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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인물_류인태 |이름 = 장계향 |한자명 = 張桂香 |호(號) = |성별 = 여성 |생년 = 1598 |몰년 = 1680 |본관 = 안동_장 |시대 = 조선 |이미지 출처 = |i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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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구, “「선택」의 장씨부인 실제는 성인 꿈꿔,” 「중앙선데이」(2007.5.13). | *이순구, “「선택」의 장씨부인 실제는 성인 꿈꿔,” 「중앙선데이」(2007.5.13). | ||
*정라곤, “후세에 빛나는 여중군자, 장계향,” 「울진타임즈」(2009.3.25). | *정라곤, “후세에 빛나는 여중군자, 장계향,” 「울진타임즈」(2009.3.2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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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14일 (수) 20:17 판
목차
개요
장계향은 조선중후기 이름 높은 성리학자였던 장흥효(張興孝)의 딸이자, 마찬가지로 조선중후기 이름 높은 성리학자였던 이현일(李玄逸)의 어머니이다.
'여중군자(女中君子)'라는 호칭으로 불려지는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신사임당과 함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현모양처의 표본으로 여겨진다.
생애
(미정리)
정부인 장씨는 안동 서후면(西後面) 금계리(金溪里)에서 1598년(선조 31년)에 태어났다. 이름은 장계향이다. 아버지는 참봉(參奉)을 지내고 향리에서 후학을 가르쳤던 성리학자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이고, 어머니는 첨지(僉知) 권사온(權士溫)의 딸이다. 19세에 출가하여 재령(載寧) 이씨인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의 계실(繼室)이 되었다. 이시명은 전실(前室) 김씨로부터 1남[상일(尙逸)] 1녀를 얻었으며, 둘째 부인 장씨로부터 6남[휘일(徽逸), 현일(玄逸), 숭일(嵩逸), 정일(靖逸), 융일(隆逸), 운일(雲逸)] 2녀를 두었다. 장씨 부인은 7남 3녀를 훌륭히 양육하였던 것이다. 셋째 아들 현일(玄逸)이 쓴 광지(壙誌) (1844년에 간행된 <貞夫人安東張氏實紀>에 수록)와 한글로 번역한 장씨 부인의 실기(實紀)에는 부인의 여러 가지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회임(懷妊)함에 언행을 옛 법도대로 하였고, 자애로움과 엄격함으로 자녀들을 훈도하였으며, 서화와 문장에 뛰어나 훌륭한 필적(筆跡)을 남기기도 하였다. 흉년 기근으로 민생이 참혹할 때 기민(饑民)의 구휼에 정성을 다하니 사방에서 모여든 행인이 집 안팎을 메워 솥을 밖에 걸어 놓고 죽과 밥을 지어 사람들을 먹이기도 하였다. 의지 없는 늙은이를 돌보아 먹이고, 고아를 데려다가 가르치고 길러 성취(成娶)시키는 등 인덕(仁德)과 명망(名望)이 자자(藉藉)하였다. 부인의 평생 쌓은 유덕(有德)이 이러하기에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지성으로 축수하여 아무려나 이 아기시님 수복 무강하옵소서. 우리 몸이 죽어 귀신이 되어도 이 은덕을 한 번 갚기 소원이라 하였다. 친정 부모와 시가 부모를 모시고 봉양함이 극진하여 몸소 효의 전범을 보이시니 그 아래에서 훈육된 자녀들 또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만년에 셋째 아들 갈암 이현일(葛庵 李玄逸)이 대학자이자 국가적 지도자에게만 부여하는 산림(山林)으로 불림을 받아서 이조판서를 지냈으므로, 법전에 따라 정부인의 품계가 내려졌다. 이 때부터 ‘정부인 장씨’라 불리게 되었다. 장씨 부인의 행실과 덕이 이렇게 높고 83세에 이르기까지 자녀 훈도(訓導)에 힘을 쏟으니 이로부터 재령 이씨 가문은 더욱 크게 일어나 훌륭한 학자와 명망 있는 동량(棟樑)들이 대대로 배출되었다. 부인은 1680년(숙종 6년)에 83세를 일기로 향년(享年)을 마치었다. 장씨 부인이 생애의 말년을 보냈던 집은 현재 영양군(英陽郡) 석보면(石保面) 원리동(院里洞)의 두들마을에 있고, 부인의 묘소는 안동시 서후면 수동(壽洞)에 있다. 그녀는 1598년 경상도 안동부에서 성리학자 장흥효의 딸로 태어났다. 흔히 정부인 안동 장씨로 알려졌는데, 이는 정부인은 그녀의 작위로, 사후 아들 이현일이 정2품에 오르면서 정부인에 추증되었던 것이다. 1616년 참봉 이시명과 결혼하여 슬하에 6남 2녀를 두었다. 퇴계학통을 계승한 학자 이휘일과, 숙종 때의 남인의 이론가의 한사람인 갈암 이현일(李玄逸)이 그의 아들들이다. 1680년 사망하였으며, 1690년 아들 현일의 영귀로 정부인에 추증되었다.
