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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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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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는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봉암사 경내에 있다. 귀부 및 이수, 비좌의 조각이 뛰어나서 보물 제138호로 지정되었다. 비신의 높이는 273cm, 너비 164cm, 두께 23cm이다. 탑비는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로 유명하다. 지증대사(智證大師)는 진골출신으로 속성이 김씨이고, 법호는 도헌(道憲)이며, 선종 9산문의 하나인 희양산문(曦陽山門)을 개창한 사람이다. 824년(헌덕왕 16)에 태어나 9세에 출가하였고, 이후 여러 사찰에서 교화활동을 벌였다. 879년(헌강왕 5) 56세에 대사가 소유하고 있던 전장(田莊) 500결을 사찰에 희사하였고, 이 해에 심충(沈忠)이 희사한 땅에 봉암사(鳳巖寺)를 창건하고 희양산문을 개창하여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진경대사는 진골출신으로서 신라 왕실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었으며, 헌강왕의 부름을 받아 경주의 월지궁(月池宮)에 나아가 직접 설법하기도 하였다. 대사는 882년(헌강왕 8) 41세의 나이로 입적하였고, 헌강왕은 885년에 왕명으로 최치원(崔致遠)에게 진경대사의 비문을 짓게 하였다. 893년(진성여왕 7) 무렵에 최치원이 비문을 완성하였고, 탑비는 그 보다 훨씬 늦은 924년(경애왕 1)에 건립되었다. 비문에서 신라불교사를 크게 3기로 구분하였고, 제3기를 선종의 시대라고 정리하였다. 진경대사는 일찍이 신라사회에 수입된 북종선(北宗禪)을 계승하여 신라 하대에 비로소 들어오기 시작한 남종선과 구별되었다. 비문의 내용은 신라 선종사 이해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료일 뿐만 아니라 신라시대 토지소유관계, 전장(田莊)의 성격 등을 연구할 때에도 기초 자료로 적극 활용되고 있다.  -한국금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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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부 및 이수, 비좌의 조각이 뛰어나다. 비신의 높이는 273cm, 너비 164cm, 두께 23cm이다. 탑비는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로 유명하다. 대사는 882년(헌강왕 8) 41세의 나이로 입적하였고, 헌강왕은 885년에 왕명으로 최치원(崔致遠)에게 진경대사의 비문을 짓게 하였다. 893년(진성여왕 7) 무렵에 최치원이 비문을 완성하였고, 탑비는 그 보다 훨씬 늦은 924년(경애왕 1)에 건립되었다. 비문에서 신라불교사를 크게 3기로 구분하였고, 제3기를 선종의 시대라고 정리하였다. 진경대사는 일찍이 신라사회에 수입된 북종선(北宗禪)을 계승하여 신라 하대에 비로소 들어오기 시작한 남종선과 구별되었다. 비문의 내용은 신라 선종사 이해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료일 뿐만 아니라 신라시대 토지소유관계, 전장(田莊)의 성격 등을 연구할 때에도 기초 자료로 적극 활용되고 있다.  -한국금석문
  
최치원이 지증대사(智證大師) 도헌을 현창하기 위해 893년(진성여왕 7) 무렵에 찬술한 비문이다. 현재 남아있는 것은 924년(경애왕 1)에 세워진 것으로,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봉암사 경내에 있다. 사산비명(四山碑銘) 중의 하나로서 선의 전래와 구산선문(九山禪門)의 개창에 관한 기록이 많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38호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1월 4일 국보 제315호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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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이 지증대사(智證大師) 도헌을 현창하기 위해 893년(진성여왕 7) 무렵에 찬술한 비문이다. 현재 남아있는 것은 924년(경애왕 1)에 세워진 것으로,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봉암사 경내에 있다. 사산비명(四山碑銘) 중의 하나로서 선의 전래와 구산선문(九山禪門)의 개창에 관한 기록이 많다.  
 
도헌이 882년(헌강왕 8)에 봉암사에서 입적하자 왕은 ‘지증(智證)’이라는 시호와 ‘적조(寂照)’라는 탑명을 내리고 당에서 귀국한 최치원에게 비문을 짓게 하였다. 비문에 적힌 최치원의 관직명으로 보아 893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 뒤 30년이 지난 924년에 분황사 승려 혜강(慧江)이 비문을 쓰고 이를 새겨 건립하였다.
 
