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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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학을 운영하던 당시 개경에는 사학십이도라는 이름난 사숙(私塾)이 있었는데, 최충의 구재학당(九齋學堂)은 그 가운데서도 성황을 이루어 과거에 급제하는 생도가 많았다. 문종 초는 거란 침입의 전화가 아문 뒤, 세상은 태평해졌지만 아직 국학(國學)은 유명무실이고, 향학도 갖추어지지 못한 때였으므로 교육의 새바람이 점차 요구되던 시기였다. 특히, 문반 현직자를 우대하면서 그들 중심의 국가질서가 정착되고 있었으며, 또 왕실·외척이 세력을 부리게 됨에 따라 이들과 대결하려면 과거에 급제해야만 하였다. 최충이 사숙을 열자, 문전성시를 이룬 것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 연유한 것이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7700 최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서비스에서 인용. 2017년 3월 31일 확인</ref>
 
그가 사학을 운영하던 당시 개경에는 사학십이도라는 이름난 사숙(私塾)이 있었는데, 최충의 구재학당(九齋學堂)은 그 가운데서도 성황을 이루어 과거에 급제하는 생도가 많았다. 문종 초는 거란 침입의 전화가 아문 뒤, 세상은 태평해졌지만 아직 국학(國學)은 유명무실이고, 향학도 갖추어지지 못한 때였으므로 교육의 새바람이 점차 요구되던 시기였다. 특히, 문반 현직자를 우대하면서 그들 중심의 국가질서가 정착되고 있었으며, 또 왕실·외척이 세력을 부리게 됨에 따라 이들과 대결하려면 과거에 급제해야만 하였다. 최충이 사숙을 열자, 문전성시를 이룬 것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 연유한 것이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7700 최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서비스에서 인용. 2017년 3월 31일 확인</ref>
 
최충의 9재학당에서 배운 학도들의 명성은 국학인 국자감을 능가하여 여기서 공부한 학도들은 최충의 벼슬 이름을 따 흔히 ‘시중 최공도’라 일컬어졌으며, 그가 죽은 후에는 시호를 따라 ‘문헌공도’라고 불렸다. <br><br>
 
최충의 9재학당에서 배운 학도들의 명성은 국학인 국자감을 능가하여 여기서 공부한 학도들은 최충의 벼슬 이름을 따 흔히 ‘시중 최공도’라 일컬어졌으며, 그가 죽은 후에는 시호를 따라 ‘문헌공도’라고 불렸다. <b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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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중기를 대표하는 역사적인 인물임에도 그의 시문은 별로 남아있는 것이 없다. 무신란 이후 문신이 많이 살해되고 그들의 문집도 함께 없어졌기 때문이다. 지금 볼 수 있는 것은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原州 居頓寺址 圓空國師塔碑)|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의 비문과 직산 홍경사의 갈기(碣記)가 남아 있다.
 
고려 중기를 대표하는 역사적인 인물임에도 그의 시문은 별로 남아있는 것이 없다. 무신란 이후 문신이 많이 살해되고 그들의 문집도 함께 없어졌기 때문이다. 지금 볼 수 있는 것은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原州 居頓寺址 圓空國師塔碑)|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의 비문과 직산 홍경사의 갈기(碣記)가 남아 있다.
 
<br>《고려사》열전에는 “동방학교의 일어남이 충에서 비롯해 그를 해동공자(海東孔子)라고 일컬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br>《고려사》열전에는 “동방학교의 일어남이 충에서 비롯해 그를 해동공자(海東孔子)라고 일컬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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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31일 (금) 11:20 판


틀:인물정보상세


정의

고려전기의 문신이자 유학자.


내용

개요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해동공자로 불렸다. 한국 사학교육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구재학당을 설립했다.

