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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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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24일 (월) 16:18 판

틀:문헌정보2

정의

백운동 외경을 그린 백운도(白雲圖:초의)와 그리고 그 다음장에 백운동의 십이승경(十二勝景)마다 다산과 초의가 시(詩)을 번갈아 지었으며 맨끝장에는 다산초당을 그린 다산도(茶山圖:초의)를 붙이고 그 말미에 윤동이 발문을 써서 붙였다.

내용

400여 년 전 이담로(李聃老, 1627~1701)가 들어와 계곡 옆 바위에 ‘백운동(白雲洞)’이라 새기고 조영(造營)한 원림으로, 자연과 인공이 적절히 배합된 배치와 짜임새 있는 구성을 이루며 우리 전통 원림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별서이다.

백운동이란 ‘월출산에서 흘러 내린 물이 다시 안개가 되어 구름으로 올라가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약사암과 백운암이 있었던 곳으로 전해진다.

이담로의 6대손 이시헌이 백운동에 전해온 각종기록과 시문을 모아 엮은 『백운세수첩(白雲世守帖)』이 있다.

초기의 백운동의 경관과 생활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이시헌의 발문(跋文)이 있다.

"백운산장은 바로 내 6대조이신 처사공께서 지으시고 내 고조이신 수졸암(守拙庵) 이언길 공께서 받아 전하여 지켜온 것이다.

시내와 바위, 안개와 노을의 경치가 호남에서 유명해 당시에 이름난 분과 어진 이들이 수창하며 주고 받은 시문이 많았다.

하지만 세월이 오래다보니 많이 유실되어 남은 것이 얼마 없다.

이제 대나무 상자를 뒤져 얼마간의 시와 글을 얻고 합쳐서 한 권으로 만들어 오래 전하기를 도모하고 「백운도(白雲圖)」를 그려 책머리에 얹는다.

맨 앞에는 처사공이 지으신 「백운기(白雲記)」와 「명설(名說)」의 초고를 싣고 이를 이어 양세에 종유했던 여러 어진 이의 작품을 실었다.

그런 뒤에야 한 구역 경물의 빼어남과 양대에 걸쳐 만들고 지켜온 아름다움이 한 권의 책 가운데 갖추어져 자세히 실리게 되었다.

후손으로서 백운동을 지켜 이 집을 전하는 자라면 귀한 옥처럼 받들어 오로지 감히 실추시킬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 짧은 시와 조각 글 사이에 가락이 맑게 울리고 자획이 예스러워 옛 어진 이의 전형과 풍치를 오히려 방불하게 얻을 수 있다.

손으로 어루만져 아껴 실피노라니 나도 모르게 숙연하여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나므로 개연히 감탄하였다.

훗날 이를 보고 느끼며 법으로 취하는 자가 또한 누가 된다 해도 안 될 것은 없지만 다만 내 후손들이 서로 힘써 이를 지켜 잃지 않아 길이 백운동의 귀한 물건이 되게 하길 바라노라.

지금 임금 원년, 경술년(1850) 10월 상현에 불초 동주(峒主) 이시헌은 삼가 적는다."


현재 남아 있는 『백운세수첩』에는 「백운도」가 없다. 초의선사가 그린 「백운도」는 아닌 듯 하다.

백운동은 다산 정약용이 찾았다. 그리고 그림과 책을 엮어 백운동12경으로 찬양한다.

이 12경은 백운동을 언급하면 빠질 수 없는 경관이 되었다.

박석무의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한길사, 2004. 1. 20 3쇄(1쇄 2003. 10. 15))에 있는 내용이다.

"1812년 9월 12일의 일이다. 같은 고을이지만 꽤 거리가 먼 월출산 남쪽 골짜기 백운동(白雲洞)의 경치를 구경하러 간 것이다.