(미정리)
위대한 어머니 장계향[1598~1680]은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은 경당 장흥효의 무남독녀이자 소설가 이문열의 선대 할머니이시다.그의소설 '선택'의 주인공이다 선조31년[1598] 경북 안동 금계리에서 태어나 숙종6년[1680]83세를 일기로 경북 영양 석보에서 타계하였다. 아버지 장흥효는 조선 중기의 대학자로 벼슬도 마다한채, 집가까이 광풍정(光風亭)이라는 정자를 지어놓고 평생을 제자들과 학문을 논하며 수백명의 제자를 길러낸 인물이다. 이러한 장흥효가 서른 다섯살 되던해에 얻은 아이가 장계향이었고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레 학문을 접하게 되었다.셋째아들 '갈암 이현일'이 어머니의 팔십평생을 기록해 놓은책 ‘정부인장씨실기[實記]에 의하면 그녀는 당시 성인군자의 입문서인(소학)은 물론, 유가儒家의 기본적 경전(經典) 인(사서오경). 세상돌아가는 실제를 알기위한 중국역사서(십구사략)에서 소강절의 난해한 천문도수 학문(원회운세지수)까지 제대로 이해하였다고 한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초서,그림자수 등의 작품을 보면 어려서 부터 남달리 총명했음을 짐작할수있다. 광해 8년[1616년] 나이 열아홉에 부친으로부터 총애를 받던 제자인 석계 이시명의 아내가 되었고 부부는 서로 손님처럼(相敬如賓)처럼 더 나아가 동지로서 공경하며 살았다. 그녀는 때를 맞추는 중용[時中]의 모범을 보이는 군자로서 살았으며 특히 자신의 재주를 드러내기보다 한 가정의 평범한 딸이자 가정주부로서 시가와 본가 두 집안 모두를 당시 사회공동체의 기둥이 되는 가문[宗門]으로 일으켜 세웠고 10명의 자녀를 훌륭히 키워 냈다. 자녀들 에게는 늘’너희들이 비록 글 잘한다는 소리가 들린다 해도 나는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착한행동 하나를 했다는 소리가 들리면 아주 즐거워하여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라고 가르침으로서 과거시험 공부보다 성리학의 학문적본질[義理]을 하나라도 몸소 실천함을 근본으로 삼았다. 또한 강인함과 온유함을 갖춘 도덕적 품성으로 나이든 사람이나 과부, 고아처럼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을 아무도 모르게 힘껏도왔고, 만년에 이를수록 숨겨둔 재주와 덕행이 드러나서 칭송받았다. 17세기 이후 조선인들은 그녀를 맹자[孟子]정자[程子]의 어머니와 같은 분이라고 칭송하였다. 여성의 학문적 자유나 사회적 재악이 많았던 시대를 살다간 양반가의 여인,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며 가치로운 삶을 살다간 그녀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과연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케 하는 스승이자’어른’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몸소 실천함으로서 가르쳐준 인물이었다. 일상의 삶을 역사로 만든’여중군자 장계향’ 한글로 기록된 최초의 조리서인 음식디미방을 기록한 진취적인 여성, 조선시대에는 여성이 책을 저술하여 남긴다는것 자체가 사회적 통념에 어긋난 일이었으나 후대를 위하여 사회적 통념에 과감히 도전한 여성 이었다. 정유재란,정묘호란,병자호란 속에서 민초들을 다함없이 구휼한 사회사업가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의 은덕에 감동 하였다. 10남매를 출충하게 성장시키고 부군 석계 이시명을 일으켜 세운 현모양처, 빼어난 시9수를 남긴시인, 사나운 호랑이를 섬세하게 표현한 ‘맹호도’와 산수화를 남긴화가, 당대의 서예가 정윤목의 절찬을 받은 서예가, 제주보다 선행을 강조하여 일곱 아들을 7룡으로 불리우게 한 교육자, 그녀는 조선시대 한 여성이자, 한남성의 아내였고 열명의 자식을둔 어머니, 양반사대부 집안의 여성으로 태어나 출가후 남다른 구빈철학으로 평생토록 시대를 원망하지않고 주어진 본분과 역할에 최선을 다하면서, 어려운 세상과 고통받는 이웃 사람들과 함께한 삶에 마음을 둔, 그의 깊고깊은 배움을 삶에 실천한 ‘여성군자 장계향’의 일생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가치있는 삶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보게한다. 만년에 셋째아들 갈암 이현일이 이조판서를 지냈으므로 법전에 따라 정부인 품계가 내려졌다 .이러한 업적을 인정하여 1999년 11월 문화관광부는 자녀교육에 귀감을보인 ’위대한 어머니상’으로 여중군자 장계향 선생을 선정하였으며 영양군에서는 두들마을 앞에서 선생의 덕을기리는 비와 유물전시관을 건립하였다. 음식디미방’원본은 경북대 도서관 고서실에 보관되어있다. 2014년 발행 고등학교 교과서 등재 소중한 교육자료로 활용 2014년 부터 고등학교 기술,가정 통합교과서에 등재 되어 각 학교에 보급됨으로서,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조상들의 삶과 지혜를 배울수 있는 소중한 교육적 자료로 활용된다.
