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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한강 북안(北岸)에 있던 나루터. 일명 양화도(楊花渡).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는 한양과 강화, 한양과 삼남(三南) 지방을 잇는 교통의 요지이며 전략 요충지로서 진대(鎭臺)가 있었다. 조선 말기에는 천주교의 박해 현장으로서 1866년 10월 22일 최초의 순교자가 나면서부터 병인교난(丙寅敎難, 병인년에 일어난 천주교 박해) 6년 동안 이곳 양화진에서 참수(斬首)당한 자의 수가 수천 명(천주교 집계로는 약 1만 명)에 이를 정도였다. 이곳이 '절두산'(切頭山)으로 불린 이면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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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한강 북안(北岸)에 있던 나루터. 일명 양화도(楊花渡).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는 한양과 강화, 한양과 삼남(三南) 지방을 잇는 교통의 요지이며 전략 요충지로서 진대(鎭臺)가 있었다. 조선 말기에는 천주교의 박해 현장으로서 1866년 10월 22일 최초의 순교자가 나면서부터 [[병인사옥|병인교난(丙寅敎難, 병인년에 일어난 천주교 박해)]] 6년 동안 이곳 양화진에서 참수(斬首)당한 자의 수가 수천 명(천주교 집계로는 약 1만 명)에 이를 정도였다. 이곳이 '절두산'(切頭山)으로 불린 이면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1966년 천주교에서는 병인교난 100주년을 기념하여 순교자 기념관을 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편, 양화진은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이 상해에서 살해된 후 이곳으로 시신이 옮겨져 효수(梟首)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현재 이곳에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이 조성되어 있다. →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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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천주교에서는 병인교난 100주년을 기념하여 [[순교자 기념관|절두산순교성지기념관]]을 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편, 양화진은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이 상해에서 살해된 후 이곳으로 시신이 옮겨져 효수(梟首)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현재 이곳에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이 조성되어 있다.
  
  

2016년 12월 27일 (화) 10:53 판

틀:공간정보


개관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한강 북안(北岸)에 있던 나루터. 일명 양화도(楊花渡).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는 한양과 강화, 한양과 삼남(三南) 지방을 잇는 교통의 요지이며 전략 요충지로서 진대(鎭臺)가 있었다. 조선 말기에는 천주교의 박해 현장으로서 1866년 10월 22일 최초의 순교자가 나면서부터 병인교난(丙寅敎難, 병인년에 일어난 천주교 박해) 6년 동안 이곳 양화진에서 참수(斬首)당한 자의 수가 수천 명(천주교 집계로는 약 1만 명)에 이를 정도였다. 이곳이 '절두산'(切頭山)으로 불린 이면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1966년 천주교에서는 병인교난 100주년을 기념하여 절두산순교성지기념관을 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편, 양화진은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이 상해에서 살해된 후 이곳으로 시신이 옮겨져 효수(梟首)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현재 이곳에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이 조성되어 있다.


[1]

클래스

  • 사건


지도

기여

출처

  1. [네이버 지식백과 양화진 [楊花津, Yanghwajin] (교회용어사전 : 교파 및 역사, 2013. 9. 16., 생명의말씀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