백운동은 아름다운 월출산의 남쪽 계곡의 원주(原州) 이담로(李聃老 : 1627~1701) 처사가 은거하던 곳으로, 후손 이덕휘(李德輝 : 1749~1828)의 초청으로 다산은 제자인 초의선사와 윤동(尹峒) 등과 함께 찾아가 즐기곤 했다.

초의선사가 「백운도」와 「다산도」를 그렸는데 거기에 모임 사람들이 시를 지어 경치를 묘사했다.

다산은 그 그림에 발문(跋文)을 달아 그 때의 사정을 설명했는데, 이 그림이나 시들은 문집에서 빠져 있어 전해지는 그림과 친필을 보고 그 존재를 알 수 있을 뿐이다.

앞의 「매조도」도 문집에는 없고 그림만이 전해진다.

이 때 이덕휘의 아들인 이시헌(李時憲)은 겨우 열살이었는데 무임에서 수발과 심부름을 하느라 다산을 뵙게 되었고, 뒤에 다산으로 따라가 제자가 되기도 했다.

아름다운 백운 계곡에서 뜻이 맞는 지인들과 함께 시를 짓고 술을 마시던 홍취는 오랜 유배살이의 시름을 달래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이시헌이 "다산으로 따라가"의 다산은 다산초당을 말한다.

다산의 시와 그림이 있는 20쪽 짜리 『백운첩(白雲帖)』은 이덕휘에게 다산이 답례로 준것으로 보인다.

그 후 개인이 소장하고 있던 것이 2001년에 세상에 알려졌다.


백운동그림이 백운동정원을 복원하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발문의 내용은

"가경 임신년(1812) 가을, 내가 다산에서 백운동으로 놀러 갔다가 하룻밤을 자고 돌아왔다.

남은 미련이 오래지나도 가시지 않기에 승려 의순을 시켜서 「백운도」를 그리게 하고 이를 이어 12승사의 시를 지어서 주었다.

「다산도」를 붙여서 우열을 보인다. 9월 22일."


위 「백운도」 아래 「다산도」

우열을 보인다는 것이 '다산'과 '백운동'의 우열을 말하는 것인지 그림 「백운도」와 「다산도」의 우열이지 모르겠다.

그리고 발문만 보아서는 「다산도」를 누가 그렸는지 알 수 없다. 다산이 직접 그렸을까??? 9월 22일은 음력이다.

서시 격인 「백운동 이씨의 유거에 부쳐 제하다(寄題白雲洞李氏幽居)」

백운처사 숨어 사는 유정의 괘 얻으니 임금께 헌책(獻策)함은 뜻에 맞지 않는다네.

십무(十畝)의 솔과 대로 땅의 이익 거두고 반산(半山)의 누각에서 물소리를 베개 삼지.

풍류는 예원진(倪元鎭)만 못함이 전혀 없고 명승은 고중영(顧仲瑛)에게 소문이 다 났따지.

상자 속에 남긴 글이 그대로 남아 있어 훗날에도 금썩 같은 그 맹세를 안 바꾸네.

유정(幽貞)의 괘(卦)란 『주역』의 「이괘(履卦)」에 "이도(履道)가 탄탄하니 유인(幽人)이 곧고도 길하다"에서 따왔다. 유정은 은사(隱士)를 가리킨다.

임금께 헌책(獻策)은 '헌책군문(獻策君門)'으로 임금 앞에 나아가 나를 위한 계책을 올린다는 의미로 벼슬길에 나아가 임금께 글을 올려 자신의 포부를 펼침을 말하는데 이담로는 그런 뜻이 없어 은사로 살아간다는 뜻이다.

백운동의 생활은 10무(畝)넓이의 송황(松篁), 즉 솔숲과 대숲에서 나는 소출로 이루어지고, 일상은 반산(半山) 누각에서 시냇물 소리를 베개 삼아 지내는 유유자적의 삶.

무는 전답의 단위로 1보가 사방 6자, 100보가 1무의 너비다.

반산은 고시 '누각연우반산중(楼閣烟雨半山中)'의 구절.