도헌이 882년(헌강왕 8)에 봉암사에서 입적하자 왕은 ‘지증(智證)’이라는 시호와 ‘적조(寂照)’라는 탑명을 내리고 당에서 귀국한 최치원에게 비문을 짓게 하였다. 비문에 적힌 최치원의 관직명으로 보아 893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 뒤 30년이 지난 924년에 분황사 승려 혜강(慧江)이 비문을 쓰고 이를 새겨 건립하였다.
비석의 크기나 귀부와 이수의 조각수법 등이 통일신라 말기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양식과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비신은 청석(靑石)으로 귀부(龜趺)·이수(螭首) 및 비좌(碑座)의 조각이 뛰어나다. 글씨는 자경 2㎝ 크기의 행서로 왕희지(王羲之) 글씨의 영향을 받고 있으나 꾸밈없는 필획은 일가를 이룬 글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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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의 크기나 귀부와 이수의 조각수법 등이 통일신라 말기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양식과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비신은 청석(靑石)으로 귀부(龜趺)·이수(螭首) 및 비좌(碑座)의 조각이 뛰어나다. 글씨는 자경 2㎝ 크기의 행서로 왕희지(王羲之) 글씨의 영향을 받고 있다.
 
최치원이 지은 본 비문에는 통일신라시대 불교계의 상황을 전하는 귀중한 기록을 담고 있다. 우선 비문에는 “(도헌의) 법의 계보를 보면, 당의 제4조 도신(道信, 580∼651)을 오대 스승으로 하여 점차 동쪽의 이 땅에 법을 전하여 왔는데, 법맥을 위로 따져보면 쌍봉의 제자는 법랑, 손제자는 신행, 증손제자는 준범, 현손제자는 혜은, 내손제자가 대사이다.[法胤唐四祖爲五世父 東漸于海 遡游數之 雙峰子法朗 孫愼行 曾孫遵範 玄孫慧隱 來孫大師也]”라고 전하고 있다. 이 기록은 우리나라에 최초로 선을 전래한 사람은 7∼8세기경 법랑(法朗)으로서, 제4조 도신(혹은 쌍봉(雙峯)이라고도 함)의 법을 전했다고 한다. -민백
 
최치원이 지은 본 비문에는 통일신라시대 불교계의 상황을 전하는 귀중한 기록을 담고 있다. 우선 비문에는 “(도헌의) 법의 계보를 보면, 당의 제4조 도신(道信, 580∼651)을 오대 스승으로 하여 점차 동쪽의 이 땅에 법을 전하여 왔는데, 법맥을 위로 따져보면 쌍봉의 제자는 법랑, 손제자는 신행, 증손제자는 준범, 현손제자는 혜은, 내손제자가 대사이다.[法胤唐四祖爲五世父 東漸于海 遡游數之 雙峰子法朗 孫愼行 曾孫遵範 玄孫慧隱 來孫大師也]”라고 전하고 있다. 이 기록은 우리나라에 최초로 선을 전래한 사람은 7∼8세기경 법랑(法朗)으로서, 제4조 도신(혹은 쌍봉(雙峯)이라고도 함)의 법을 전했다고 한다. -민백
  
이 석비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희양산문(曦陽山門)의 개창자인 도헌국사(道憲國師) 곧 지증대사(智證大師)의 탑비로서, 비석의 크기나 귀부와 이수의 조각수법 등이 통일신라 말기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양식과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비문에는 신라의 불교사를 3시기로 나누어 약술하고 도신(道信)-쌍봉(雙峰)-법랑(法朗)-신행(愼行)-준범(遵範)-혜은(慧隱)-도헌(道憲)으로 이어지는 도헌국사의 법계(法系)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어서 신라하대의 불교사 특히 선종사(禪宗史) 연구의 중요한 1차 사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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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석비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희양산문(曦陽山門)의 개창자인 지증대사(智證大師)의 탑비로서, 비석의 크기나 귀부와 이수의 조각수법 등이 통일신라 말기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양식과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비문에는 신라의 불교사를 3시기로 나누어 약술하고 도신(道信)-쌍봉(雙峰)-법랑(法朗)-신행(愼行)-준범(遵範)-혜은(慧隱)-도헌(道憲)으로 이어지는 도헌국사의 법계(法系)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어서 신라하대의 불교사 특히 선종사(禪宗史) 연구의 중요한 사료가 된다.
 
