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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말의 학자인 [[최치원|최치원(崔致遠)]]이 [[낭혜]]를 기념하며 쓴 비가 바로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낭혜화상부도비(郞慧和尙浮屠碑)]]이다. 신라시대 부도비 중에서 가장 큰 것으로 알려진 이 부도비에는 최치원이 지은 5,000여 자의 글씨가 몸체에 새겨져 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48110&cid=42865&categoryId=42865 성주사지]", 최정규,<html><online style="color:purple">『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sup>online</sup></online></html>, 마로니에북스. 최종확인: 2017년 04월 12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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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말의 학자인 [[최치원|최치원(崔致遠)]]이 [[낭혜]]를 기념하며 쓴 비가 바로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낭혜화상부도비(郞慧和尙浮屠碑)]]이다. 신라시대 부도비 중에서 가장 큰 것으로 알려진 이 부도비에는 최치원이 지은 5,000여 자의 글씨가 몸체에 새겨져 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48110&cid=42865&categoryId=42865 성주사지]", 최정규,『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마로니에북스, 2010.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48110&cid=42865&categoryId=42865 성주사터]",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최종확인: 2017년 04월 12일.</ref>  
  
  

2017년 4월 12일 (수) 13:13 판


보령 성주사지
(保寧 聖住寺址)
대표명칭 보령 성주사지
한자 保寧 聖住寺址
주소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2
문화재 지정번호 사적 제307호
문화재 지정일 1984년 8월 13일
관리자 보령시
건립시기 백제시대
창건자 낭혜
경내문화재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보령 성주사지 오층석탑, 보령 성주사지 중앙삼층석탑, 보령 성주사지 서 삼층석탑, 보령 성주사지 동 삼층석탑, 보령 성주사지 석등, 보령 성주사지 석계단, 보령 성주사지 석불입상



정의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절터.[1]


개요

역사

성주사(聖住寺)는 백제 때의 오합사(烏合寺)가 통일신라 때에 개칭되면서 크게 중창된 것이다. 『숭암산 성주사 사적』(崇巖山 聖住寺 事蹟)에 따르면 오합사는 성주사의 전신인데 백제 법왕이 599년에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의 원혼을 위무하려는 뜻에서 세운 절이라고 한다. 따라서 오합사는 백제왕실에서 매우 중히 여긴 절이었던 듯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하는 오합사는 백제 멸망과 관련된 불우한 이야기를 간직한 절이다. 『삼국사기』에는 의자왕 15년 5월에 “흰말이 북악에 있는 오합사에 들어가서 불우(佛宇)를 돌며 울다가 며칠 만에 죽었다”는 기록이 있고 『삼국유사』에도 의자왕 19년에 “오합사에 큰 붉은말이 있어 밤낮 여섯 시에 사원을 돌았다”고 씌어 있다. 이미 1960년대에도 간간이 나오는 백제 기와조각들 때문에 오합사로 추정되어 왔으며 본격적인 발굴에서는 백제 시대 기와조각들이 더욱 많이 출토되었다.

이 절이 본격적으로 규모 있게 자리잡고 지금까지 부르는 이름인 ‘성주사(聖住寺)’가 된 것은 신라 말의 일이다. 『숭암산 성주사 사적』에는 성주사의 규모가 불전 80칸, 행랑 800여 칸, 수각(水閣) 7칸, 고사(庫舍) 50여 칸으로 거의 천여 칸에 이르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창 때의 성주사는 충청남도는 물론 온 나라에서도 손꼽히는 절이었고 신라 하대 구산선문에서 가장 번창하던 일문으로 특히 무염(無染)의 문도는 2천 명에 이르렀으니 수도승들이 공양하느라고 쌀을 씻은 뜨물이 성주천을 따라 십리나 흘러내렸다는 말이 전할 정도다.[2]


신라 말의 학자인 최치원(崔致遠)낭혜를 기념하며 쓴 비가 바로 낭혜화상부도비(郞慧和尙浮屠碑)이다. 신라시대 부도비 중에서 가장 큰 것으로 알려진 이 부도비에는 최치원이 지은 5,000여 자의 글씨가 몸체에 새겨져 있다.[3]


명칭유래

무염국사(無染國師)가 이 절에 있었기에 그를 성인(聖人)으로 보고, 성인이 주석한 절이니 ‘성주사(聖住寺)’라 이름붙였으며 산도 마을도 그에 따라 이름이 바꼈다.[4]

갤러리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828년 홍척이 실상사를 창건했다.
1127~1130년 실상사가 대대적으로 중창되었다.
정유재란기 실상사가 폐허가 되어 이후 약 200년 동안 승려들이 백장암에 기거하였다.
1690년 300여명의 수도승들이 조정에 상소하여 실상사를 다시 중창하였다.
1882년 실상사에 방화가 일어나 사찰 건물들이 불에 타버렸다.
1912년 실상사가 합천 해인사의 말사로 편입되었다.
해방이후 실상사가 김제 금산사의 말사가 되었다.
1996~2005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실상사 창건 당시 가람의 규모와 역사적 변천을 확인하기 위해 발굴조사를 시행했다.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 남원 실상사 A는 B에 있다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 남원 실상사 A는 B에 있다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 남원 실상사 A는 B에 있다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비 남원 실상사 A는 B에 있다
남원 실상사 석등 남원 실상사 A는 B에 있다
남원 실상사 동서삼층석탑 남원 실상사 A는 B에 있다
남원 실상사 철조여래좌상 남원 실상사 A는 B에 있다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 수철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 수철 A는 B를 위한 비이다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 홍척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비 홍척 A는 B를 위한 비이다
홍척 남원 실상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수철 남원 실상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남원 실상사 실상산문 A는 B에 포함된다
실상산문 선종 A는 B에 포함된다
홍척 도의 A는 B와 관련있다


참고문헌

주석

  1. "보령성주사지", 조유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수정일:2012년 12월 12일
  2.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6 - 지리산 자락』, 돌배게, 2009. 온라인 참조: "성주사터",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최종확인: 2017년 04월 12일.
  3. "성주사지", 최정규,『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마로니에북스, 2010. 온라인 참조: "성주사터",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최종확인: 2017년 04월 12일.
  4. 최정규,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마로니에북스, 2010. 온라인 참조: "성주사터",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최종확인: 2017년 04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