(미정리)
조선 중기, 사회혼란기에 영양은 숨어 살기 좋다하여 명문가들이 모여들었다. 주실마을 한양조씨, 감천마을 낙안오씨, 연당마을 동래정씨까지 저마다 그럴듯한 입향 이야기 하나쯤 달고 몰려든 집안들이다. 석보면 두들마을 재령이씨 집안도 그 가운데 하나다. 병자호란 후, 재령이씨 석계 이시명은 조선에서 살기 좋기로 소문난 영해 인량마을(나랏골)을 떠나 영양에 은거하였다. 충효당을 짓고 나랏골에 뿌리내린 석계의 아버지 이함이 1632년에 세상을 떠나고 1637년에 삼전도에서 인조가 머리를 박고 청에 굴복하자 이함의 삼남 이시명은 숨어 살기로 작정하고 나랏골을 떠난 것이다. 석계와 장계향 사이에 다시 6남 2녀를 두었다. 장흥효와 이시명으로 이어진 퇴계학 계보는 다시 이시명의 삼남 갈암 이현일, 이현일의 아들 밀암 이재, 이재의 외손자 대산 이상정으로 이어졌다. 한 집안이 퇴계학의 계보를 잇는 영광을 누린 것이다. 재령이씨 집안이 이함과 이시명에 이어 그 후손들이 대성하여 명문대가의 면모를 갖춘 데는 장계향의 공이 크다. 두 시숙과 동서가 사망하는 흉사가 겹친 집안에 들어와 흉사를 수습하고 일곱 아들 모두 훌륭히 키워 명문대가의 기틀을 마련했다. 장계향은 어려서 초서를 잘 써, 당대 최고의 초서 서예가 정윤목을 탄복케 했고 <학발시>, <성인음>, <소소음> 등 시를 짓는 데 재주를 보여 남을 놀라게 했다. 그림, <맹호도>를 남겨 그야말로 시서화에 천부적 재능을 가진 여성이었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현모양처, 그녀 성품이 여기까지였다면 이씨 집안의 영광일 뿐, 지금 우리가 그녀에 열광할 이유가 없다. 그녀 성품은 집안의 영달에 급급하지 않았다. 집안을 넘어 이웃을 생각하는 공동체의식이 강했다. 기근으로 이웃이 고초를 겪자 나랏골에서 그랬듯 많은 재산을 내놓았다. 그것으로 모자라면 도토리 죽을 쒀, 가난한 자, 배고픈 자를 구제하는 데 성심을 다했다. 21세기에 장계향을 되살려낸 것은 <음식디미방>이다. 70이 넘은 나이에 우리의 음식문화가 대대손손 이어져야 한다는 생각 끝에 한글로 된 조리서를 펴낸 것이다. 단순한 음식 레시피가 아니라 과학과 인생, 철학이 담겼다. 이 책은 현재 폭발적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300여 년 전의 음식문화를 계승하려는 전문가는 물론 이를 배우려는 학생들이 줄을 잇고 있다. 장계향은 매사에 성(誠)을 다한 여성이었다. 성은 그녀의 인생철학인 셈이다. 자식으로서,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성을 다한 것은 물론 개인을 넘어 이웃, 공동체로 인생의 폭을 넓힌 여성이었다. 그래서 조선 유일의 여성군자라 불린다. 아들 이현일이 이조판서가 되면서 '정부인 안동장씨'라 불리기도 하나 그녀에게 '장계향'이라는 이름보다 더 어울리는 이름이 없다. 누구의 어머니, 누구의 아내가 아니라 한 여성으로 당당히 이름을 남긴 것이다. 두들마을 이름이 낯설다. 그러나 낯선 건 우리뿐, 경상도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두들은 둔덕의 경상도 말로 두들마을은 둔덕진 곳에 들어선 마을이라는 뜻이다. 말마따나 여러 고택들이 언덕 위에 내려앉았다. 마을 한가운데 석고고택이 중심을 잡고 서쪽구석에 주곡고택, 동쪽으로 석계종택, 석간고택, 유우당이 나란하고 남쪽에 석천서당이 자리 잡았다. 마을에서 제일 오래된 집은 석계고택. 석계와 장계향이 이 마을에 들어와 맨 처음 살던 집이다. 