한편, 이 비문에는 신라 하대의 인명, 지명, 관명, 사찰명, 제도, 풍속 등 많은 정보를 담고 있어 신라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신라의 왕토사상(王土思想) 및 사원에 토지를 기진(寄進)하는 절차를 알려주는 내용이 담겨 있으며, 신라 말 선종 산문의 개창이 지방 유력자의 후원에 힘입어 이루어졌음을 알려주는 명확한 기록이 비문 중에 밝혀져 있고 비 건립의 후원자 또한 명확하게 밝혀진 것도 이 비가 갖는 의의를 높여 준다. 또 사원 운영의 주체인 사직(寺職)의 구체적인 모습이 확인되는 신라 유일의 비라는 점도 의의가 크다. 뿐만 아니라 이 비문에는 백제의 소도(蘇塗)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는 백제 소도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국내 유일의 기록이다. -문화재청
 
한편, 이 비문에는 신라 하대의 인명, 지명, 관명, 사찰명, 제도, 풍속 등 많은 정보를 담고 있어 신라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신라의 왕토사상(王土思想) 및 사원에 토지를 기진(寄進)하는 절차를 알려주는 내용이 담겨 있으며, 신라 말 선종 산문의 개창이 지방 유력자의 후원에 힘입어 이루어졌음을 알려주는 명확한 기록이 비문 중에 밝혀져 있고 비 건립의 후원자 또한 명확하게 밝혀진 것도 이 비가 갖는 의의를 높여 준다. 또 사원 운영의 주체인 사직(寺職)의 구체적인 모습이 확인되는 신라 유일의 비라는 점도 의의가 크다. 뿐만 아니라 이 비문에는 백제의 소도(蘇塗)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는 백제 소도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국내 유일의 기록이다. -문화재청
  
이 비에는 탑비를 세운 연대가 밝혀져 있을 뿐 아니라, 비문을 쓰고 각자(刻字)한 사람이 분황사의 승려 혜강(慧江)임이 밝혀져 있어서 한국 서예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저자 최치원은 여타 전기자료와는 달리 지증대사의 일생 행적을 여섯 가지의 신이(神異)한 사실〔육이(六異)〕과 여섯 가지의 훌륭한 행적 육시(六是)로 정리하고, 예를 들어가며 구체적으로 기술하였는데 이는 다른 비문에서는 볼 수 없는 전기 서술의 한 특징이다.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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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최치원은 여타 전기자료와는 달리 지증대사의 일생 행적을 여섯 가지의 신이(神異)한 사실〔육이(六異)〕과 여섯 가지의 훌륭한 행적 육시(六是)로 정리하고, 예를 들어가며 구체적으로 기술하였는데 이는 다른 비문에서는 볼 수 없는 전기 서술의 한 특징이다. -위키
  
신라 말기 선종 불교의 아홉 개 대표 종파였던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인 희양산문(曦陽山門)의 개창자 지증대사(智證大師)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비석 받침인 귀부(龜趺)와 비석 머리인 이수(螭首) 등이 전형적인 신라 말기의 탑비 조성 양식을 보여주는 데다 비문도 온전히 남아 있어 학술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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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부(龜趺)와 이수(螭首) 등이 전형적인 신라 말기의 탑비 조성 양식을 보여주는 데다 비문도 온전히 남아 있어 학술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이 비의 비문은 신라의 대학자이며 문장가인 최치원(崔致遠, 857~?)이 지은 것이다. 이 비석은 최치원이 지은 다른 비문들인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 국보 제8호),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雙磎寺 眞鑑禪師大空塔碑, 국보 제47호)와 함께 4산비문의 하나로 일컬어진다.
 
 
비문은 지증대사의 일생을 여섯 가지 신이한 사실 ‘육이(六異)’와 여섯 가지 훌륭한 행적 ‘육시(六是)’로 정리하는 등 독특한 전기 서술법을 보여준다. 이밖에 신라 하대의 인명, 지명, 관명, 사찰명, 제도, 풍속 등의 정보와 백제의 소도(蘇塗)에 대한 기록도 적혀 있는데, 이는 백제 소도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국내 유일의 기록이다.
 
비문은 지증대사의 일생을 여섯 가지 신이한 사실 ‘육이(六異)’와 여섯 가지 훌륭한 행적 ‘육시(六是)’로 정리하는 등 독특한 전기 서술법을 보여준다. 이밖에 신라 하대의 인명, 지명, 관명, 사찰명, 제도, 풍속 등의 정보와 백제의 소도(蘇塗)에 대한 기록도 적혀 있는데, 이는 백제 소도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국내 유일의 기록이다.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는 본래 보물 제138호로 지정돼 있다가, 2009년 12월 국보 제315호로 승격 지정됐다.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는 본래 보물 제138호로 지정돼 있다가, 2009년 12월 국보 제315호로 승격 지정됐다.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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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
 
