천자문』에는 성조의 표기가 없다. 1583년 [[선조]]의 명으로 [[석봉천자문|해서천자문]]이 간행되면서 우리나라의 천자문은 대부분 열자본의 형태를 띄게 되었다. 『[[주해천자문]]』은 1752년 [[홍성원]]이 지은 것으로 [[석봉천자문|해서천자문]]과 같은 계통의 책이다. 필요에 따라 2, 3종의 새김과 독음을 달고 구절마다 전체풀이를 한문으로 덧붙인 점에서 기존의 천자문과 구별된다.<ref>안병희, 「천자문의 계통」, 『정신문화연구』1982.4, 한국학중앙연구원, 1982.</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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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문(대자: 大字)은 기본적으로 『[[해서천자문]]』(석봉천자문)을 따랐다. 음훈의 경우 오자도 있지만 국어의 변화를 반영하여 동사 '<span sytle="font-famliy:함초롬돋움">ᄒᆞ-</span>(爲)(*옛한글)'가 대부분의 예에서 '허-'로 나타나는 등 『[[해서천자문]]』과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이 책이 [[대한제국]]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새김도 잘못된 경우가 많다. 『[[해서천자문]]』에는 '<big>鵾</big>'이 '고기 곤'으로 '<big>遼</big>'가 '멀 료'로 되어있다. 그러나 이 천자문에는 '큰고기 곤', 과 '동료 료'로 기술되어 있는데, 18세기 중엽의 『[[주해천자문]]』과 동일하다(주해천자문에는 '<big>鯤</big>' '큰고기 곤', '<big>僚</big>' '동관 료' 로 기술되어 있다.). 즉 이 천자문은 대자는 『[[해서천자문]]』을 따르고 음훈은 『[[주해천자문]]』을 따른 데서 착오가 생겼다. <ref>안병희, 「해제」, 『천자문-장서각 소장 왕실 천자문 역해』, 한국학중앙연구원, 2016, 13-15쪽.</ref> | + | 본문(대자: 大字)은 기본적으로 『[[석봉천자문|해서천자문]]』(석봉천자문)을 따랐다. 음훈의 경우 오자도 있지만 국어의 변화를 반영하여 동사 '<span sytle="font-famliy:함초롬돋움">ᄒᆞ-</span>(爲)(*옛한글)'가 대부분의 예에서 '허-'로 나타나는 등 『[[석봉천자문|해서천자문]]』과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이 책이 [[대한제국]]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새김도 잘못된 경우가 많다. 『[[석봉천자문|해서천자문]]』에는 '<big>鵾</big>'이 '고기 곤'으로 '<big>遼</big>'가 '멀 료'로 되어있다. 그러나 이 천자문에는 '큰고기 곤', 과 '동료 료'로 기술되어 있는데, 18세기 중엽의 『[[주해천자문]]』과 동일하다(주해천자문에는 '<big>鯤</big>' '큰고기 곤', '<big>僚</big>' '동관 료' 로 기술되어 있다.). 즉 이 천자문은 대자는 『[[석봉천자문|해서천자문]]』을 따르고 음훈은 『[[주해천자문]]』을 따른 데서 착오가 생겼다. <ref>안병희, 「해제」, 『천자문-장서각 소장 왕실 천자문 역해』, 한국학중앙연구원, 2016, 13-15쪽.</ref> |
=='''지식관계망'''== | =='''지식관계망'''== |
2017년 7월 5일 (수) 15:19 판
천자문 (장서각본) | |
한자명칭 | 千字文 |
---|---|
영문명칭 | The Thousand-Character Classic |
작자 | 미상 |
간행시기 | 19세기 |
소장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청구기호 | 1-205 |
유형 | 고서 |
크기(세로×가로) | 40×26.3㎝ |
판본 | 필사본 |
수량 | 1冊 |
표기문자 | 한글, 한자 |
목차
정의
『천자문』은 고전(古典)에서 발췌한 한자 1,000자로 사언(四言) 250구를 엮어 묶은 책이다.