부부는 인량마을을 떠나올 때 많은 재산을 놔두고 몸만 오다시피 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인지 고택은 아주 작고 검소하게 보였다. 사랑채와 안채가 두 줄로 나란한 두이자(二) 집이다. 사랑채 벽에 찰싹 달라붙어있는 아주 작은 굴뚝 하나가 눈을 사로잡았다.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고 가진 것을 드러내지 않으려 절제하고 등짝 넓은 벽에 주눅들지 않은 당당한 굴뚝이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조그마한 마당, 뜰이 있다. 두 줄로 뻗은 집채에 마당 양쪽은 흙돌담으로 막혀 마당은 네모꼴이다. 집안 마당을 중심으로 사방이 막혀있는 집을 뜰집이라 하는데 제법 뜰집 분위기가 나는 집이다. 혹자는 이를 뜰집의 원조, 조상으로 보는 이도 있다. 석계는 두들로 들어와 은둔하며 아이들 교육에 전념하고 세상 밖으로 나아가려하지 않았다. 이를 위해 석계는 마을 동남쪽 끝에 석천서당을 지었다. 처음에 초가이던 것을 1771년, 석계 아들, 항재 이숭일이 고쳐짓고 1891년 보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연보
(미정리)
1610년(13세) 학발시, 경신음, 성인음, 소소음 등을 짓다.
1615년(18세) 어머니가 장질부사로 몸져눕자 집안 일을 맡다.
1616년(19세) 영해 인량리 재령이씨 운악 이함 선생의 삼남 석계 이시명 선생에게 출가하다.
1622년(25세) 친정 모친 권씨부인 별세.
1631년(34세) 석계종택을 영양군 석보면 원리동으로 이주.
1633년(36세) 시아버지 별세, 친정 부친 경당 선생 별세.
1642년(45세) 7남 3녀를 훌륭히 성장시켰으며, 7남을 세칭 칠현자로 칭송받도록 했다.
1644년(47세) 시어머니 증정부인 진성이씨 별세.
1652년(55세) 병자국치를 슬퍼하며 영양군 수비로 이거.
1664년(67세) 신급(벽계 이은), 성급(밀암 이재)에게 학문을 권려하는 오언시를 써주다.
1670년(73세) 희우희를 씀. 그 당시의 넉넉하고 평온했던 심정이 드러난다.
1672년(75세) 조선조 전통음식 요리서인 규곤시의방 저술.
1673년(76세) 안동부 대명동(풍산읍 수곡리)로 이거, 부군 석계 선생 별세(84세).
1680년(83세) 7월 7일 영해부 석보에서 별세.
1689년 8월 셋째 아들 갈암 이현일(李玄逸)로 인해 정부인 교지 받다.
저서와 작품
저서
그녀의 작품으로 《음식디미방》과 《맹호도》 그리고 시 9편이 전해지고 있다. 《음식디미방》은 그의 집안 며느리와 딸들에게만 전해지던 것으로, 종부를 통해서 계속 전해졌으며, 기타 며느리나 딸들은 원본을 물려받을 수 없고, 다만 필사본을 베껴갈 수는 있도록 허락하였다. 조선시대 중기의 다양한 요리 방법이 기록된 《음식디미방》은 1910년에 와서 우연히 대중에 공개되었다.
작품
장씨 부인의 시는 아주 이채롭다. 다른 여성들의 글과는 달리 철학적 사색과 학문에 대한 감회를 표현하는 시가 많아서다. 또 그는 자신과는 별 상관이 없는 다른 계층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그들의 슬픔과 고단한 삶을 노래했다. 학자들은 이른바 ‘민중시’로 분류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어서 당시 다른 남성의 시들과도 차별점을 찾을 수 있다고 평가한다. 그 당시 양반집 출신의 많은 여류 시인들의 시적 주제는 자연, 효심, 님에 대한 그리움, 옛날의 회한 등. 주로 자신의 감정을 시로 표현했다. 이에 비춰 볼 때 인류애를 희구하는 그의 높은 인간 정신을 엿볼 수 있다.