===비문===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38호로 지정되었으며, 2010년 1월 4일 국보 제315호로 승격지정되었다. 높이 2.73m, 너비 l.64m, 두께 23cm이다. 재료는 편마암이다. 비의 조출(彫出)이 뚜렷하고 이수(螭首)의 조형등은 다양하여, 사실성(寫實性)을 띠고 있다. 귀부(龜趺)와 이수가 완전히 보존되어 있으며, 귀두(龜頭)는 이미 용두화(龍頭化)되어 있다. 비좌(碑座)의 각면에 비천상(飛天像)을 각출(刻出)한 점 등은 통일신라시대 성기(盛期)의 요약된 강렬한 표현기법이 말단장식화(末端裝飾化)되는 기법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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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38호로 지정되었으며, 2010년 1월 4일 국보 제315호로 승격되었다. 높이 2.73m, 너비 l.64m, 두께 23cm이다. 귀부(龜趺)와 이수가 완전히 보존되어 있으며, 귀두(龜頭)는 이미 용두화(龍頭化)되어 있다. -두산
최치원이 지은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로 통일신라 때 세워졌다. 구산선문의 하나인 희양산문의 개조 지증(智證:824∼882)을 기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비문에 따르면 882년(헌강왕 8) 지증이 입적하자 왕이 시호를 내리고 적조라는 탑호와 함께 비명을 최치원에게 짓게 하였다. 최치원의 관직명으로 보아 비문은 893년(진성여왕 7)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며 탑이 건립된 것은 그로부터 30년 뒤인 924년(경애왕 1)이었다. 분황사의 혜강(慧江)이 글씨를 썼으며 글씨 크기는 2cm로 왕희지체의 영향을 받은 행서이다. 선종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탑비이다.
 
-두산
 
  
 
=='''지식관계망'''==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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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13일 (화) 13:27 판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聞慶 鳳巖寺 智證大師塔碑)
BHST Stele.png
대표명칭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영문명칭 Stele for Buddhist Monk Jijeung at Bongamsa Temple, Mungyeong
한자 聞慶 鳳巖寺 智證大師塔碑
이칭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
주소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485
문화재 지정번호 국보 제315호
문화재 지정일 2010년 01월 04일
찬자 최치원(崔致遠)
서자 혜강(慧江)
각자 혜강(慧江)
서체 행서(行書)
승려 도헌(道憲)
건립연대 924년
승탑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



정의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봉암사(鳳巖寺)에 있는 통일신라의 승려 지증대사 도헌(智證大師 道憲, 824-882)의 탑비.

내용

개요

귀부 및 이수, 비좌의 조각이 뛰어나다. 비신의 높이는 273cm, 너비 164cm, 두께 23cm이다. 탑비는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로 유명하다. 대사는 882년(헌강왕 8) 41세의 나이로 입적하였고, 헌강왕은 885년에 왕명으로 최치원(崔致遠)에게 진경대사의 비문을 짓게 하였다. 893년(진성여왕 7) 무렵에 최치원이 비문을 완성하였고, 탑비는 그 보다 훨씬 늦은 924년(경애왕 1)에 건립되었다. 비문에서 신라불교사를 크게 3기로 구분하였고, 제3기를 선종의 시대라고 정리하였다. 진경대사는 일찍이 신라사회에 수입된 북종선(北宗禪)을 계승하여 신라 하대에 비로소 들어오기 시작한 남종선과 구별되었다. 비문의 내용은 신라 선종사 이해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료일 뿐만 아니라 신라시대 토지소유관계, 전장(田莊)의 성격 등을 연구할 때에도 기초 자료로 적극 활용되고 있다. -한국금석문

