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 쌍봉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잔글 |
|||
35번째 줄: | 35번째 줄: | ||
===지리=== | ===지리=== | ||
− | 쌍봉사의 주산은 계당산(桂棠山)으로 이곳의 터는 배가 떠가는 형국을 하고 있다. 그래서 돛대를 세워야 겠다는 생각으로 대웅전을 삼층 목조건물로 높이 세워 돛대를 걸었다고 한다. 또한 배에 구멍을 뚫으면 배가 갈 수 없으므로 터 안에 샘을 파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주산이 사자가 누워있는 상이라 사자의 입에 해당하는 곳이 사자의 침이 마르지 않을 것이므로 사자의 혀를 찾아가 땅을 파니 맑은 물이 솟아났다고 한다. | + | 쌍봉사의 주산은 계당산(桂棠山)으로 이곳의 터는 배가 떠가는 형국을 하고 있다. 그래서 돛대를 세워야 겠다는 생각으로 대웅전을 삼층 목조건물로 높이 세워 돛대를 걸었다고 한다. 또한 배에 구멍을 뚫으면 배가 갈 수 없으므로 터 안에 샘을 파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주산이 사자가 누워있는 상이라 사자의 입에 해당하는 곳이 사자의 침이 마르지 않을 것이므로 사자의 혀를 찾아가 땅을 파니 맑은 물이 솟아났다고 한다.<ref>"[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_id=CP_THE012&cp_code=cp0422&index_id=cp04220060&content_id=cp042200600001&search_left_menu=2 쌍봉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의 풍수지리,『문화콘텐츠닷컴』<sup>online</sup></online></html>, 한국콘텐츠진흥원. 최종확인: 2017년 4월 12일</ref> |
+ | |||
2017년 4월 12일 (수) 09:39 판
화순 쌍봉사 (和順 雙峰寺) |
|
대표명칭 | 화순 쌍봉사 |
---|---|
한자 | 和順 雙峰寺 |
주소 |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쌍산의로 459 |
교구정보 | 대한불교조계종 |
창건자 | 도윤 |
경내문화재 |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비, 화순 쌍봉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
|
정의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의 사찰로[1]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이다. [2]
개요
역사
일반적으로 쌍봉사는 철감선사 도윤(道允),이 창건했다고 알려져있다. 하지만 그 이전 시기의 기록인 동리산 태안사에 있는 혜철(慧澈)의 부도비에는 혜철인 839년에 당나라에서 돌아와 쌍봉사에서 하안거를 지냈다는 내용이 씌어있다. 이렇게 볼 때, 쌍봉사는 적어도 839년 이전부터 있었고 다만 도윤이 주석(駐錫)하던 기간에 사세가 크게 일어났으리라 추측해 볼 수 있다. [3] 쌍봉사의 사찰명이 쌍봉인 이유는 도윤의 도호(道號)가 쌍봉이었기 때문이다.
847년(문성왕 9)에 귀국한 도윤은 이 절에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의 기초를 마련하였고, 이곳에서 그의 종풍(宗風)을 이어받은 징효(澄曉)가 영월의 흥녕사(興寧寺)에서 사자산문을 개산(開山)하게 되었다. [4] 고려 시대에도 쌍봉사의 사세는 계속되어 1081년(문종 35)에 혜소국사(慧昭國師)가 중창하였는데, 그 문하에서 유명한 승려가 다수 배출되었다. 고려 후기 쌍봉사의 위상이 크게 높아진 것은 최씨무인 집권기이다. |최우(崔瑀)는 1219년에 자신의 아들 최만전(崔萬全)과 최만종(崔萬宗)을 수선사(修禪社)의 제2세 혜심(慧諶)에게 보내 출가시켰는데, 최만전이 쌍봉사에 거처하면서 활동하여 쌍봉사의 사세는 융성하게 되었다. [5]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절 아랫마을 쌍봉리 양씨 가문의 세력에 눌려 조광조와 양팽손 등을 모신 죽수서원의 예속 사찰로 전락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절이 불타 버린 후 1628년(인조 6)에 중건했고 1667년(현종 8)과 1724년(경종 4)에 중창했다. [6] 하지만 일제강점기인 1911년에는 사찰령으로 인해 쌍봉사가 대흥사의 말사로 편재되어 사격을 잃기도 했고, 6.25전쟁 때는 사찰 건물 대부분이 소실되어 대웅전과 극락전만 남기도 했다.[7]
지리
쌍봉사의 주산은 계당산(桂棠山)으로 이곳의 터는 배가 떠가는 형국을 하고 있다. 그래서 돛대를 세워야 겠다는 생각으로 대웅전을 삼층 목조건물로 높이 세워 돛대를 걸었다고 한다. 또한 배에 구멍을 뚫으면 배가 갈 수 없으므로 터 안에 샘을 파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주산이 사자가 누워있는 상이라 사자의 입에 해당하는 곳이 사자의 침이 마르지 않을 것이므로 사자의 혀를 찾아가 땅을 파니 맑은 물이 솟아났다고 한다.[8]
갤러리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839년 | 혜철이 화순 쌍봉사에서 하안거를 지냈다 |
1081년 | 혜소국사가 화순 쌍봉사를 중창하였다 |
1219년 | 최우가 자신의 아들 최만전과 최만종을 쌍봉사의 혜심에게 보내 출가시켰다 |
1628년 | 임진왜란 후 불타버린 쌍봉사를 중창했다 |
1911년 | 사찰령으로 인해 쌍봉사가 대흥사의 말사로 편입되었다 |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 | 화순 쌍봉사 | A는 B에 있다 | |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비 | 화순 쌍봉사 | A는 B에 있다 | |
화순 쌍봉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 화순 쌍봉사 | A는 B에 있다 | |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 | 도윤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비 | 도윤 |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 |
혜철 | 화순 쌍봉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
도윤 | 화순 쌍봉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
혜심 | 화순 쌍봉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
화순 쌍봉사 | 사자선문 | A는 B에 포함된다 | |
사자선문 | 구산선문 | A는 B에 포함된다 | |
화순 쌍봉사 | 죽수서원 | A는 B와 관련있다 | |
화순 쌍봉사 | 대흥사 | A는 B와 관련있다 | |
화순 쌍봉사 | 송광사 | A는 B에 포함된다 |
참고문헌
주석
- ↑ "쌍봉사", 이영숙,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4월 11일 - ↑ "쌍봉사",
『두산백과』online , 최종확인: 2017년 4월 11일 - ↑ 한국문화유산답사회,『답사여행 길잡이5 - 전남』, 2010. 온라인 참조: "쌍봉사",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최종확인: 2017년 04월 12일. - ↑ "쌍봉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4월 12일 - ↑ "쌍봉사", 이영숙,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4월 12일 - ↑ 한국문화유산답사회,『답사여행 길잡이5 - 전남』, 2010. 온라인 참조: "쌍봉사",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최종확인: 2017년 04월 12일. - ↑ "쌍봉사", 이영숙,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4월 12일 - ↑ "쌍봉사",
한국의 풍수지리,『문화콘텐츠닷컴』online , 한국콘텐츠진흥원. 최종확인: 2017년 4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