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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경종실록』 권8, 경종 2년(1722) 5월 12일(병신), [http://sillok.history.go.kr/id/kta_10205012_001 이정식의 공초],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최종확인: 2017년 05월 07일</ref> | <ref>『경종실록』 권8, 경종 2년(1722) 5월 12일(병신), [http://sillok.history.go.kr/id/kta_10205012_001 이정식의 공초],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최종확인: 2017년 05월 07일</ref> | ||
<ref>『경종실록』 권12, 경종 3년(1723) 4월 25일(갑술), [http://sillok.history.go.kr/id/kta_10304025_002 독약을 쓴 김성의 궁인을 찾아내어 안핵하게 하다],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최종확인: 2017년 05월 07일</ref> | <ref>『경종실록』 권12, 경종 3년(1723) 4월 25일(갑술), [http://sillok.history.go.kr/id/kta_10304025_002 독약을 쓴 김성의 궁인을 찾아내어 안핵하게 하다],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최종확인: 2017년 05월 07일</ref> |
2017년 5월 7일 (일) 18:42 판
소훈이씨제문 | |
한자명칭 | 昭訓李氏祭文 |
---|---|
영문명칭 | A Korean translation of funeral oration for Sonhun Yi written by her husband Yeongjo |
작자 | 영조 |
간행시기 | 1721년(경종1) |
소장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청구기호 | 2784(한문), 2786(한글) |
유형 | 고문서 |
크기(세로×가로) | 31.0×170.0cm(한문), 27.9×152.8cm(한글) |
판본 | 목활자본(정리자 한글활자) |
수량 | 1장 |
표기문자 | 한문, 한글 |
목차
정의
1721년(경종1) 11월 19일에 소훈이씨(昭訓李氏)를 위해 왕세제였던 영조가 직접 지은 제문을 한글로 옮긴 것이다.
내용
1721년(경종1) 11월 19일에 소훈이씨(昭訓李氏)를 위해 왕세제였던 영조가 직접 지은 제문을 한글로 옮긴 것이다. 소훈이씨(후일 靖嬪으로 추증)는 영조가 왕세제로 책봉됨에 따라 이보다 한 달 앞선 10월 3일에 소훈의 작위를 받고 후궁이 되었으나, 11월 16일에 세상을 떠났다. 제문은 지난날의 회상과 소훈이씨에 대한 추억, 영조 자신의 비통한 심정 등을 담고 있다. 소훈이씨는 온순한 성품과 법도 있는 행실을 갖고 있었으며, 영조와는 어릴 적부터 얼굴을 익혀왔던 사이로 지기(知己)와도 같은 관계를 유지했다. 이 때문에 영조의 슬픔이 적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제문은 한문본의 독음을 한글로 그대로 옮긴 것이다. 후궁의 제례에는 남성이 참석할 수 없었으므로 상궁 등 여관(女官)이 읽을 수 있도록 한자의 음을 그대로 옮긴 것인데, 한글본은 끊어 읽어야 할 위치에 검은 먹으로 표점이 찍혀 있다.[1]
부연설명
소훈이씨의 죽음과 당시 상황.
소훈이씨와 영조의 관계는 위 내용과 마찬가지로 매우 각별하였다. 그러나 당시 경종과 영조가 간접적으로 정치적 견제를 하는 시기였고, 그들을 따르는 소론과 노론 도 서로를 비방하느라 정신이 없던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소훈이씨의 죽음은 영조에게는 개인적 비극이었으나 정치싸움에 사활을 걸던 소론에게는 이것만큼 좋은 기회는 없었다. 더군다나 당시 노론은 신축환국으로 명분을 잃고 핵심 세력이 정계에서 축출된 상황이었다. 또한 신축환국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소훈이씨의 죽음은 사실 독살이었다.
임인옥사와 소훈이씨의 독살설 그리고 배후를 영조에게 집중하다.
