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인미 배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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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인미는 고산 윤선도의 아들로 윤선도가 젊은 시절을 보내던 서울 명례방에서 1607년(선조 40)에 태어났으나 1632년(인조 10) 윤선도를 따라 해남으로 낙향하였다. 이후 1662년 문과에 합격하고 별좌 벼슬을 지냈다. 윤인미의 거주지는 윤선도의 행적과 거의 일치하고 있는데 1630년(인조 8) 시권까지 거주지가 서울로 되어 있고, 1633년이후 3건의 시권은 모두 해남으로 되어 있다. 윤선도가 1632년에 해남으로 내려갔으므로, 윤인미 역시 같은 시기에 아버지를 따라가서 고향에서 지낸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해남 윤씨의 토지 매입을 집중적으로 진행한 시기가 윤인미 때이므로 낙향 후 해남 윤씨 일가의 토지 확장을 주관한 것으로 추정된다.<ref>문숙자, 「고문서로 본 조선후기 양반가의 가사(家舍) 경영과 주거(住居)」, 『정신문화연구』 겨울 제 39권, 한국학중앙연구원, 2016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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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지는 한자로는 ‘패지(牌旨)’ 또는 ‘패자(牌子, 牌字)’라는 용어가 고르게 사용되었고, 한글로는 ‘배지’, ‘배자’ 등으로 지칭되었다. 주로 전답 등을 매매할 때 상전이 자신의 노비에게 해당 매매 행위를 대행시키면서 작성해 준 사례가 널리 알려져 있다. 즉, 패지는 조선시대에 사용된 문서의 일종으로서 전답 등을 매매할 때 쓰는 위임장이라고 볼 수 있다. 각종 매매에 사용된 패지에는 일반적으로 매매를 위임받은 하인의 이름, 매매 사유, 매매 물건, 해당 물건을 적절한 가격에 팔아오라는 내용 등을 구체적으로 적고, 마지막에 문서의 작성 날짜와 문서 발급자의 성명 및 서명을 기재하였다. <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9809 패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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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지사족의향촌지배-재지사옥이 일종의 송사와 관련된 역할을 함을 보여줌, 배지와 노예의 토지계약 얘기 씀
 
재지사족의향촌지배-재지사옥이 일종의 송사와 관련된 역할을 함을 보여줌, 배지와 노예의 토지계약 얘기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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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주석==
 
==주석==

2017년 4월 10일 (월) 17:04 판

윤인미 배지
한글팀 윤인미 배지.jpg
영문명칭 A document issued when Yun Inmi was entrusting the process of land trade to the servant Aesun
작자 윤인미
작성시기 1650년(효종1)
간행시기 조선후기
소장처 장서각(해남윤씨 녹우당 제공)
유형 고문서
크기(세로×가로) 19.8×31㎝
판본 필사
수량 1章
표기문자 한글, 한자



개요

1650년효종1 윤11월 초3일에 상전 윤인미노 이슌에게 전답의 매매를 위임하며 발급한 배지牌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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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0년효종1 윤11월 초3일에 상전 윤인미尹仁美노奴 이슌愛順에게 전답의 매매를 위임하며 발급한 배지牌旨이다. 미량봉권서방과 밭을 바꾼 후에 그 밭의 소유권에 대하여 다른 말을 했는데, 이에 윤인미가 미량봉을 괘씸하게 여기고 노 이순 에게 밭의 소유권을 명확하게 할 것을 명하였다. 즉, 미량봉이 권서방에게 상환相換하여 파는 내용으로 명문明文을 작성한 후에 윤인미에게 보내라고 하였다. 또한 윤인미는 하루라도 명을 어겨서 지체하면 미량봉을 잡아와서 무거운 벌을 내릴 것이니 미량봉에게 잘 전달할 것을 당부하였다. 문서의 말미에 있는 윤인미의 서압署押과 ‘十一閏初三日’을 통해 1650년 윤11월 초3일에 윤인미가 발급한 사실을 알 수 있다.[1]

부연설명

윤인미는 고산 윤선도의 아들로 윤선도가 젊은 시절을 보내던 서울 명례방에서 1607년(선조 40)에 태어났으나 1632년(인조 10) 윤선도를 따라 해남으로 낙향하였다. 이후 1662년 문과에 합격하고 별좌 벼슬을 지냈다. 윤인미의 거주지는 윤선도의 행적과 거의 일치하고 있는데 1630년(인조 8) 시권까지 거주지가 서울로 되어 있고, 1633년이후 3건의 시권은 모두 해남으로 되어 있다. 윤선도가 1632년에 해남으로 내려갔으므로, 윤인미 역시 같은 시기에 아버지를 따라가서 고향에서 지낸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해남 윤씨의 토지 매입을 집중적으로 진행한 시기가 윤인미 때이므로 낙향 후 해남 윤씨 일가의 토지 확장을 주관한 것으로 추정된다.[2]
배지는 한자로는 ‘패지(牌旨)’ 또는 ‘패자(牌子, 牌字)’라는 용어가 고르게 사용되었고, 한글로는 ‘배지’, ‘배자’ 등으로 지칭되었다. 주로 전답 등을 매매할 때 상전이 자신의 노비에게 해당 매매 행위를 대행시키면서 작성해 준 사례가 널리 알려져 있다. 즉, 패지는 조선시대에 사용된 문서의 일종으로서 전답 등을 매매할 때 쓰는 위임장이라고 볼 수 있다. 각종 매매에 사용된 패지에는 일반적으로 매매를 위임받은 하인의 이름, 매매 사유, 매매 물건, 해당 물건을 적절한 가격에 팔아오라는 내용 등을 구체적으로 적고, 마지막에 문서의 작성 날짜와 문서 발급자의 성명 및 서명을 기재하였다. [3]

시각자료

관련 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윤인미 윤인미 배지 A는 B를 저술했다
노 이슌 윤인미 배지 A는 B와 관련이 있다
윤인미 노 이순 A는 B와 관련이 있다
권 서방 윤인미 배지 A는 B에 언급된다
미량봉 윤인미 배지 A는 B에 언급된다
미량봉 권 서방 A는 B와 관련이 있다

시간정보

시간 내용
1607년 윤인미가 서울 명례방에서 태어났다.
1632년 윤인미가 윤선도를 따라 해남으로 낙향했다.
1650년 윤인미가 윤인미 배지를 작성하였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7.39197 127.054387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윤인미 배지가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주석

  1.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121쪽.
  2. 문숙자, 「고문서로 본 조선후기 양반가의 가사(家舍) 경영과 주거(住居)」, 『정신문화연구』 겨울 제 39권, 한국학중앙연구원, 2016
  3. '패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