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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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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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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文書集成3,海南尹氏編正書本』, 한국정신문화연구원,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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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복, 『고문서와 양반사회』,일조각,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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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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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학술회의, 「고문서를 통해본 도서지역의 사회와 문화」, 한국학술진흥재단, 2007
  
 
==주석==
 
==주석==

2017년 4월 10일 (월) 14:36 판

이사원 등 고목
한글팀 이사원등 고목.jpg
영문명칭 A report by Ni Sawon, Choi Cheonson and Bak Mongchi to the Yun family of Haenam as they were offering seafood
작자 나사원, 최쳔손, 박몽치 등
작성시기 계축년?
간행시기 ?
소장처 장서각(해남윤씨 녹우당 제공)
유형 고문서
크기(세로×가로) 32.8×38.1㎝
판본 필사
수량 1章
표기문자 한글, 한자



개요

계축년 7월 10일에 니 원·최쳔손·박몽치 등이 해산물 등을 상납上納하면서 해남윤씨 댁에 올린 고목告目이다.

텍스트

계축년 7월 10일에 니 원·최쳔손·박몽치 등이 해산물 등을 상납上納하면서 해남윤씨 댁에 올린 고목告目이다. 니 원·최쳔손·박몽치 등은 먼저 상전인 서방님의 안부를 물었으며, 올해도 역시 섬이나 육지나 모두 생계의 상황이 어렵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이어서 미역[甘藿]은 정해진 수량과 작년에 상납하지 못한 2접을 상납하며, 소각 5속束, 어유魚油 1말 2되 5홉과 작년에 미납未納한 1되, 전복 1접 5곶과 작년에 미납한 1곶을 모두 상납한다고 하였다. 문서의 말미에는 미납하여 추후에 상납한 사어유沙魚油·미역·전복·문희포聞喜逋 등이 기재되어 있다.[1]

부연설명

해남윤씨가는 서남해 지역의 여러 섬에 도장을 관리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도서진출은 맹골도까지 포함하는 상당히 넓은 지역을 아우르고 있다. 사대부가에서 도서 지역까지 경영을 확대하는 이유는 일차적으로 이곳에서 나는 미역을 비롯한 각종 해산물 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먼 섬에까지 그 경영의 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것은 그만큼 섬으로부터 産出되는 경제적 이득이 컸기 때문이었다. 해남윤씨가는 도서 지역 경영 과정에서 미역, 魚油, 전복과 같은 해채류에 대해 특산물의 형태로 상납을 받아 왔으며, 특히 미역은 곽전(藿田:바닷가에 미역을 따는 곳)이 매매의 대상이 될 만큼 큰 이익을 가져다주기도 하여 섬 경영의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이러한 이익 때문에 서남해 도서지역은 세가 사대부 등이 궁방, 아문과 함께 어전, 염분, 섬 등의 점유자로 자주 등장하였다. 양반가에서 어장이니 염분이니 하는 것을 사점하는 형태는 많은 제약을 받았지만 국가의 지배력이 미치기 어려운 점 등에 대해서는 사유지의 형태로 지배하고 있었다. [2]
해남 윤씨가는 18세기경까지 다도해의 보길도, 노아도, 소안도, 평일도 등의 땅에서 해로를 통해 도지(賭地:곡식이나 돈 따위를 대가로 주고 땅을 빌림, 혹은 땅을 빌려주고 받는 대가)를 받아왔다. 섬에서 생산되는 해채류 중에서는 미역과 같은 특산물 제공이 가장 컸다. 조선후기 서남해 지역에서는 토산물로 소금․목화․해곽(미역)․목재 등이 주로 생산되고 있었다. 특산물은 주로 자가소비용으로 사용되었지만 동족의 양반들에게 선물 명목으로 나누어 주기도 하였으며 남은 것은 상품용으로 판매하기도 하였다. 이 자료는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癸丑年이 어느 해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니원,최쳔손,박몽치 등은 ‘島民’이라 칭하여 섬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점은 밝히고 있으나 구체적으로 어디에 사는 어떤 신분의 사람들인지는 밝히지 않고 있다. 이 고목문기는 상납물종과 수량이 나와 있는데 “미역(甘藿)은 정해진 수량대로 상납하며, 同 작년도 미납 條 2접(貼), 소각 5속(束), 魚油 1말 2되 5홉, 同작년도 미납 조 1되, 전복 1접 5곶(串), 同작년도 미납 조 1곶 등도 모두 상납한다.”고 되어있다. 이와 같이 섬에서 해마다 납부하는 물품은 보리,미역,건어,전복,어유 등으로 1905년 4월부터 맹골도의 도세 거부가 시작되자 해남윤씨가에서는 여러번 官에 청원서를 올려 해결하려고 하여 도세를 받아낸 것으로 근대기까지도 맹골도에서 공납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해남윤씨가는 이처럼 도서경영의 과정에서 이들 섬으로부터 미역,어유,전복과 같은 해채류에 대해 특산물의 형태로 상납받아 왔으며, 이는 당시 서남해 도서가 재지사족들에 의해 궁방․아문과 함께 어전, 염분, 섬들의 사점자로 등장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3]

시각자료

관련 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니사원 이사원 등 고목 A는 B와 관련이 있다
최쳔순 이사원 등 고목 A는 B와 관련이 있다
박뭉치 이사원 등 고목 A는 B와 관련이 있다
해남윤씨 이사원 등 고목 A는 B와 관련이 있다
니사원 최천순 A는 B와 교유했다
니사원 박뭉치 A는 B와 교유했다
최쳔순 박뭉치 A는 B와 교유했다

시간정보

시간 내용
계축년 이사원, 박뭉치, 최젼순 등이 이사원 등 고목을 지었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7.39197 127.05438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이사원 등 고목이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 단행본
    1. 『古文書集成3,海南尹氏編正書本』, 한국정신문화연구원,1986
    2. 정구복, 『고문서와 양반사회』,일조각, 2002
  • 논문
    1. 공동학술회의, 「고문서를 통해본 도서지역의 사회와 문화」, 한국학술진흥재단, 2007

주석

  1.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122쪽.
  2. 정윤섭, 「조선후기 海南尹氏家의 海堰田개발과 島嶼·沿海 經營」, 목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3. 정윤섭, 「조선후기 海南尹氏家의 海堰田개발과 島嶼·沿海 經營」, 목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