‘학발시 ‘3장’(鶴髮詩 三章) ’이 이같은 장씨의 인류애를 느끼게 해 준다. 제목 ‘학발시 3장’은 학의 털과 같이 뽀얗게 센 머리의 할머니를 읊은 3장의 시라는 의미다. 열다섯살에 아들과 남편을 변방에 보낸, 이웃 동네의 어느 가난한 집을 다녀온 후 지은 이 시는 사언(四言) 의 고시(古詩) 로 “장부인 실기”(實紀) 마지막 부분에 초서로 쓰여 있다. 글체는 호쾌하다는 평. 내용만 보면 그 나이에 지은 시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민초들의 처절함이 알알이 배어 있다. 시를 지은 동기부터 갸륵하기 그지없다. “며느리가 수심에 잠겨 시어머니를 모시지만 만리 먼 변방에 군역 간 아들과 남편은 소식이 없다. 숨이 끊어졌다 이어졌다, 깜박깜박하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80이 넘은 애절한 시어머니를 보고 나도 슬퍼 이 시를 짓는다.” 그 내용은 지금도 보는 이의 애를 끊는다.
새하얀 머리 되어 병에 지쳐 누웠는데(鶴髮臥病)
자식은 만리 밖에 있구나(行子萬里)
자식이 만리 밖에 있으니(行子萬里)
어느 달에 돌아올꼬(曷月歸矣)
새하얀 머리 되어 병을 껴안고 누웠으나(鶴髮抱病)
서산에 지는 해는 붉게 타며 저물어 간다(西山日迫)
하늘에 손을 모아 빌고 또 빌어 봐도(祝手于天)
어찌해 하늘은 막막하기만 할까(天何漠漠)
머리 하얀 어미는 병을 부추겨(鶴髮扶病)
일어서고 또 넘어진다(或起或陪)
지금이 이와 같은데(今尙如斯)
찢어진 속옷 자락이 어찌하랴(絶据何若)
기다림에 지친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삶. 불쌍한 시어머니는 아들의 환영을 찾아 병든 몸을 이끌고 찢어진 속옷을 펄럭이며 아들의 환영을 찾아 거리로 뛰쳐나가고, 며느리는 그런 시어머니를 쫓아 뛰어나가 붙잡고 함께 운다. 남편과 아들을 기다리며 눈물과 한숨 속에서 몸부림치는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히 보이는 듯하다.
이 시는 흔히 중국 당송팔대가의 첫째로 꼽히는 백낙천의 시 ‘사부미’(思婦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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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비견된다. 하나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다. 백낙천은 민중적 시풍으로 억울한 사람들의 슬픔과 기쁨을 표현한 시인으로 유명하다. 사부미는 출정한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마음을 노래한 ‘슬픔에 젖은 아내의 눈썹’이란 의미. 두 시를 함께 읽으며 비교해 보면 색다른 한시의 맛을 느낄 수 있다.
동쪽에서 봄바람 어지러이 불어오니(春風搖蕩自東來)
살구꽃, 복숭아꽃 모두 꺾이고 매화는 터져 없어졌다(折盡櫻桃綻盡梅)
그래도 그리움에 지친 아내의 속눈썹은 그냥 남았으니(惟餘思婦愁眉結)
끊임없이 불어오는 봄바람도 시름을 덜어 주지는 못하는구나(無限春風吹不開)
<敬身吟>(몸가짐을 다짐함)
身是父母身 이 몸은 바로 어버이 몸이니 敢不敬此身 어찌 이 몸 조심하지 않으랴 此身如可辱 이 몸을 욕되게 한다면 乃是辱親身 이는 어버이 몸 욕되게 함이거늘
<聖人吟>(성현의 말씀으로 수양을 다짐함)
不生聖人時 성인이 살던 때 태어나지 못해 不見聖人面 성인의 모습 뵈옵지 못해도 聖人言可聞 성인의 말씀 들을 수 있고 聖人心可見 성인의 마음도 볼 수 있어라
<蕭蕭吟>(비 소리를 들으며 -자연과 합일을 추구하는 思惟를 읊음)
窓外雨蕭蕭 창밖에 소록소록 비 내리는 소리 蕭簫聲自然 이 빗소리는 자연의 소리 我聞自然聲 자연스러운 빗소리 듣노라면 我心亦自然 제 마음도 자연스러워지는구나
<鶴髮詩 三章>
鶴髮臥病 하얀 백발 되어 병에 지쳐 누웠는데 行子萬里 자식은 만리 밖에 있구나 行子萬里 자식이 만리 밖에 있으니 曷月歸矣 어느 달에 돌아올꼬
鶴髮抱病 하얀 백발 되어 병을 껴안고 누웠으나 西山日迫 서산에 지는 해는 붉게 타며 저물어 간다 祝手于天 하늘에 손을 모아 빌고 또 빌어 봐도 天何漠漠 어찌해 하늘은 막막하기만 할까
鶴髮扶病 하얀 백발 되어 병을 가누려지만 或起或陪 혹은 일어서고 혹은 기누나 今尙如斯 지금 오히려 이와 같은데 絶据何若 일 놓은 몰골이야 어찌 이만이라도 할까.
