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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서규지(徐逵之) (? ~ 415년) 동진의 관료로 동해군(東海郡) 담현(郯縣) 출신이다. 유송의 개국공신 서선지의 조카로 서담지의 아버지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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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규지는 파총(破塚)에서 노종지의 아들인 노궤와 교전했으나 도리어 패배하여 왕윤지, 심연자와 함께 전사하였다. 유유는 서규지가 전사했다는 소식에 분노하여 자신이 직접 출병하려고 했으나 사회가 간언했기에 결국 그만두었다. 유유는 독호 정오(丁旿)에게 서규지의 시신을 수습하도록 명했으며, 사마휴지가 토벌된 뒤 서규지는 중서시랑(中書侍郞)으로 추증되었다.
 
서규지는 파총(破塚)에서 노종지의 아들인 노궤와 교전했으나 도리어 패배하여 왕윤지, 심연자와 함께 전사하였다. 유유는 서규지가 전사했다는 소식에 분노하여 자신이 직접 출병하려고 했으나 사회가 간언했기에 결국 그만두었다. 유유는 독호 정오(丁旿)에게 서규지의 시신을 수습하도록 명했으며, 사마휴지가 토벌된 뒤 서규지는 중서시랑(中書侍郞)으로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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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규지(徐逵之, ? ~ 424년)는 중국 남북조 시대 송(宋)의 개국 황제 유유(劉裕)의 사위로, 팽성(彭城, 현 장쉬성 쉬저우) 출신이다. 동진(東晉) 말기의 관료 서광(徐廣)의 조카이며, 유유의 장녀 유흥제(劉興弟, 회계선장공주)와 결혼해 아들 서담지(徐湛之)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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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와 주요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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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치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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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규지는 동진 말기부터 송 초기까지 활동한 인물로, 유유가 권력을 장악하고 송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핵심 세력 중 하나였다. 유유의 사위로서 높은 지위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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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북벌 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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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년(의희 11년), 유유가 후진(後秦)을 정벌할 때 서규지는 **서중랑장**(西中郎將)과 **양남진이주자사**(梁南秦二州刺史)로 임명되었으나, 부임 전에 군사 작전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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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년(의희 12년), 유유가 후진을 멸망시키는 전쟁에서 서규지는 왕진악(王鎮惡), 단도제(檀道濟) 등과 함께 출정했으나, 후진의 노양(魯陽) 수비대와의 전투에서 패배해 잠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유유의 배려로 복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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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사와 추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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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7년(의희 13년), 동관(潼關) 전투에서 전사했다. 유유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중서시랑**(中書侍郎)을 추증했고, 그의 아들 서담지를 후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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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가문의 영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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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들 서담지는 송 문제(宋文帝)와 효무제(孝武帝) 시기에 상서복야(尚書僕射), 단양윤(丹陽尹) 등을 지냈으나, 후에 황실의 권력 다툼에 휘말려 처형당했다(440년). 서씨 가문은 송 황실과의 혼인으로 권세를 누렸지만,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부침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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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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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규지 본인에 대한 기록은 상대적으로 적으며, 그의 위상은 주로 유유와의 인척 관계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조기 사망으로 인해 송 건국 후의 정치적 역할은 제한적이었으나, 아들 서담지를 통해 송 초기 외척과 귀족 세력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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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자세한 내용은 《송서》(宋書)나 《남사》(南史) 등의 정사(正史)를 참고할 수 있다.

2025년 7월 24일 (목) 16:03 판

서규지(徐逵之)

(? ~ 415년)

동진의 관료로 동해군(東海郡) 담현(郯縣) 출신이다. 유송의 개국공신 서선지의 조카로 서담지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서규지 본인의 열전은 없으나 송서나 남사에서는 아들인 서담지의 열전에서 서규지의 행적을 소개하고 있다.

서규지의 아버지 서흠지(徐欽之)는 비서감(秘書監)을 지냈다. 서규지는 유유의 장녀 회계공주(會稽公主)에게 장가를 들었으며, 진위장군(振威將軍), 팽성패2군태수를 지냈다.

415년, 유유가 자신에게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사마휴지를 토벌하려고 했는데, 자신의 아들들이 어렸기 때문에 대신 사위인 서규지에게 중임을 맡기고자 그에게 공을 세우게 하려고 했다. 유유는 서규지를 선봉으로 삼고 정예 병력과 좋은 무기를 주었으며, 참군 괴은, 왕윤지(王允之), 심연자(沈淵子)를 서규지에게 배속시켰다. 유유는 사마휴지가 토벌되면 서규지에게 형주자사의 자리를 주려고 했다.

서규지는 파총(破塚)에서 노종지의 아들인 노궤와 교전했으나 도리어 패배하여 왕윤지, 심연자와 함께 전사하였다. 유유는 서규지가 전사했다는 소식에 분노하여 자신이 직접 출병하려고 했으나 사회가 간언했기에 결국 그만두었다. 유유는 독호 정오(丁旿)에게 서규지의 시신을 수습하도록 명했으며, 사마휴지가 토벌된 뒤 서규지는 중서시랑(中書侍郞)으로 추증되었다.

서규지(徐逵之, ? ~ 424년)는 중국 남북조 시대 송(宋)의 개국 황제 유유(劉裕)의 사위로, 팽성(彭城, 현 장쉬성 쉬저우) 출신이다. 동진(東晉) 말기의 관료 서광(徐廣)의 조카이며, 유유의 장녀 유흥제(劉興弟, 회계선장공주)와 결혼해 아들 서담지(徐湛之)를 두었다.

생애와 주요 활동: 1. **정치적 배경**: 서규지는 동진 말기부터 송 초기까지 활동한 인물로, 유유가 권력을 장악하고 송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핵심 세력 중 하나였다. 유유의 사위로서 높은 지위를 누렸다.

2. **북벌 참전**: 415년(의희 11년), 유유가 후진(後秦)을 정벌할 때 서규지는 **서중랑장**(西中郎將)과 **양남진이주자사**(梁南秦二州刺史)로 임명되었으나, 부임 전에 군사 작전에 참여했다. 416년(의희 12년), 유유가 후진을 멸망시키는 전쟁에서 서규지는 왕진악(王鎮惡), 단도제(檀道濟) 등과 함께 출정했으나, 후진의 노양(魯陽) 수비대와의 전투에서 패배해 잠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유유의 배려로 복직했다.

3. **전사와 추증**: 417년(의희 13년), 동관(潼關) 전투에서 전사했다. 유유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중서시랑**(中書侍郎)을 추증했고, 그의 아들 서담지를 후대했다.

4. **가문의 영향력**: 그의 아들 서담지는 송 문제(宋文帝)와 효무제(孝武帝) 시기에 상서복야(尚書僕射), 단양윤(丹陽尹) 등을 지냈으나, 후에 황실의 권력 다툼에 휘말려 처형당했다(440년). 서씨 가문은 송 황실과의 혼인으로 권세를 누렸지만,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부침을 겪었다.

역사적 평가: 서규지 본인에 대한 기록은 상대적으로 적으며, 그의 위상은 주로 유유와의 인척 관계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조기 사망으로 인해 송 건국 후의 정치적 역할은 제한적이었으나, 아들 서담지를 통해 송 초기 외척과 귀족 세력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송서》(宋書)나 《남사》(南史) 등의 정사(正史)를 참고할 수 있다.