최치원이 지증대사(智證大師) 도헌을 현창하기 위해 893년(진성여왕 7) 무렵에 찬술한 비문이다. 현재 남아있는 것은 924년(경애왕 1)에 세워진 것으로,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봉암사 경내에 있다. 사산비명(四山碑銘) 중의 하나로서 선의 전래와 구산선문(九山禪門)의 개창에 관한 기록이 많다. 도헌이 882년(헌강왕 8)에 봉암사에서 입적하자 왕은 ‘지증(智證)’이라는 시호와 ‘적조(寂照)’라는 탑명을 내리고 당에서 귀국한 최치원에게 비문을 짓게 하였다. 비문에 적힌 최치원의 관직명으로 보아 893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 뒤 30년이 지난 924년에 분황사 승려 혜강(慧江)이 비문을 쓰고 이를 새겨 건립하였다. 비석의 크기나 귀부와 이수의 조각수법 등이 통일신라 말기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양식과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비신은 청석(靑石)으로 귀부(龜趺)·이수(螭首) 및 비좌(碑座)의 조각이 뛰어나다. 글씨는 자경 2㎝ 크기의 행서로 왕희지(王羲之) 글씨의 영향을 받고 있다. 최치원이 지은 본 비문에는 통일신라시대 불교계의 상황을 전하는 귀중한 기록을 담고 있다. 우선 비문에는 “(도헌의) 법의 계보를 보면, 당의 제4조 도신(道信, 580∼651)을 오대 스승으로 하여 점차 동쪽의 이 땅에 법을 전하여 왔는데, 법맥을 위로 따져보면 쌍봉의 제자는 법랑, 손제자는 신행, 증손제자는 준범, 현손제자는 혜은, 내손제자가 대사이다.[法胤唐四祖爲五世父 東漸于海 遡游數之 雙峰子法朗 孫愼行 曾孫遵範 玄孫慧隱 來孫大師也]”라고 전하고 있다. 이 기록은 우리나라에 최초로 선을 전래한 사람은 7∼8세기경 법랑(法朗)으로서, 제4조 도신(혹은 쌍봉(雙峯)이라고도 함)의 법을 전했다고 한다. -민백

이 석비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희양산문(曦陽山門)의 개창자인 지증대사(智證大師)의 탑비로서, 비석의 크기나 귀부와 이수의 조각수법 등이 통일신라 말기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양식과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비문에는 신라의 불교사를 3시기로 나누어 약술하고 도신(道信)-쌍봉(雙峰)-법랑(法朗)-신행(愼行)-준범(遵範)-혜은(慧隱)-도헌(道憲)으로 이어지는 도헌국사의 법계(法系)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어서 신라하대의 불교사 특히 선종사(禪宗史) 연구의 중요한 사료가 된다. 한편, 이 비문에는 신라 하대의 인명, 지명, 관명, 사찰명, 제도, 풍속 등 많은 정보를 담고 있어 신라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신라의 왕토사상(王土思想) 및 사원에 토지를 기진(寄進)하는 절차를 알려주는 내용이 담겨 있으며, 신라 말 선종 산문의 개창이 지방 유력자의 후원에 힘입어 이루어졌음을 알려주는 명확한 기록이 비문 중에 밝혀져 있고 비 건립의 후원자 또한 명확하게 밝혀진 것도 이 비가 갖는 의의를 높여 준다. 또 사원 운영의 주체인 사직(寺職)의 구체적인 모습이 확인되는 신라 유일의 비라는 점도 의의가 크다. 뿐만 아니라 이 비문에는 백제의 소도(蘇塗)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는 백제 소도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국내 유일의 기록이다. -문화재청

저자 최치원은 여타 전기자료와는 달리 지증대사의 일생 행적을 여섯 가지의 신이(神異)한 사실〔육이(六異)〕과 여섯 가지의 훌륭한 행적 육시(六是)로 정리하고, 예를 들어가며 구체적으로 기술하였는데 이는 다른 비문에서는 볼 수 없는 전기 서술의 한 특징이다. -위키

귀부(龜趺)와 이수(螭首) 등이 전형적인 신라 말기의 탑비 조성 양식을 보여주는 데다 비문도 온전히 남아 있어 학술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비문은 지증대사의 일생을 여섯 가지 신이한 사실 ‘육이(六異)’와 여섯 가지 훌륭한 행적 ‘육시(六是)’로 정리하는 등 독특한 전기 서술법을 보여준다. 이밖에 신라 하대의 인명, 지명, 관명, 사찰명, 제도, 풍속 등의 정보와 백제의 소도(蘇塗)에 대한 기록도 적혀 있는데, 이는 백제 소도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국내 유일의 기록이다.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는 본래 보물 제138호로 지정돼 있다가, 2009년 12월 국보 제315호로 승격 지정됐다.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비문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38호로 지정되었으며, 2010년 1월 4일 국보 제315호로 승격되었다. 높이 2.73m, 너비 l.64m, 두께 23cm이다. 귀부(龜趺)와 이수가 완전히 보존되어 있으며, 귀두(龜頭)는 이미 용두화(龍頭化)되어 있다. -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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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문경 봉암사 A는 B에 있다
헌강왕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A는 B의 이름을 지었다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도헌 A는 B를 위한 비이다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최치원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혜강 A는 B가 비문을 썼다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혜강 A는 B가 비문을 새겼다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사산비명 A는 B와 관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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