<贈孫信及><贈孫聖及>
見爾別友詩 지금 네 친구와의 이별시를 보니 中有學聖語 시에 성인의 말씀 배운다는 말 있구나 余心喜復嘉 내 마음이 기뻐 널 칭찬하면서 一筆持贈汝 한 수 지어 너에게 준단다
新歲作戒文 새해에 네가 자신 경계하는 글 지었다니 汝志非今人 너의 뜻은 지금 사람과 다르구나 童子已向學 어린 네가 학문에 뜻을 두었으니 可成儒者眞 참다운 선비 될 것일세
평가
여성군자로서의 모습
장계향과 이문열의 소설 <선택>
(미정리)
문화관광부는 조선중기 시문과 서·화에 능할 뿐만 아니라, 자녀교육에 귀감을 보임으로써 후세에 위대한 어머니상으로 추앙 받은 정부인 안동장씨(貞夫人 安東張氏 : 1598∼1680)를 1999년 11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여성이 문화인물로 선정된 것은 신사임당에 이어 두 번째이다. 여성군자와 페미니스트. 뭔가 전혀 어울릴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김치와 피자, 된장찌개와 드레싱처럼 어떤 연결점도 찾을 수 없다. 동양과 서양의 사물 인식과 세계관의 근본적인 차이와 충돌을 보여주는 듯 보이기도 한다. 추상적이고 모호하고 행위지향적인 동양의 사상과 구체적이고 분명하며 업적지향적인 서양의 사상이다. 우리가 이제 군자론을 고리타분한 것으로 여기며 군자와 멀어진 것은 서양의 사상과 생각을 받아들인 이상 필연이다. 이미 옛날처럼 생각하고 사고하고 느끼는 기법을 잊은 지 오래다. 군자론·공자·맹자 등은 그저 먼 옛날 이야기로만 들린다. 그런데 이 여성군자가 페미니스트와 반(反) 페미니스트 논쟁에 휘말려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논쟁의 시발을 제공했던 사람은 국내 최고 작가 이문열씨. 96년 안동 장씨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장편소설 ‘선택’을 “세계의 문학”에 연재하며 격렬한 페미니즘 논쟁을 일으켰다. 이씨는 죽은 안동 장씨의 혼백이 되돌아와 페미니즘에 빠져 있는 여성들을 심하게 꾸짖는 것으로 소설을 꾸미고 있다. 초두부터 강렬한 페미니즘 비판이 시작된다. 이문열씨는 장씨로 하여금 ‘나를 수백년 세월의 어둠과 무위 속에서 불러낸 것은 너희 이 시대를 살아가는 웅녀의 슬픈 딸들’이라고 말하도록 하고 있다. 소설 속의 장씨는 인생에서 크게 두가지 선택을 하게 되는데 첫째가 문자와 학문을 하겠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그 욕심을 버리고 평범한 여인으로 가자는 선택이었다. 첫째의 선택은 소장학자로서의 아버지가 준 영향, 글을 배우러 온 선비들이 만들어 놓은 남성문화 등 환경적인 요인으로 이뤄졌지만 “아내로서 이 세상을 유지하고 어머니로서 보다 나은 다음 세상을 준비하는 것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라는 생각에 학문에 대한 욕심과 그동안의 학문적 성취를 버리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결정을 후회하지 않고 아녀자로서의 도리를 다하니 많은 공덕을 쌓게 됐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4부로 되어 있는 이 책은 각 부(部) 마다 이땅의 페미니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다. 게다가 페미니즘 사상을 담은 문학작품의 실명이 쓰여져 누가 봐도 구체적으로 누구를 비판하는지 알게 해준다. 이를테면 “이혼은 ‘절반의 성공’쯤으로 정의되고 간음은 ‘황홀한 반란’으로 미화된다. 그리고 자못 비장하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외친다”는 식이다. 또 “진실로 걱정스러운 것은 요즘 들어 부쩍 높아진 목소리로 너희를 충동하고 유혹하는 수상스런 외침들이다. 그들은 이혼의 경력을 무슨 훈장처럼 가슴에 걸고 남성들의 위선과 이기와 폭력성과 권위주의를 폭로하고 그들과 싸운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는다”는 극단적인 발언이 곳곳에 쓰여 있다. 페미니스트들의 격렬한 반론이 나온 것은 당연했다. “아주 잘쓴 잡품”(雜品) 이라는 비아냥이 나왔는가 하면 “글도 잘 못쓰는 이문열”이라는 인신공격도 있었다. 이문열의 몰락을 예견한 사람도 있고 그 몰락을 기대한 사람도 있었다. “서점에서 책을 치우라”는 외침과 “문화의 권력자 이문열”이라는 비판이 난무했다. 