관료 생활

1005년(목종 8) 스무살의 나이로 문과 장원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고 1011년(현종 2)에는 우습유(右拾遺)가 되었다.
1013년(현종 4) 거란의 침입으로 소실된 역대 문적을 재편수하는 작업을 담당하였고, 태조에서 목종에 이르는 《칠대실록(七代實錄)》편찬에 참여했다. [1]
1037년(정종 3) 《현종실록(玄宗實錄)》편찬에 참여했으며, 1047년에는 서북로병마판사(西北路兵馬判事)로 변경에 나가 진을 설하는 등 국방에 힘썼다.
1047년(문종 1) 문종이 즉위하자 문하시중이 되어 법률관들에게 율령을 가르치고 고려 형법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050년(문종 3) 서북면도병마사(西北面都兵馬使)로서 농번기에 공역 금지와 재정낭비를 방지하기 위한 상소를 올렸고 동여진에 대한 대비책을 건의하여 국방을 강화하였다.
1053년(문종 7) 나이가 많은 것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자 이를 만류하는 조서와 함께 추충찬도협모동덕치리공신(推忠贊道恊謀同德治理功臣)의 호와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겸 문하시중(開府儀同三司守太師兼門下侍中)이라는 벼슬과 상주국(上柱國)이라는 훈작을 받았다.[2]

교육과 인재양성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송악산 아래에 사학을 열어 인재를 양성했다. 그는 공부하는 내용에 따라 방의 이름을 악성(樂聖), 대중(大中), 성명(誠明), 경업(敬業), 조도(造道), 율성(率性), 진덕(進德), 대화(大和), 대빙(待聘)로 지어 구재(九齋)로 나누고, 과거시험 합격을 위한 구경삼사(九經三史)를 교육시켰다. 9경 3사가 어떤 과목이었는가 하는 부분에서는 학계에 논란이 있긴 하지만, 대개 9경은 주역∙서경∙시경∙의례∙주례∙예기∙춘추좌씨전∙공양전, 3사는 사기∙한서∙후한서인 것으로 보고 있다.[3]

그가 사학을 운영하던 당시 개경에는 사학십이도라는 이름난 사숙(私塾)이 있었는데, 최충의 구재학당(九齋學堂)은 그 가운데서도 성황을 이루어 과거에 급제하는 생도가 많았다. 문종 초는 거란 침입의 전화가 아문 뒤, 세상은 태평해졌지만 아직 국학(國學)은 유명무실이고, 향학도 갖추어지지 못한 때였으므로 교육의 새바람이 점차 요구되던 시기였다. 특히, 문반 현직자를 우대하면서 그들 중심의 국가질서가 정착되고 있었으며, 또 왕실·외척이 세력을 부리게 됨에 따라 이들과 대결하려면 과거에 급제해야만 하였다. 최충이 사숙을 열자, 문전성시를 이룬 것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 연유한 것이다.[4] 최충의 9재학당에서 배운 학도들의 명성은 국학인 국자감을 능가하여 여기서 공부한 학도들은 최충의 벼슬 이름을 따 흔히 ‘시중 최공도’라 일컬어졌으며, 그가 죽은 후에는 시호를 따라 ‘문헌공도’라고 불렸다.

사후

고려 중기를 대표하는 역사적인 인물임에도 그의 시문은 별로 남아있는 것이 없다. 무신란 이후 문신이 많이 살해되고 그들의 문집도 함께 없어졌기 때문이다. 지금 볼 수 있는 것은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의 비문과 직산 홍경사의 갈기(碣記)가 남아 있다.
《고려사》열전에는 “동방학교의 일어남이 충에서 비롯해 그를 해동공자(海東孔子)라고 일컬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평가'

관련항목

참고문헌

사료

단행본

논문

웹자원

사료 및 자료

사전류

주석

  1. "최충" 『두산백과』, 네이버지식백과에서 인용. 2017년 3월 31일 확인
  2. "최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서비스에서 인용. 2017년 3월 31일 확인
  3. "최충" 정성희,『인물한국사』, 네이버캐스트에서 인용. 2017년 3월 31일 확인
  4. "최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서비스에서 인용. 2017년 3월 31일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