신축환국이 일어난지 5개월 후 목호룡이란 사람이 노론의 어린 자제들인, 정인중, 김용택, 이희지, 심상길, 홍의인, 홍철인, 이기지, 서덕수 등이 경종을 헐뜯고 독살하려 하였으며, 소훈이씨가 노론에게 독살되어, 화가난 영조가 복수를 위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고변을 하였다.[2] 이 여파로 임인옥사가 일어났으며 수많은 노론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여기에 관련된 사람들로 광산김씨 상언에 언급된 이이명, 이익명과 이봉상이 있었다. 당시 소론파 사람들은 소훈이씨의 죽음을 영조의 반란으로 역으려고 하였으나, 경종은 소론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았다. [3]
소론 돌아가는 길을 택하다. 하지만 최종 목표는 영조.
이에 목호룡을 포함한 소론파 사람들은 "소훈이씨의 독살은 경종을 독살하기 위한 예비시험이었고, 본래 본 목적은 궁인을 이용하여 경종을 독살하려 하였다."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런 사실은 목호룡의 고변 사건을 통하여 조선왕조실록에서 추적하다보면 다음과 같은 형태로 인임옥사가 진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목호룡이 고변한 내용 바탕으로 노론 자제들의 역모와 소훈이씨 독살로 영조가 복수 하려하였다는 것, 여기에 거론된 노론 자제들을 문초하여 역모 사실을 받아내려 한 것이다. 두 번째 단계로는 경종이 영조의 역모에 대해서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자, 소훈이씨의 독살은 독약의 성능을 시험하려고 노론쪽에서 벌인 일이며 최종적 목표는 궁인을 시켜서 경종을 독살하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영조의 처조카인 서덕수가 노론 자제들과 역모를 품었다고 하였다. 세 번째 단계로는, 본격적으로 소훈이씨의 독살에 관련된 궁인을 색출하는 일과 환관 장세상을 역어서 노론의 자제들과 궁내 사람들이 호응하여 경종을 암살하려고 했던 일을 밝히려고 한 것이다. [4] [5]
경종 점차 조정을 장악하다.
이런 사태 속에서 대부분의 노론세력들이 유배나 참형당하여 몰락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이득을 받은 당파는 소론이라 할 수 있으나 이것은 표면적이고, 실제 크게 이득을 본 사람은 바로 경종이었다. 경종즉위 초부터 이어져온 정치적 싸움은 남인과 관련된 장희빈 소생이라는 정당성 문제도 있었고, 경종을 지지하는 소론 또한 영조를 지지하는 노론과 비교하면 그 세력이 매우 약했다. 하지만 현재 재위중인 군주라는 무기와 조선시대 사회가 유교주의 질서 속에서 대리청정이 부정적인 여론으로 작용하였다는 것을 경종은 이용하였다. 그 결과 노론 핵심 세력을 정계에서 물러나게 하였고, 영조는 명분상 정치적 입지가 좁아져 무늬뿐인 왕세제 직함을 갖게 된 것이다. [6]
경종의 실패한 꿈과 영조의 즉위
그리고 1년 후에 이루어진 목호룡의 고변은 남아있는 노론세력을 완전히 말살하여 없애는데 큰 이점으로 작용하였으며, 만약 경종이 계속 살아있었으면 최후에는 영조까지 왕세제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 있는 정치적 조건이 완성되고 있었다. 하지만 경종은 병환으로 끝내 사망하였고, 영조가 즉위하면서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 위치는 뒤집혀지게 된다. 영조는 임인옥사때 유배갔거나 살아남은 노론인사들의 신원을 복구하거나 정계로 복귀하였다. 그리고 임인옥사의 역모 사건에 대해서 그때 살아남은 노론 인물들이 임인옥사에 대한 정당성을 뒤집어 버리는데 이때 핵심 논점으로 사용되었던 것이 소훈이씨의 독살설 이었다. 이 이야기를 축약 한다면, 첫 번째 쟁점은 1720년 겨울에 경종이 약을 먹고 토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약을 전달한 사람이 이이명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이명은 청으로 사신을 가서 1721년 봄에 귀국하였다. 그러므로 시기가 맞지 않았다. 두 번째 쟁점은 문초를 자백받은 증언에서 장세상은 11월에 소훈이씨 죽었다고 하였고, 서덕수는 6월에 소훈이씨가 죽었다고 하여 증언의 신빙성이 의심되는 것이었다. 이 밖에 여러가지 사실을 뒤집는 증언들을 민진원이 하여 노론이 정계로 복귀하는데 정당성을 마련 하였다. 그리고 이 작업은 영조가 즉위하고 나서 이 사건의 원흉인 목호룡과 김일경을 처단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7] [8]