어떤 이들은 “논쟁의 정도가 너무 원색적이고 격렬해서 사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점잖게 꾸짖었다. 물론 이씨의 견해를 적극 옹호한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왜곡된 페미니즘에 일침을 가했다”는 소리도, “역시 대단한 작가”라는 말도 나왔다. 그러나 이같은 논쟁은 한가지 가능성을 배제했다. 논쟁 자체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사회·문화의 패러다임이 지배하던 조선시대 한 여성의 삶을 현대의 페미니즘과 반(反) 패미니즘의 패러다임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여성론과 군자론은 그 자체로 유효하다. 또 주자학적이고 유교적인 맥락 안에서만 온전히 존재한다. 그곳에서 조선시대 여성을 꺼낸 후 ‘현대적’이라는 이름으로 재해석을 시도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더욱이 장씨는 조선시대 5백년사에서 유일한 ‘여성군자’다. 이 성인을 페미니스트인가 반페미니스트인가라는 잣대로 구분한다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 아닐 수 없다. 결과적으로 이씨의 이 모험은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동양사회의 이상형 ‘군자’를 페미니즘-반페미니즘의 양분법적 사고로 해체시켜 버렸다. “선택”에서 보여진 장씨에게서 어질고 후덕(厚德) 한 ‘군자다움’은 찾아보기 어렵다. 설사 그의 혼백이 되살아났다고 해도 구체적인 실명을 거론하며 신랄하게 페미니스트들을 비난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신랄한 비판은 성인군자 장씨에게는 전혀 어룰리지 않는 덕목이다. 실수로 불을 놓쳐 짜던 베를 반이나 태워먹어도 단 한번도 야단치지 않았던 장씨다. 남이 아파하는 것, 고생하는 것을 참지 못했던 유별난 이타심과 동정심을 갖고 있던 여인이기도 했다. 하인으로 하여금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게 해 저녁을 짓지 못하는 집을 찾아 돌봐주는 자애심도 컸다. 이씨의 “선택”에는 이같은 장씨의 행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러나 그의 ‘성인군자다움’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저 논리적으로 말 잘하는 독설가로서 한 옛날 여인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하늘이 내려주신 성인을 일개 반페미니스트로 그린 탓이다. 동양식 사고를 서양식 사고로 풀었다는 것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성인을 남자냐 여자냐로 구분한다는 것초자 오류일 수 있다. 남자로 태어났든 여자로 태어났든 성인은 모든 이에게 추앙의 대상일 뿐이다. ‘인류애’는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씨의 소설은 이미 28쇄를 찍었고 30만부나 팔려 나갔다. ‘성인’과 ‘군자다움’이 빠져나간 장씨의 모습이 그만큼 유포됐다는 말과 다름 아니다. 이씨의 오류는 곧 페미니스트들의 오류를 불렀다. 이들은 이씨만큼이나 강한 어조로 이씨를 비난했고 그 과정에서 장씨는 심각하게 그 실상을 훼손당했다. 한 페미니스트는 장씨를 가리켜 “4백년 전 철저하게 남성이 원하는 모든 것을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해줌으로써 ‘정부인’이라는 허술한 소득을 챙긴 매춘 여성”이라고 썼다. 성인이자 군자가 매춘부로 전락하는 상황이 연출됐던 것이다. 또 한 페미니스트는 소설의 화자가 혼령인 것에 빗대 “가부장제의 망령이 배회하고 있다”며 비슷한 논지를 폈다. 이에 맞서 장씨 종친회는 고소를 불사하겠다고 으름짱을 놓았다. 오류와 잘못된 감정 분출의 연속이었다. 동양의 이상형 군자의 모습은 논쟁과 싸움 어디서고 찾을 수가 없다. 한 페미니스트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우리는 장씨의 실상이 당시 얼마나 왜곡됐었는지를 알 수 있다. “만일 장씨 부인이 실제로 소설에서처럼 살았다면 어땠을까. 장씨 부인은 피를 토하고 말았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억울하게 처절하게 당하면서 살았다고. 