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덕휴-장성광업소"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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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진흥원, 『민족기록화 경제편』, 정문사문화, 1992년. |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민족기록화 경제편』, 정문사문화, 1992년. | ||
− | * | +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8575 장성탄전]", <html><online style="color:purple"></html>『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ml><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05월 06일. |
=='''주석'''== | =='''주석'''== |
2017년 5월 7일 (일) 22:33 판
장성광업소 | |
작가 | 최덕휴 |
---|---|
제작연도 | 1973년 |
규격 | 300호(197x290.9cm) |
유형 | 광공업 |
분류 | 유화 |
소장처 | 미상 |
설명
공업화에 필수적인 석탄에너지를 생산하는 국내 최대의 장성광업소
설명
작품 소재
장성광업소는 강원도 태백시 장성동에 있는 무연탄 광산으로, 1936년 삼척탄광으로 개광하여 광복 후 미군정과 상공부 직할을 거쳐 1950년에 출범한 대한석탄공사(석공)에 이관되었으며, 탄광의 규모가 커지자 1951년 도계광업소와 장성광업소로 분리되었다.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개발되어 1964~1969년 제1 수갱(竪坑)이 설치된 데 이어 1978~1985년 제2 수갱이 설치됨으로써 생산량 증대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또한 수압식 지주를 이용한 톱 슬라이싱 채탄법((Top slicing method)을 실시하는 등 광산의 기계화를 위한 다양한 투자가 이루어졌다. 탄광촌도 발달하여 화광동·신흥동·문곡동·협심동·평화동·문화동·금천동 등지에 광부들의 사택이 밀집하였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부터 석탄 수요가 급감하여 석탄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게 되자 장성광업소도 규모가 축소되고 탄광촌도 공동화 현상이 나타났다.
개광 이래 2014년까지 총 9167만 793t을 생산하였으며, 2015년에는 47만 3000t을 생산하였다. 2014년을 기준으로 16개 광구(총 면적 48.16㎢, 갱도 길이 329㎞)가 있으며, 이 가운데 7개 광구에서 채굴이 이루어지고 있다. 2개 광구는 채굴이 종료되었고, 나머지 7개 광구는 채굴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무연탄의 총 매장량은 1억 5400만t이며, 이 가운데 기술적·경제적으로 캐낼 수 있는 가채매장량은 2500만t이다.[1]
시각적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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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민족기록화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최덕휴 | 최덕휴-장성광업소 | A는 B를 그렸다 | 1975년 |
최덕휴-장성광업소 | 장성광업소 | A는 B를 소재로 한다 | |
최덕휴-장성광업소 | 석탄산업 | A는 B를 소재로 한다 | |
장성광업소 | 석탄산업합리화정책 | A는 B와 관계가 있다 | |
장성광업소 | 대한석탄공사 | A는 B에 속해있다 | |
도계광업소 | 대한석탄공사 | A는 B에 속해있다 | |
화순광업소 | 대한석탄공사 | A는 B에 속해있다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973년 | 최덕휴가 최덕휴-장성광업소를 제작하였다 |
1979년 | 현대미술관이 최덕휴-장성광업소를 대여하였다 |
1936년 | 장성광업소의 전신인 삼척탄광이 개광하였다 |
1951년 | 삼척탄광이 장성광업소와 도계광업소로 분리되었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7.431732 | 127.020548 | 현대미술관이 최덕휴-장성광업소를 대여하였다 |
37.106560 | 129.005790 | 장성광업소는 강원도 태백시에 위치한다 |
그래프
참고문헌
-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민족기록화 경제편』, 정문사문화, 1992년.
- "장성탄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05월 0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