예원진(倪元鎭)은 원말과 명초의 문인화가 예찬(倪瓚, 1301~1374)이다. 예원진은 그의 자로 그는 성품이 고결하여 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가산을 정리하고 강소성(江蘇省)의 삼묘호(三泖湖) 호반에 소한관(蕭閒館)을 짓고 은거하여 풍류의 삶을 살았다. 다산은 예찬의 삶을 흠모하여 많은 시에서 언급했다.

고중영(顧仲瑛)은 원대 고덕휘(顧德輝, 1310~1369)이며 중영은 그의 자로 집안에 옛날의 법서(法書)와 명화(名畵)와 정이(鼎彛) 같은 골동품 모아 서경 서편에 별장을 짓고 '옥산가처(玉山佳處)'라고 불렸다.

끊임없이 손님을 초대해 사방의 학사들이 모두 그 집에 모여들었다. 풍류와 문아(文雅)로 명망이 높았다.

정이(鼎彛)은 고대의 제기로 거기에 새겨진 글이 한자의 원형에 가깝다고 한다.


다산이 꼽은 백운동12경

제1경은 옥판상기(玉版爽氣), 월출산 옥판봉의 상쾌한 기운. 제2경은 유차성음(油茶成陰), 산다경(山茶徑)의 동백나무 그늘. 제3경은 백매암향(百梅暗香), 백매오(百梅塢)의 매화향기. 제4경은 풍리홍폭(楓裏紅瀑), 단풍나무의 붉은 빛이 어린 옥구슬 폭포. 제5경은 곡수유상(曲水流觴), 마당을 돌아 나가는 물굽이에 띄운 술잔. 제6경은 창벽염주(蒼壁染朱), 창하벽에 붉은 먹으로 쓴 글씨. 제7경은 유강홍린(蕤岡紅麟), 정유강(貞蕤岡)의 용비늘 같은 소나무. 제8경은 화계모란(花階牡丹), 꽃 계단에 심은 모란. 제9경은 십홀선방(十笏禪房), 사랭채인 취미선방(翠微禪房)의 세칸 초가. 제10경은 홍라보장(紅羅步障), 풍단 단풍나무의 붉은 비단 장막. 제11경은 선대봉출(仙臺峰出), 옥판봉이 한눈에 들어오는 정선대(停仙臺). 제12경은 운당천운(篔簹穿雲), 운당원에 우뚝 솟은 왕대나무.


내가 백운동을 들어온 길은 위쪽으로 이담로 부부의 묘가 있는 곳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왔다.

시각자료

사진











영상

  • [MBC] 다성 초의선사를 찾아서(게시일: 2016년 5월)

mbc프라임 불탄일 특집_다성 초의선사를 찾아서 from Youngin Koo on Vimeo.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백운첩 백운동도 A는 B를 포함한다
백운첩 다산도 A는 B를 포함한다
정약용 백운첩 A는 B를 저술하였다
백운첩 백운동 별서정원 A는 B와 관련이 있다 여기서 제작됨.

1812년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812년 백운첩이 백운동 별서정원을 방문하였다
1812년 백운첩이 백운동도를 그렸다
1812년 백운첩이 다산도를 그렸다
1828년 백운첩이 다신전을 저술하였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4.5877226 126.7460196 백련사는 백운첩의 수행지였다
34.7419353 126.6975985 백운동 별서정원은 백운첩의 방문지였다

참고문헌

  • "의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04월 23일.
  • "의순", 『doopedia』online, 두산백과. 최종확인: 2017년 04월 23일.
  • "다도", 『차생활문화대전』online, 네이버 지식백과. 최종확인: 2017년 04월 23일.
  • "초의선사", 『차생활문화대전』online, 네이버 지식백과. 최종확인: 2017년 04월 23일.
  • 정민, 『강진 백운동 별서정원』, 글항아리, 2015.

주석

  1. "의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04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