내용
장서각 한글특별전 내용
장서각 소장 천자문은 19세기 궁중에서 전하는 천자문의 하나이다. 적(赤)·청(靑)·황(黃)·홍(紅)·녹(綠)·백(白)의 여섯가지 색지 바탕에 석봉(石峯) 한호(韓濩,1543~1605)의 서체로 필사하였다. 조선시대 천자문은 한자 학습의 도구로 널리 읽혔는데, 그 중에서도 한호의 『해서천자문楷書千字文』에는 글자마다 한글로 음(音)과 훈(訓)이 붙어 있어, 조선 중기 이후 널리 보급되었다. 이 책의 서체는 『해서천자문』의 형식을 갖춘 후대 필사본으로 보인다. 천자문은 세자나 왕자의 돌상(돌床)에 붓, 실과 함께 놓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화려한 색상으로 돌을 맞는 아기의 시선을 끌어 손으로 잡게 함으로써, 성장하면서 학문을 가까이 하고 좋아했으면 하는 왕실의 바람이 담긴 책이다.[1]
천자문의 국내 유입
우리나라에 중국의 천자문이 언제 들어왔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백제의 왕인이 『천자문』을 가지고 왔다는 일본 『고사기(古事記)』의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시기 한반도에 전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에서 천자문은 크게 한자교육과 서체교육의 두 가지 용도로 사용됐다. 한자교육을 우선한 천자문은 1행에 4자를 배열하고 해서체 한자 아래 하나의 음훈만 제시했다. 서체교육을 우선한 천자문은 1행에 5자에서 7자까지 다양하게 배열하고 한자의 음훈이 달려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훈민정음 창제 이전에 어떤 방식으로 음훈이 표기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기록이나 초기의 간본이 전해지지 않는다) 구전이나 한자차용표기로 대신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 천자문은 큰 변화를 얻게 된다. 한자의 음과 훈이 한글로 표기되면서 독학이 가능해진 것이다.[2]
국내 천자문의 계통
우리나라의 천자문은 크게 두 가지 계통으로 나뉜다. 1575년판인 『광주천자문』과 1583년판인 『해서천자문』(석봉천자문)이다. 『해서천자문』의 女慕貞烈 구절이 『광주천자문』에서는 女慕貞潔로 나타나는 것이 가장 큰 차이이다.[3] 또한 『광주천자문』에서는 성조가 표기되어 있지만 『석봉천자문』에는 성조의 표기가 없다. 1583년 선조의 명으로 해서천자문이 간행되면서 우리나라의 천자문은 대부분 열자본의 형태를 띄게 되었다. 『주해천자문』은 1752년 홍성원이 지은 것으로 해서천자문과 같은 계통의 책이다. 필요에 따라 2, 3종의 새김과 독음을 달고 구절마다 전체풀이를 한문으로 덧붙인 점에서 기존의 천자문과 구별된다.[4]
천자문(장서각본)의 특징
본문(대자: 大字)은 기본적으로 『해서천자문』(석봉천자문)을 따랐다. 음훈의 경우 오자도 있지만 국어의 변화를 반영하여 동사 'ᄒᆞ-(爲)(*옛한글)'가 대부분의 예에서 '허-'로 나타나는 등 『해서천자문』과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이 책이 대한제국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새김도 잘못된 경우가 많다. 『해서천자문』에는 '鵾'이 '고기 곤'으로 '遼'가 '멀 료'로 되어있다. 그러나 이 천자문에는 '큰고기 곤', 과 '동료 료'로 기술되어 있는데, 18세기 중엽의 『주해천자문』과 동일하다(주해천자문에는 '鯤' '큰고기 곤', '僚' '동관 료' 로 기술되어 있다.). 즉 이 천자문은 대자는 『해서천자문』을 따르고 음훈은 『주해천자문』을 따른 데서 착오가 생겼다. [5]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해서천자문 | 천자문(장서각본)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주해천자문 | 천자문(장서각본)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해서천자문 | 주해천자문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해서천자문 편찬 | 해서천자문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1583년 |
선조 | 해서천자문 편찬 | A는 B를 명령하였다 | 1583년 |
한호 | 해서천자문 편찬 | A는 B에 참여하였다 | 1583년 |
한호 | 해서천자문 | A는 B를 저술하였다 | 1583년 |
홍성원 | 주해천자문 | A는 B를 저술하였다 | 1752년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천자문(장서각본) | A는 B를 소장하였다 | 현재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583년 | 선조가 해서천자문 편찬을 한호에게 명령하였다. |
1583년 | 한호가 해서천자문을 저술하였다. |
1752년 | 홍성원이 주해천자문을 저술하였다. |
19세기 | 천자문(장서각본)이 저술되었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7.39197 | 127.054387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은 천자문(장서각본)을 소장하였다.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60-61쪽.
- ↑ 박병철, 「《千字文》編纂의 變貌 樣相에 대한 硏究」, 『어문연구』41, 한국어문교육연구회, 2013, 15-17쪽.
- ↑ 이 때문에 해서천자문 계통은 '열자본(烈字本)'으로 광주천자문 계통은 '결자본(潔字本)'으로 불린다
- ↑ 안병희, 「천자문의 계통」, 『정신문화연구』1982.4, 한국학중앙연구원, 1982.
- ↑ 안병희, 「해제」, 『천자문-장서각 소장 왕실 천자문 역해』, 한국학중앙연구원, 2016, 13-15쪽.
참고문헌
더 읽을거리
- 단행본
- 황문환·김건곤·신익철·조융희·박부자·이현주, 『천자문-장서각 소장 왕실 천자문 역해』, 한국학중앙연구원, 2016.
- 이광호·박부자·정재영·김주필·김목한·이근용·백두현·이래호·배영환·신성철·황문환·정승혜·이현주·정은균, 『장서각 소장 한글필사자료 연구』, 태학사, 2007.
- 논문
- 심경호, 「천자문의 구조와 조선시대 판본에 관한 일고찰」, 『한자한문연구』7,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