소훈이씨의 죽음과 당쟁
소훈이씨가 죽은 1721년부터 영조의 즉위년인 1725년까지, 그녀의 죽음은 독살설로 항상 소론에 의해 거론되어 노론을 잡는 무기로 쓰였으니 그녀의 운명은 매우 불행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그녀의 죽음에 대한 사실은 묻히고 오로지 정치적 쟁점으로 비화되고 있으니, 조선시대 비빈의 삶의 비참함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물론 이후 영조가 즉위하고 나서 소훈이씨의 죽음에 관련된 사람들과 사건의 원흉인 목호령과 김일경 등을 처단하여 그 원한을 어느정도 풀었다고 볼 수 있겠다. 당시 소훈이씨 에게는 영조사이에 낳은 아이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효장세자이다. 하지만 효장세자는 10세의 나이로 1728년 (영조 4)에 요절하였다. 훗날 사도세자가 죽고 적장자인 정조가 남았는데, 효장세자가 장자가 없어, 정조를 양자로 입적하였다.
관련항목
중심 | 연결정보 | 대상 |
---|---|---|
소훈이씨제문 | 작성자 | 영조 |
소훈이씨제문 | 인물 | 소훈이씨 |
소훈이씨제문 | 장소 | 화성행궁 봉수당 |
소훈이씨제문 | 장소 | 창경궁 명정전 |
소훈이씨제문 | 소장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시간정보
중심 | 시간정보명 | 시간값 |
---|---|---|
소훈이씨제문 | 간행년 | 1721년 |
소훈이씨제문 | 간행년 | 경종1년 |
공간정보
중심 | 연결정보 | 공간정보이름 | 경도 | 위도 |
---|---|---|---|---|
소훈이씨제문 | 소장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37.39197 | 127.054387 |
참고문헌
주석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228쪽.
- ↑ 『경종실록』 권6, 경종 2년(1722) 3월 27일(임자), 목호룡이 상변하여 정인중·김용택 등의 역모를 고하다,
『조선왕조실록』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최종확인: 2017년 05월 07일 - ↑ 『경종실록』 권7, 경종 2년(1722) 4월 9일(계해), 영의정 조태구가 목호룡에 의해 무함된 왕세제를 안심시키고 효우할 것을 청하다,
『조선왕조실록』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최종확인: 2017년 05월 07일 - ↑ 『경종실록』 권8, 경종 2년(1722) 5월 12일(병신), 이정식의 공초,
『조선왕조실록』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최종확인: 2017년 05월 07일 - ↑ 『경종실록』 권12, 경종 3년(1723) 4월 25일(갑술), 독약을 쓴 김성의 궁인을 찾아내어 안핵하게 하다,
『조선왕조실록』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최종확인: 2017년 05월 07일 - ↑ 『경종실록』 권6, 경종 2년(1722) 3월 29일(갑인), 왕세제가 조신들의 숙배를 받지 않으려 하다,
『조선왕조실록』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최종확인: 2017년 05월 07일 - ↑ 오세옥, 『승정원일기』 , 영조 즉위년(1724) 9월 11일(신해), 좌목,
『한국고전종합 DB』online , 한국고전번역원. 최종확인: 2017년 05월 07일 - ↑ 『영조실록』 권2, 영조 즉위년(1724) 12월 8일(정축), 김일경과 목호룡을 친국하다,
『조선왕조실록』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최종확인: 2017년 05월 0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