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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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비는 대사가 945년 입적하고 그로부터 5년 후인 950년에 조성되었다. | 탑비는 대사가 945년 입적하고 그로부터 5년 후인 950년에 조성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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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임금이 본산(本山)에 대사의 탑을 세우게 하되, 경비는 모두 국고에서 부담하게 하고 역부(役夫)로는 부근 주민을 동원토록 하였다. 공사를 마치고 나니 장엄이 주밀(周密)하고 조탁(彫琢)도 매우 우아하였다. 상수문인(上首門人)들이 다시 조정에 건의하되 “선사신(先師臣) 아모가 다행하게 임금님의 도움을 입어 탑을 세웠으니, 국은(國恩)이 망극하여 생전과 사후에 걸쳐 함께 영광이오나 아직 탑에 따른 비명(碑銘)이 없어 선사께서 생전에 쌓은 도행(道行)이 점차로 (결락) 윤몰(淪沒)할까 두렵사오니 비를 세우도록 윤허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하였다. 왕은 수비(樹碑)를 허락하시고 미신(微臣)인 저에게 비문을 지어 스님의 선화(禪化)를 의양(宣揚)토록 하라 명하셨으나, 소(紹)는 칠보시(七步詩)를 지을 만한 재주도 못되며 학문(學問)도 오거(五車)의 책도 읽지 못한 변변치 아니한 선비이므로 굳게 사양하였지만 마지못하여 주생(朱生)과 같이 근부(斤斧)를 잡고, 예씨(禰氏)를 칭찬하는 것이니 부득이하여 억지로 엮어 비문을 지었다. ..... 광덕(光德) 2년 세차 경술 10월 15일 세우고, 문민(文旻)이 글자를 새기다. | {{Blockquote|임금이 본산(本山)에 대사의 탑을 세우게 하되, 경비는 모두 국고에서 부담하게 하고 역부(役夫)로는 부근 주민을 동원토록 하였다. 공사를 마치고 나니 장엄이 주밀(周密)하고 조탁(彫琢)도 매우 우아하였다. 상수문인(上首門人)들이 다시 조정에 건의하되 “선사신(先師臣) 아모가 다행하게 임금님의 도움을 입어 탑을 세웠으니, 국은(國恩)이 망극하여 생전과 사후에 걸쳐 함께 영광이오나 아직 탑에 따른 비명(碑銘)이 없어 선사께서 생전에 쌓은 도행(道行)이 점차로 (결락) 윤몰(淪沒)할까 두렵사오니 비를 세우도록 윤허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하였다. 왕은 수비(樹碑)를 허락하시고 미신(微臣)인 저에게 비문을 지어 스님의 선화(禪化)를 의양(宣揚)토록 하라 명하셨으나, 소(紹)는 칠보시(七步詩)를 지을 만한 재주도 못되며 학문(學問)도 오거(五車)의 책도 읽지 못한 변변치 아니한 선비이므로 굳게 사양하였지만 마지못하여 주생(朱生)과 같이 근부(斤斧)를 잡고, 예씨(禰氏)를 칭찬하는 것이니 부득이하여 억지로 엮어 비문을 지었다. ..... 광덕(光德) 2년 세차 경술 10월 15일 세우고, 문민(文旻)이 글자를 새기다. | ||
|출처=이지관, "곡성 대안사 광자대사탑비",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357-358쪽.}} | |출처=이지관, "곡성 대안사 광자대사탑비",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357-358쪽.}} |
2017년 5월 28일 (일) 20:11 판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谷城 泰安寺 廣慈大師塔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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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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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谷城 泰安寺 廣慈大師塔碑 |
이칭 | 대안사광자대사비(大安寺廣慈大師碑) |
주소 | 전남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산18-1 |
문화재 지정번호 | 보물 제275호 |
문화재 지정일 | 1963.01.21 |
찬자 | 손소(孫紹) |
서자 | 미상 |
각자 | 문민(文旻) |
승려 | 윤다(允多) |
승탑 |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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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태안사(泰安寺)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고승 광자대사 윤다(廣慈大師 允多, 864-945)의 탑비.
내용
탑비
귀부(龜趺) 위에 이수(螭首)만 얹혀져 있는 상태로, 비신(碑身)은 파괴되었다.
탑비는 대사가 945년 입적하고 그로부터 5년 후인 950년에 조성되었다.
이수(螭首)의 네 귀퉁이마다 이무기의 머리조각이 돌출되어 있고, 앞면에는 극락조(極樂鳥)로 보이는 새가 돋을새김되어 있다. 이러한 새 종류의 조각은 구례 연곡사 동 승탑(求禮 鷰谷寺 東 僧塔, 국보 제53호)이나, 구례 연곡사 북 승탑(求禮 鷰谷寺 北 僧塔, 국보 제54호)에서 잘 나타나 있다.[1]
비문
비문은 손소(孫紹)가 짓고, 문민(文旻)이 새겼으며, 글쓴이는 알 수 없다.
유당(有唐) 고려국(高麗國) 무주(武州) 동리산(桐裏山) 대안사(大安寺) 광자대사비문(廣慈大師碑文)과 아울러 서문.
태상(太相) 전수예빈령(前守禮賓令) 원봉령(元鳳令) 겸지제고(兼知制誥) 상주국(上柱國) 사자금어대(賜紫金魚袋) 신(臣) 손소(孫紹)가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사찬(沙粲) (결락) 監 (결락) 賜緋魚 (결락) 는 비문을 쓰다.[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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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비신이 파괴되어 문헌을 통해서 비문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는 결락이 극심하여 후반부분은 거의 마멸 상태이고,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도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보다는 덜하지만 역시 결락이 심하여 뜻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이며, 『한국금석전문(韓國金石全文)』은 거의 완비한 상태로 되어 있다.[3]
정간(井間)을 치고 쓴 이 비의 글씨는 왕희지(王羲之)의 행서(行書)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초서(草書)도 간간히 나타나며, 또한 결체(結體)에 있어서 약간의 무리와 과장이 여실한 김생(金生)의 독특한 필치를 닮은 글씨들도 섞여 있다. 전반적으로 볼 때 필력이 건경(健勁)하며 아취와 신운(神韻)이 감도는 작품으로, 통일신라시대에 비하여 서예가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음을 보여주는 걸작이다.[4]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 윤다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 곡성 태안사 | A는 B에 있다 | |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 손소 |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 |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 문민 | A는 B가 비문을 새겼다 | |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 조선금석총람 | A는 B에 기록되어 있다 | |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 해동금석원 | A는 B에 기록되어 있다 | |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 한국금석전문 | A는 B에 기록되어 있다 | |
가릉빈가 |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 A는 B에 조각되어 있다 |
시각자료
답사 이후 추가 예정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 ↑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 이지관, "곡성 대안사 광자대사탑비",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343쪽.
- ↑ 이지관, "곡성 대안사 광자대사탑비",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343쪽.
- ↑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04월 21일.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