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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7월 24일 (목) 16:09 판
서규(徐揆, ?~1127년)는 북송(北宋) 말기의 충신으로, 자는 **도원(道原)**(혹은 도원(道源))이며, 저장성(浙江省) 장산시(江山市) 출신이다. 휘종(徽宗)과 흠종(欽宗) 시기에 **태학박사(太學博士)**를 지냈으며, "정강의 변(靖康之變)" 당시 금나라 군대에 맞서다 순절한 인물로 유명하다.
주요 생애와 업적: 1. **금나라에 대한 강경 반대** 1126년(정강 원년), 금군이 개봉(汴京, 현 카이펑)을 포위하자 송 조정은 태원(太原), 중산(中山), 하간(河間) 3진을 할양하며 강화를 추진했다. 서규는 이에 반대하며 상소를 올려 "땅을 떼어주면 나라가 위태로워진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 **금군 장수에게 항의하다 순국** 1127년, 금군이 개봉을 함락하고 휘종·흠종을 포로로 잡았다(정강의 치욕). 서규는 태학생들과 백성들을 이끌고 저항하다가, 직접 금군 사령관 **완안종한(完顏宗翰, 별칭 '니한')**을 찾아가 "약속을 어기고 황제를 붙잡은 것은 불의하다"며 항의했다. 이에 분노한 완안종한은 그를 처형했다.
3. **후대의 평가** 서규는 죽음 앞에서도 굴하지 않았으며, 남송(南宋) 시대에 **충렬(忠烈)** 또는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받았다. 《송사(宋史)·충의열전》과 《정강기문(靖康紀聞)》 등에 기록되었으며, 육유(陸遊)의 《노학암필기(老學庵筆記)》에서도 언급된다.
역사적 의의: 서규는 권력자나 명장은 아니었지만, 금나라에 맞선 강직한 태도로 남송 이후 유학자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특히 그의 행적은 "절개를 지키다 죽음으로殉國한 선비"의 상징으로 회자된다.
더 자세한 내용은 《송사》나 저장성 지방지 《저우부지(衢州府志)》를 참고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