그래서 내 한평생은 눈물과 분노와 회한으로 점철된 삶이었다고. 그러니 제발 오늘을 사는 여성들이여, 절대로 나같이 살지 말라고 울부짖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 해석은 전적으로 잘못됐다. “실기”의 내용 자체를 의심한다면 모를까 이씨의 소설 “선택”은 “실기”의 모든 것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내용은 역사적 사실에 가까운 것이다. 단지 “실기”에 드러나지 않은 페미니즘에 대한 생각을 이씨가 만들어 넣었고 이 대목에서 장씨의 삶 전체가 오해받고 말았다. 장씨에 대한 이미지 훼손은, 따라서 1차적으로는 이씨가 책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장씨의 혼백이 있다면 그는 이같은 논쟁을 어떻게 볼까. 자신의 삶과 이미지를 깼다고 화를 낼까.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며 한 사람의 손을 들어줄까. 아무래도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자신이 어떻게 훼손됐든 개의치 않고 아무 말 없이 누구의 잘못이든 용서해 줄 것이다. 그리고 따뜻이 어루만져 줄 테고 본인이 할 수 있는 한 스스로 잘못된 곳을 고치려 할 것이다. 아무도 몰래, 아무에게도 알리지도 않고…. 그것이 조선시대 그리고 있는 성인이요, 군자의 모습이 아닐까. 그리고 이 모습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추앙받아 마땅하다. 자꾸만 서구식 사고에 물든 우리가 ‘현대의 감옥’안에 앉아서 우주를 논하던 과거의 시대, 과거의 사람을 재서는 곤란하다. 자신의 편협한 사고의 대변자로 활용한다는 것은 더더욱 문제다. ‘신성모독’(神性冒瀆)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멀티미디어 자료
*안동MBC "오래된 약속 73편: 여중군자 장계향(2016.08.01)
*대구MBC 보도 "여성군자 장계향 다시 태어나다(2013.04.15)
관련정보
한글고문헌_전시자료
- 장계향은 음식디미방을 저술하였다.
인물
공간
- 장계향은 석계종택에 거주하였다.
문헌
- 장계향은 소설_선택의 등장인물이다.
개념
- 장계향은 조선시대 현모양처의 표본이다.
각주
참고문헌
온라인
오프라인
- 장계향 외, 이재호 역, 「국역 정부인 안동장씨 실기」(실기간행소, 1999).
- 장계향, 「음식디미방」(경북대학교 출판부, 2003).
- 「갈암집」.
- 「석계집」
- 「운악선생문집」.
- 「경당집」.
- 「조선왕조실록」
- 박광용, 「정부인 안동장씨」(문화관광부/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99).
- 김서령, 「장계향, 깨달은 조선 여인」(경상북도/경북여성정책개발원, 2009).
- 이문열, 「선택」(민음사, 1997).
- 이원걸 역, 「안동 여류 한시」(이회, 2002).
- 전송열 편, 「思親」(서해문집, 2007).
- 조혜란 외, 「부자유한 시대에 너무나 비범했던 조선의 여인들」(돌베개, 2004).
- 정혜경, 「한국음식 오디세이」(생각의 나무, 2007).
- 안병주 외, 「정부인 안동장씨 추모 학술대회 발표논문집 : 정부인 안동장씨의 삶과 학예」(정부인 안동장씨 기념사업회/퇴계학연구원, 1999).
- 경북여성정책개발원, 「2008 경북 여성인물 재조명 심포지엄 자료집 : 일상의 삶을 역사로 만든 정부인 안동장씨」(2008).
-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일상의 삶을 역사로 만든 정부인 안동장씨」(2008).
- 홍필남, “안동장씨의 예술세계,” 경주대학교 석사학위논문(2003).
- 안귀남, “안동장씨의 「음식디미방」 연구,” 「안동어문학」, 10(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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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구, “「선택」의 장씨부인 실제는 성인 꿈꿔,” 「중앙선데이」(2007.5.13).
- 정라곤, “후세에 빛나는 여중군자, 장계향,” 「울진타임즈」(2009.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